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

전봉석 2020. 7. 11. 06:18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반드시 그 나라를 뽑으리라 뽑아 멸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12:17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

시편 48:10

 

 

성경은 좋기만 한 게 아니다. 쉬이 뒤적이며 읽고 말 내용이 아니다. 가장 두려운 존재의 말씀이다.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반드시 그 나라를 뽑으리라 뽑아 멸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2:17).” 반드시 그리하실 수 있는 분의 말씀이다. 가령 아무리 친분이 있다 해도 청와대로 초청되어 대통령을 만날 때, 저의 말 앞에 함부로 나설 자가 없는데 하물며 만유의 주, 창조주, 오른 손에 정의가 충만하여 심판하실 분의 말 앞에서 섣불리 굴어서야!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48:10).” 나는 오늘 말씀 앞에서 주의 엄위하심을 느낀다. 그 두려움은 단순히 무서운 것 이상의 위엄과 존귀가 있다. 하나님의 본성은 빛이신데 이 빛은 단순히 밝고 어두운 정도를 가르는 의미보다 크고 깊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1:3).” 빛이 비추일 때 땅의 속성은 고스란히 드러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그 혼탁과 무질서 위에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빛을 비추어 정의를 세우신 것이다.

 

어제는 누구의 자살로 마음이 어수선하고 답답하였다. 나름 훌륭하게 강직하고 정직하게 산다고 살아온 생의 끝자락이 너무도 허망하여, 나는 할 말이 많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먹먹하였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이는 것은 주의 섭리다. 스스로도 자신을 알 수 없는 가운데 하루 이틀 전만 해도 저 스스로도 알기는 했을까? 모든 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지지만 경건하지 못한 것은 끝은 허망할 따름이다. 그러니 내가 두려워하는 또 다른 하나는 나의 지속적이지 못한 마음이다. 아침에 묵상하면서 드는 마음이 채 오전이 다 지나기도 전에 휘청거리는가 하면 뒤돌아서기 무섭게 말로다 털어버릴 때가 많다.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하루를 겅중거리며 살 때도 있다. 그러할 때 요즘 나의 가장 큰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존 번연과 칼빈의 책을 읽는 일이다. 욕심이 생겨 존 번연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뜨거운 기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 <대언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네 권의 책을 더 주문하였다. 점점 고전으로 돌아가듯 나의 독서는 저들의 절박하면서도 충일한 말씀의 세계를 좋아하게 된다. 팀 컬러의 책이나 여러 현재 신학자들의 책은 좋기는 한데 자기 논리와 표현이 무성하고, 정작 말씀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아 갈급함을 느끼게 한다. 언제부턴가 나는 성경구절을 많이 언급하고 그 말씀을 기반으로 풀어가는 글의 진행을 좋아한다. 대놓고 무식하게 표현하면 점점 나는 문학적이고 현란한 사람들의 말잔치가 싫다. 이번에도 그리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출판과 동시에 100번째 안에 구입할 정도로 열성을 보여 저의 자필 서명도 받았을 정도이다. 그런데 결국은 반도 못 읽고 덮어두었다. 전에 그처럼 좋아하던 표현과 어휘의 현란함이 이제는 말장난 같이 유치하고 허접하기만 하여나의 아둔한 독법은 점점 단순해진다.

 

여하튼 공연히 허전한데 날씨도 잔뜩 저기압의 영향으로 허리도 다리도 힘들어서 일찌감치 아이에게 연락하여 어제는 오지 말고 쉬라고 했다. 교회 소모임 행정조치가 내려져 혹시 어쩔까 하는 우려도 있고, 다시 장마의 시작이라 몸도 여의치 않아 그리하였다. 책상 아래 난로는 가열하린 기운을 내뿜었고 등짝에 땀이 흘러 위로는 선풍기를 돌리면서, 나의 난해한 여름나기는 고달프기만 하였다. 누가 자살을 하였고 저에 대한 허망함이 마음을 또 어지럽혔고, 누구는 불안과 초조가 이제 일상적인 일이 되어 약을 더 먹어야 하는지 참아야 하는지, 우리는 누구도 자신의 연약함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생이었다. 어떤 두려움은 그리하여 더욱 주를 바라게 하나 어떤 두려움은 그러므로 주를 떠나게도 한다.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못 견디는 영혼이 늘어간다. “이는 짐승이라도 그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12:20).” 이를 사는 데 따른 일상의 일부분으로 치부해버리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희화화된다. 솔직히 나는 그래서 판타지을 좋아하지 않고 아무리 노력해도 C. S. 루이스의 <라니아 연대기> 같은 이야기는 적응이 안 된다. 최소한 일곱 번은 다시 읽고 또 읽고 하다 결국 포기하고 만 책이다. 누가 거기서 성경적인 의미로 사자와 얼음왕비의 존재를 해석할 때면 외려 난감한 느낌이 들 뿐이다. 그거야 나의 짧은 독서 방식의 문제이겠으나, 두려워하고 어려워하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여길 문제는 아니다.

 

누구와 통화를 하면 늘 저의 푸념은 너무 어려워!’ 하는 것이다. 성경도 하나님도 믿음도 신앙생활도, 저는 기껏 여러 말로 상담하다 어려워!’ 하고 나자빠지듯 말을 뺀다. 어제도 그러는 것을 나는 대놓고 그건 당신의 관심의 문제라고 일갈하였다. 박사학위에 곧 대학원교수가 될지도 모를 학식의 소유자가 정말 그 말을 몰라서 어렵다고 하겠나? 관심이 다르거나 안 가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시가 어렵다! 이렇게 말하면 한동안 시인을 꿈꿨고 나의 독서량의 50% 이상이 시집이고 시인들과의 교류를 즐기며 저들의 놀라운 사고와 어휘에 감복하며 살아온 세월이 반인데, 지금도 나는 시집을 읽을 때면 머리를 쥔다. 얼마 전에는 수백 권의 시집을 다 친구에게 주고 좋아하는 시인, 몇 권만 가지고 있다. 나는 아이의 게임이 어렵고 요즘 가요가 어렵다. 트롯에 매료되는 사람들의 감성이 어렵고, 우울증이 더해가는 누구의 안타까운 속수무책이 어렵다. 어렵다는 형용사는 그 자체로 난해한 표현이다. 기본 의미 명사나 동사가 무엇이 또 어찌하다가 어렵고 까다로운 것인데, 여기서 어렵다는 상식과 이해 너머의 이해를 담보로 하기 때문이다. 의역해보면 빛이 있기 전 땅은 그렇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이가 가득한지 몰랐다. 그 의미가 중요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빛으로, 빛이신 하나님의 존재가 그 수면 위로 운행하시면서 어찌 할 수 없는 무질서와 아예 빛 한 줄기 모르던 흑암의 깊이가 드러나면서, 이건 뭐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난간함 같은. 나에게 누구의 자살은 그와 같은 충격으로 다가왔고 누구의 심화되는 불안증세가 그러하였으며 이제 좀 익숙할 만도 한데 여름이면 되풀이 되는 몸의 고충으로 나는 난감할 따름이었다.

 

이럴 때 주를 바라고 의지할 수 있는 특권과 함께 그 무게가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이중적인 형태의 사실이 나는 어려웠다. 하나님이 좋은데 좋은 이유가 단지 내가 원할 수 있고 이를 들어줘서 좋은 것이라는 데는 두려움이 가중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면 굳이 하나님이 아니어도, 나의 필요를 충족시켜주고 해결해줄 수 있다면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신앙의 변질은 한여름의 생선 같이 위태로울 따름이다. 그러한 내게 모세는 전한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20:20).” 그 두려움이 긍정적이면서도 자칫 부정적인 게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더하시는 두려움이 있고, 사탄에게서 오는 두려움도 있다.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19).”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그 사이에 두고 싶어 한다. 마치 우리의 독서수준이 칼빈이 직접 쓴 글을 보기보다 저에 대해 쓴 글을 더 쉽게 본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보다 하나님이 하셨을 말씀에 대해 듣는 것을 더 쉬워한다. 어려워, 할 때 누가 하는 것을 수동적으로 보고 느끼기를 원하는 게 수월하다. 내가 직접 주를 따르기보다 주를 따르는 자를 선호하며 저의 길을 배우려하는 게 쉬운 것처럼 말이다. 우리 안의 두려움은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형질을 변형시킨다. 불안장애는 그에 따른 증상이다. 그냥 나의 무식한 이해다. 학적으로 맞는지 틀린지는 모르겠다.

 

누가 물으면 나는 당연히 의사가 아닌 환자로서 말해준다. 누구에게 말씀을 전하고 소개할 때도 내가 좀 나은 의인이 되어서가 아니라 여전히 죄인으로 그 답답함을 같이 토로하듯 증거 한다. 끝내 우리의 그릇된 두려움은 불순종으로 이끈다. 희한하지? 그래서 돌이켜 주의 도우심을 바랄 것 같은데, 열 명이면 열 명 다 헛된 길로 간다. 자기 아집보다 질긴 것도 없다. 성경도 누구보다 열심히 읽고(저는 벌써 올해만 4번째 통독을 했다!), 성경공부도 열심이고, 같은 모임에도 기꺼운 마음으로 참여하며, 저는 나름 경건의 모양를 실행하며 산다. 교회에 만들어져 있는 개인기도실도 자주 이용하고 그 안에 들어가면 몇 시간씩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기도도 오래 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위축될 정도이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경건의 능력이 없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나는 솔직히 두려운 게 이런 것이다. 저들 앞에서 주눅이 들 정도로 저들의 열심은 가열차다. 무엇도 다 녹일 듯이 이글거리는 풀무 같다. 전염병이 창궐하고 행정력이 금지하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를 순교하는 것처럼 받아들인다. 그러다 불쑥 이러고 있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 너나 잘해!’ 하는 말로 나의 말은 되돌아오기 일쑤다.

 

그런데 성경은 이르기를,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곧 그러는 저들의 뒷배에는 그래서 잘되는 현실을 보상으로 내건다는 것이다(1-4). 돈은 기가 막히게 잘 번다. 다들 코로나19로 휘청거린다는데 저들은 되레 일손이 모자라 밤샘을 할 정도로 바쁘다. 배운 게 많아 그 학식으로 누구 말도 아랑곳하지 않고, 되레 기성교회를 운운하며 비난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보면 부모와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다. 냉혹할 정도로 자기 이익에 분명하다. 누구에게 받은 상처, 원통함은 결코 잊지 않고 앙갚음 한다. 갖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건 가져야 하고 먹어줘야 그것을 행복이라 여긴다. 그렇듯 자신만만하면서도 기도했다고 돌아서기 무섭게 응답이 없음을 조급해한다. 나더러도 빌려준 돈 돌려받듯이 ‘~ 위해 기도해!’ 하고 청구하듯 말한다. 아이 이야기나 누구 어려워하는 이에 대해서는 길게 얘기하기 싫어하고 비정하다. 한 마디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그게 또 믿는 자들 안에서도 무성하구나!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성경의 말씀은 때로 너무 어렵다! 뭘 어찌 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엉거주춤 얼뜨기처럼 하나님 앞에서 쭈뼛거릴 따름이다.

 

그러는 중에 오늘 말씀은 왜 주의 심판을 즐거워할지, 분명해진다. “주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시온 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48:11).” 엉거주춤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를 때, 여기야! 하고 나를 불러 세워주시는 것 같아서 말이다.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14).” 이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한 일이며 엄청난 특혜인가? 그러니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9).”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