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예레미야 17:9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시편 53:1-3
일일이 열거하며 하루 동안의 일을 되돌아보지 않아도 그 가운데 주의 살아계심을 목격한다. 아이와의 대화에서 나는 하나마나한 소리에도 대꾸하며, 지치지 않기를 기도한다. 도대체 이런 소릴 왜 해야 하나싶고, 아이의 기도는 무슨 내용인지 갈피를 잡을 수도 없어 나는 그저 주를 바란다. 내가 무엇을 책임지려하는 그 자체로 우상이었다. 저를 앞에 두고 무얼 어찌 하려는 마음이야 가르치는 자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겠으나 그러다 화가 또 슬픔이 올라올 때면 이것이 숭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뭘, 해야 한다는 숭배. 저를 책임지려는 숭배. 나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주제인데,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이를 깨닫게 하신다. 내가 책임지려하는 모든 것은 우상숭배인 것이다. 그럼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그러려니 하고 그저 무책임하니 나 몰라라 해야 하는 것일까? 아이가 알아듣지 못하고 시켜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니 무시하거나 외면해야 옳은 일일까? 나는 아이의 기도가 길어질수록 초조한 마음으로 주께 물었다. 무엇을 하려 하면 숭배가 되고 그대로 그냥 내버려두려 하면 방기가 되어 자책을 일으키니, 예레미야는 주의 마음을 진술하고 있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10-11).”
곧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내 할 일을 할 뿐이다. 성과도 없고 돌아서면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것이라 해도,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이것이 현명한 판단인 것 같으나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이것이 사람의 실상이라.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오늘 시편의 진술은 나의 갈등을 다독이신다(시 53:1-3). 그럼 이제 어쩔 것인가? 견디고 또 견뎌 망부석이 될지언정 견뎌내야 하는 일일까? 아니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럴 때일수록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어떠했던가? 돌아보면 통회하는 마음뿐이라! 나 같은 것을 위해 그 지극히 존귀하고 영광스런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천한 몸을 입으사, 나 같은 하찮은 것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 앞에 가슴이 절절해지는 일이었다.
그러니 내가 뭘 좀 한다고 해서 그 성과에 또는 보람을 얹어 바라고 구하는 일이란 얼마나 염치없고 같잖은가? 무슨 일에 나름 애썼고 수고하였다고 그 결과를 보장 받으려 드는 일이라니, 한 것도 없으면서 하는 일에 쩔쩔매는 주제인지라. 나는 상대적으로 가망도 없고 죽어 마땅하였을 죄인인데 나를 대신하여 그것도 천하의 주, 만유의 주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나를 사랑하사> 그와 같이 <자기 자신을 버리신> 일 앞에서 어찌 감히 고개를 들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이 오늘 나의 맡은 바 사명이었다. 아이를 보고 아이를 위해 아이를 사랑하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럴 능력이 없다. 나도 다 사랑할 수 없어 나 하나 건사하고 이해하는 일에도 쩔쩔매는 주제에 하물며 누가 누구의 영혼을 위하고 바란다는 말인가? 결국은 주의 사랑이었다! 주가 남기신 고난이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바울이 교회로 인해 당해야 하는 고난을 기뻐하였던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어느 신학자가 정의하기를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죄인을 위하여 하시는 사역은 끝내셨지만, 죄인 안에서 하시는 사역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밑줄을 긋고 무슨 말인가, 묵상하다 물론 죄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맞지만, 세상을 살면서 묻혀오는 온갖 더러움과 추함과 악함에 대해서는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남았다. 곧 성자께서는 죄를 담당하셨고, 남은 사역은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거였다. 이를 ‘이루어가야 하는 구원, 성화구원’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내가 누구를 위해 또는 나 자신을 위해 무얼 하려 하는 것은 우상이 되지만 그럼에도 맡기신 까닭은 숭배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 다시, 나로서는 저 아이를 변화시킬 수 없어 늘 하나마나한 일 앞에서 또 같은 일을 반복함으로 저 아이의 영혼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는 동안 내가 변화되는 것이었고 이와 같은 성장이 성화를 이루어가는 길이었다. <결국은 십자가였다.> 아이와 무슨 말을 되풀이 하며 행여 누가 들을까봐 두렵기까지 한 하나마나한 소리와 소리 가운데서, 그럼에도 나는 또 한다! 이는 아이를 보고 하는 게 아니었다. 다시, 내가 나 하나 바로 이겨내지도 못하면서 나로 사는 까닭은 나를 온전히 세워 뭔가 그럴듯한 인생으로 뿌듯한 삶을 살려는 게 아니라, 이런 내게 나를 맡기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었다! 이 아이가 우리 교회에 당장 출석하는 성도로는 전부인 하찮고 별 볼 일 없는 교회를 하며 목회랍시고 이처럼 애태워하는 일도 결국은 다 주의 마음이었다. 내 마음으로가 아니었다. 내가 안달을 부리고 그 힘에 부쳐 안정제를 복용해야 하는 처지이지만 그 또한 내게 맡기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었다.
죄의 문제, ‘사탄의 영-종의 영’에서 놓여나 ‘양자의 영’을 얻었느니 더는 남이 아니다. 삯꾼도 아니다. 돈벌이로 이 일을 하는 게 아니고 먹고 살고자 이리 아등바등 사는 일도 아니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7-8).” 내가 어찌 그럴 수 있겠나? 할 때는 남으로서, 종으로서, 나와 무관한 일이어서 그러했다면 이제는 다르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지 말고 오직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삼상 12:20).” 나는 다만 주를 보고 하는 일이다! 저 아이를 대하는 일도, 나 같은 이 비루한 몸을 이끌고 사는 일도, 남보다 연약하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한심스런 마음을 부여잡고 수고하는 일도, 그리하여 주의 긍휼하심을 알기 때문에! “만일 그의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하지 아니하며 내 율례를 깨뜨리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시 89:30-32).”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는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33-34).” 아무리 못나고 또 실패하고 또 낭패가 되고 좌절해도 이제 나는 주의 새끼라! 주의 자녀인 나를 더는 안 되겠다, 하고 내버리실 리 없다. 없던 일로 하실 리 없다. 끝까지 책임지실 것이다. 주가 이루실 것이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사 63:16).” 주가 책임지실 일이지 나의 책임이 아니다. 아무런 성과도 없는 것이 또는 나 하나 온전히 바로 서는 일에서도 묘연한 까닭으로 기진하여 있을 때도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예수님이 증인이시다.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행 13:33).” 하도 답답하여 아이가 기도할 때 눈을 뜨고 아이를 보며 울컥, 주의 이름을 불렀다. 하박국서 3장 17절로 19절을 적어주고 암송하게 하였는데 그것은 순전히 날 위한 일이기도 하였다. 말씀밖에 답이 없다는 결론이다. 다시 오늘 말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13).”
나는 아닐 거라 여기는 그 자체가 우상이다. 내가 할 수 있고 내가 책임져야 할 것처럼 구는 것이 숭배이다. 아,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14).” 주밖에 답이 없다. 더욱 더 주 앞에 엎드리게 하시는 것이다. 내가 저 아이로 힘든 것은 내가 나로 힘든 것에 비하면 아주 쉬운 일이라. 나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 그러니 이 일을 어쩐다? 왜 점점 세상이 이 모양이냐고? “보라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 하나이다(15).” 나는 아니 그런가? 내 안에 이는 좌절이 또는 실망이 이와 다를 게 무엇인가? “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그 목을 곧게 하여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였느니라(23).” 말씀을 가까이 한다 하면서도 돌아서기 무섭게 또 나를,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이 곧 죄의 남은 반복이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5).” 말씀은 진리다. 나로 하여금 변명할 수 없게 하신다. 아,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시 53:2-3).” 그러니 어쩔 것인가? 내가 애써 수고하여 나의 애씀을 훈장처럼 가슴에 품고 주를 원망하며 살 것인가?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6).”
나는 이제 종의 영이 아닌 양자의 영으로 산다는 것!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하시는 말씀 앞에 아멘이다(롬 8:17-18). 주가 이루실 것이다. 주가 다 이루시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