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예레미야 11:4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시편 47:6-7
부끄러움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다. 스스로 강직하다는 일은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한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두려워하여 숨지만 말고 주께 탄식하며 자복하고 상한 심령으로 고하였더라면. 상대적으로 다윗은 철저하게 자신을 부어 용서를 구하고 죄악 된 자신을 고하여 상한 심령으로 자복하였다. 우리가 주를 경외한다는 것이 스스로의 삶을 강직하고 온전하게 꾸려가는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처럼 바리새인들은 철저했고 나름 저들보다 더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았던 자들도 없었을 것이다. 흔히 우리 안에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일에서 뭔가 보답을 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신앙을 가지고 사는 이가 의외로 많다. 누구는 하나님이 여간 어렵고 불편한 게 아니다. 믿는다고 하고 의지하고 의뢰하며 누구보다 선을 추구하고 열심을 다해 살지만 저에게 하나님은 얼마나 인색하기만한지 모른다. 마치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숙제 같이 산다. 강박적으로 열심이고 선을 다한다. 교회에 헌신하고 가정에 희생한다. 모든 예배에 참여하고 그 열심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릇된 경외는 오히려 반역이다. “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 3:11-12).” 모세의 겸손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뢰하는 데서 온 게 아니었고, 그러한 저에게 하나님은 엄위하셨다. “내가 내 위엄을 네 앞서 보내어 네가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물리치고 네 모든 원수들이 네게 등을 돌려 도망하게 할 것이며(23:27).” 모든 게 결국 주가 이루시는 일일진대, 나는 아침에 잠깐 뉴스를 검색하고 허탈한 마음으로 말씀 앞에 앉았다. 또 누가, 나름 일평생을 강직하게 살았다고 자부할 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설마 하였는데, 결국은 그리 되었다.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었겠으나 그것보다 무서운 자기 확신이 또 있을까? 그렇다면 다윗이야 말로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이를 나단 선지자가 고할 때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야 옳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떻고? 블레셋 땅에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 하여 살 길을 모색하려 하였을 때 도리어 큰 변을 당할 뻔하였다. 아담은 그 마음이 짓눌려 결국은 하나님을 떠났고 숨었고 자신을 숨겼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우리 스스로 뭘 그렇게 대단하다고 자신을 용납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일까? 얼마쯤 선을 이루어야 하나님의 기쁨이 될까?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우리의 그 어떤 열심, 수고, 인내, 성공적인 삶,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줄 정도의 헌신, 그 어떤 제사보다 우리의 '상한 마음'으로 주께 통회하는 일을 주께서 더 기뻐하신다. 주의 도우심과 그의 처분을 달게 받는 마음이 겸손이다. 자칫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하는 당위보다 무서운 교만은 없다. 나는 누구의 죽음에 대해 왈가왈부할 마음은 없다. 자칭 ‘노사모’로 한참 누구를 좋아하고 존경하다 저의 자살 앞에서 나도 무너졌다. 조금 더 끝 간 데 없이 갔었더라면 나 또한 죽어 자빠졌을 것이다. 이로써 부끄러움을 안고 갈 수 있다고 여기는가? 나는 두려웠고 주께 엎드렸으며 탄식하였다. 다윗은 울부짖었고 아브라함은 용서를 구하였다. 그러그러한 사연이 사실이면 용서를 구하고, 아니면 묵묵히 주만 바라면 될 일이나 그게 쉬운가? 나름의 원칙과 방식이 죄였다. 이를 용납할 수 없다고 여기는 그 자체가 엄청난 교만이었다. 하나님 위에 자신을 앉히는 꼴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선을 추구하는 자신의 신념은 주의 임재를 못 견디게 한다. 그 두려움 때문에 오히려 주 앞에 못 간다. “이는 짐승이라도 그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히 12:20).” 그러할 때 말씀은 우리를 불러 세우신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출 20:20).” 주가 하게 하셔야 한다.
나는 허무하고 허탈하다. 대단히 누구를 지지하거나 선호하는 경향을 버린 지 오래이나 그럼에도 아쉽다. 우리 안에는 금지된 두려움도 있다. 이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로 착각하는 경향이 너무 흔하다. 앞서 말한 누구처럼 전형적으로 저에게 하나님은 어릴 적 자신의 부친을 연상케 한다. 한 번도 칭찬을 받지 못한, 늘 잘하고 또 잘해도 인색하기만 했던 부친의 사랑을 고스란히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아니라고 하고 저는 그렇게 또 주의 일을 감당하고 자녀들을 양육하고 있었다. 한 번 아니다, 하면 그 고집은 엄청나서 저의 처도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저는 이를 선으로 고집한다. 주를 경외하고 주의 일을 하는 기준으로 놓았다. 아, 그러니 저의 하나님은 늘 어렵다.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욥 21:14).” 사탄이 심어놓은 완고함이 두려움을 키우기도 한다.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 20:19).” 우리가 사는 데 있어 악을 행하지 않고 하루를 건널 수 있을까? 내 안에 있는 숱한 음란과 비난과 저주와 불평과 원망은 말할 것도 없고 수시로 이는 불법적인 행위는 또 어떻고?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지 말고 오직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삼상 12:20).”
그래도 된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나약하고 허물 많은 죄인인 것을. 이를 주께 아뢰고 고하고 주 앞에 구하고 바라는 일,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22).” 그 기쁘심이 된다는 것은 나의 완전과 최선의 삶이 아니다. 주께 더욱 의지하고 주만을 바라는 일이다. 그런데 주를 경외한다고 하는 일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불순종하게 하는 일을 가져오기도 한다. 강박적으로 성경을 읽고 예배에 참석하고 선을 구하고 의를 행하며, 그렇게 자신에게 철저한 것을 마치 하나님께 하는 일처럼 여기는 착각이 그것이다. 마치 한 달란트 받은 이의 항변이 그러하지 않았나?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마 25:24-25).” 저는 나름 최선이었다. 단순히 덜 받은 데 따른 열등감이나 자격지심에서가 아니라, ‘인색한 아버지 하나님’ 곧 주인에게 합당한 것은 맡은 걸 잘 보관하면 되는 거였다. 책임을 자신이 지려할 때 사단이 난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실 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그 결과는 주의 것이다.
경건은 그 이름과 모양이 전부가 아니다. 능력이다. 이 무모한 신뢰다. 그렇지 못할 때 변명이 구구해진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잠 26:13).” 자신을 뭉개고 숨긴다. 나무 그늘에 숨어 스스로 부끄러움을 덮는다. 실은 지배당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9:32-33).” 나는 누구의 자살과 오늘 나의 비루한 삶을 견줄 재간이 없다. 다만 이 약속의 말씀 앞에 앉을 뿐이다.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11:4).” 내가 자녀가 된 것이 아니다. 저가 나를 그리 예정하시고 택정하셨다. 저가 이루실 것이다. 그러러므로 내 행위를 의지하고서는 살 수 없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막 5:36).” 다른 수고와 애씀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시 47:6-7).”
자칫 나의 경외함을 스스로 선하다고 여겨 그 뜻을 굽히지 않는 그릇됨에 대하여,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막 7:4).” 나는 어떠한가? 형식주의자가 되고 경건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의로 여기심을 받"은 것이지 그만한 일을 행한 적이 없다. 할 수도 없다. 다만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4-25).” 이를 믿을 뿐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