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전봉석 2020. 7. 21. 06:26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 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 그는 다시 돌아와 그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라

예레미야 22:10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시편 58:11

 

 

슬픔에는 정도가 없고 마음이 가는 데는 별 수가 없다. 때로는 이 마음이 내 것인지 누구의 것인지 가늠하지 못한다. 다만 이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이라니. 이런저런 마음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하고자 하는 마음은 아무나 아무에게 허락하신 마음이 아니다. 같은 가족인데서 서로가 다르고 그처럼 뜻을 같이 하는 동지인데도 서로가 모를 일이다. 이를 존 번연은 그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두려움은 하나님이 아주 특별히 총애하는 사람에게 두셨다.”고 하였다. 나는 저의 말에 갸우뚱하다 종일 그 말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고, 은근히 그게 나였으면 하는 마음도 들었다. 이에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1:8).”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만큼 사탄도 가만있지를 않는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9).” 남다른 선물은 아무에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결코 그냥 헛되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겉으로 드러나는 무엇도 아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2).”

 

그 사랑은 주님의 마음이다. 때로는 내 안에 들볶이는 마음이 주의 것이다. 그것으로 주를 떠나지 못하게 하신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32:40-41).” 주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열고 하루와 싸우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와 같은 마음으로 자라간다. 이를 떠나지 않게 하라!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14:16).” 두려워할 줄 알아야 떠난다. 스스로 방자하면 자신을 믿는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그래서 용을 쓰고 그러는 동안 무엇을 잃고 무엇을 돌아보지 못하는지, 저는 어리석은 채 알지 못한다. 결국은 내 안에 두시는 두려움이 귀한 것이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커진다는 것은 겁을 먹었다는 소리가 아니라 더욱 더 존경하고 경외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주를 바라게 하시려고, 그때는 그렇게 하셨구나! 하는 것은 나는 늘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여기시며 권하셨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12:4-5).”

 

정작 슬퍼해야 할 게 있고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게 따로 있다. 오늘 말씀은 이를 깨우친다.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 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 그는 다시 돌아와 그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라(22:10).” 이미 지나간 것에 대하여는 애통한들 소용없는 일이고, 살아서 아직 산 자의 꼴을 두고 슬피 울라. 이어서 같은 음성으로 들리는 시편의 말씀도 귀하다.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58:11).” 결국 이 땅을 사는 사람들처럼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해야 할 이를, 참으로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이다. “이 백성이 반역자가 있다고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반역자가 있다고 하지 말며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8:12-13).” 말씀 앞에 가만히 있다. 뭘 어떻게 해야 하지, 하다 그만둔다. 누가 뜬금없이 무슨 교육을 듣는다고 하여 나는 성경공부인가? 하고 물었다. 그간 하던 일이 코로나사태 후로 일자리가 없이 그리 방향을 틀었는가보았다. 그게 무엇인지, 그래서 어떻게 되는 것인지, 물어볼까 하다 말을 끊었다. 그런 거 보면 내남없이 가만있지를 못한다. 그만하면 됐다 싶어 그것으로 이제 주를 바라고 의지하였으면 하였는데다들 아직 남은 생이 오래인 것으로 여겨 살 궁리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나야말로 요즘은 하루가 참 길다. 어쩌다 일어나는 시간이 새벽 4시반이 되면서 넉넉하게 시간을 두고 묵상 글을 쓰고, 이를 오전 일찍 교회로 올라가서 또 아침나절을 보낸다. 보통 7시에 출근을 하듯 나가는 셈이니, 그런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말씀만 붙들고 하나님만을 바란다. 아내와 자식들에게조차 속엣 얘기를 변변하게 털어놓지도 못하고 때론 냉가슴 앓듯 혼자 앓다 만다. 말해봐야 남이나 가족이나 서로의 마음을 다 알 수가 없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느니 내가 주의 거처가 된다는 것,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31:30).” 오직 주를 경외하는 자로 산다는 것은 슬퍼도 주를 위해 슬프고 기뻐도 주를 위해 기쁜 것인데, 이는 먼저 주를 존중함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 2:30).” 주를 바란다는 일이 무슨 구호가 아니다. 그저 실제다. 가만히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어떤 일을 두고 또는 누구와 무엇을 생각하다 주를 먼저 바라는 일. 그러할 때 주가 맡기시기도 하고 덜어주시기도 한다.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2:5-6).” 나는 이를 간절히 원하나 늘 그렇지 못해 송구하다. 머리로 아는데 가슴이 반응하지 않고 가슴은 뛰는데 몸은 따르지 않고, 제각각의 내가 나는 종종 어렵다.

 

다들 생각을 좀 덜 하라 하고, 그냥 내버려두라 하는데 그게 그렇게 맘대로 되는가? 병적으로 예민하여 약물로 다스리며 사는 위인이다 보니 정작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 나 자신이지 않겠나? 가령 오전에 누가 무슨 강사 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나는 저의 사정과 처지를 감안하여 혼자 있는 시간과 말씀에 더 집중하였으면 했는데, 뜬금없이 무슨 강연에 불려 다니는 일을 도모하려는 것인지. 내가 뭐라 할 일이 아니어서 그냥 듣고 말았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로지 레위’에게 있다. ‘유다에게 뿐이다. ‘이스라엘이 전부인 것이다.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로다(33:10).” 그러므로 오늘 내게 향하신 그 사랑이 나를 고달프게 한다 해도 나를 고달프게 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라 주를 더욱 바라고 오직 주만 의지하게 하려 하심이었으니, 이것이 특별한 은사였다! “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큰 일은 모두 네게 가져갈 것이요 작은 일은 모두 그들이 스스로 재판할 것이니 그리하면 그들이 너와 함께 담당할 것인즉 일이 네게 쉬우리라(18:22).” 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가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7:2).” 그렇게 구별하심이 주의 일을 맡은 자였다. 말 그대로 아무나 말씀 붙들고 사는 게 아니었다.

 

당대의 기근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앞서 요셉을 애굽에 세우셨고, 아합의 때 이세벨의 폭정과 잔악함으로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숨기시려고 오바댜를 세우셨으며, 모르드개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다니엘을 붙들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도탄에 빠진 민족들을 돌보게 하시었다. 이것이 사명이고 역할이다. 내가 나서서 나라를 구하는 게 아니었다. 앞서 행한다고 하여 내가 한 영혼이라도 구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저 주를 바랄뿐. 말씀으로 말씀 앞에만 서기를.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자꾸 누구 뭐라 할 거 없다. 남은 물론 자식도 내 것이 아니다. 저들은 또 저들의 길을 가고 그 길에서 주가 마주하실 것이다. 다만 오늘, 여기가 나의 길이라. 나는 길 위에 서서 주만 따른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1:4).” 그러할 때 참 필요한 게 인내다. 가시적인 성과는커녕 내 앞가림조차 못하고 사는 주제인데, 내가 누굴 가르치고 훈계하고 붙들어 새사람을 만들겠나? 그야말로 나 하나 바로 서는 게 일이라! 그러할 때 주께서 필요한 데 쓰신다. 쓰실 때를 위해 가만히 두시는 것도 일이고, 나는 하는 게 없는 것 같은데 여기 이렇게, 또 하루를 두시는 이가 필요한 것으로 사용하시는 일이었다. 그러니 슬퍼할 것을 슬퍼할 줄 알고, 기다릴 것을 기다릴 줄을 아는 것이 숨은 실력이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다만 주께 맡긴다는 일이 이처럼 쉬우면서 어려운 일이다. 이에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16:3-4).”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게 하는 것이 나의 소임이다. 가만히 말씀을 끌어다 앉으며,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58: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