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

전봉석 2020. 7. 23. 06:1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

예레미야 24:5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

시편 60:12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바로 이해하고 안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은혜다. 그런데 성경 어디를 둘러봐도 사람의 이해와 바람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서 한참씩 모자랐던 것을 본다. 가인과 아벨 사이에 아벨은 가인에 비해 하와의 이상이었다. 에서와 야곱 가운데 리브가의 사랑을 받은 야곱처럼 말이다. 더욱이 저는 형 에서를 속여 축복을 독차지하기까지 하였으나 실제의 삶을 놓고 보면 얼마나 험악한 인생을 살았던가. 아벨은 형 가인의 돌에 맞아 죽었고,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밧단 아람 라반의 집에서 반생을 살아야 했고 저의 남은 생도 고단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꼭 이 땅에서의 성취와 결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이내 왕권을 쥐고 그 누구보다 축복의 상징으로, 지혜의 왕으로 살았던 솔로몬의 최후 진술에서도 나타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그러니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저의 깨달음은 다소 의아할 따름이다.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7:3-5). 그렇듯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던 이들 가운데 나른한 오후처럼 복에 겨워 삶을 누리고 살았던 사람들은 드물다. 그래서 예수님의 젖동생 야고보는 훗날에 이렇게 진술하였다.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1:10).”

 

곧 이 땅에서의 성취가 행여 주를 멀리하게 되는 경우가 많고 그리하여 자신을 자랑함으로 하나님은 경홀히 여김을 받으시는 경우도 있다. 이어서 저의 말에 귀 기울여보면,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11).” 여기에서의 결과를 두고 왈가왈부할 게 아니라는 소리다. 오히려 성경의 중심은 하나다. 우리 인생의 연단은 다 그 목적이 있고 이는 늘 선하였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12:11).” 그러니까 내가 이 말씀을 읽고 있을 때 마음까지 까부라져서 우울해하던 중이었다. 장맛비가 요란하게 퍼붓기 시작하였고 몸은 어려워서, 모처럼 오겠다고 알려온 아이에게 장마 좀 끝나고 다음에 보자고 하고, 매일 오는 아이에게도 오지 말라고 한 뒤였다. 눅눅한 날씨처럼 몸은 천근만근이었는데 마음까지 비루하여 공연히 입을 댓 발 물고 있을 때였다. 내 몸의 화창한 날씨를 바라는 것은 아니라 해도 어디가 아프고 불편하고 힘에 겨워, 그것으로 신경 쓰고 부대껴야 하는 일이 고달프게 여겨졌다. 그러할 때의 말씀이었다. 마치 오늘의 내 처지가 징계 같다. 당연히 즐거울 리 없다. 매번 징징거리듯 어디가 아프단 소릴 하는 것도 지겹다. 스스로 슬프다. 한데 이것으로 후에 그로 말미암아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라니! 결국 오늘의 처지로 무슨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오후께 되어 여남은 장의 메모한 종이를 정리하면서 알았다.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고 성경구절을 메모하고 뭐라 끼적거리며 정리한 것이 열 장을 넘긴 것이다. 나로서는 할 게 없으니 말씀만 붙든다. 이처럼 그것을 펼쳐보며 아침의 묵상을 돕는다. 아니, 도우신다. 전날에 내가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였는가는 손에 쥐고 있는 메모지 장수와 비례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11:33).” 내 힘과 노력으로 하나님을 알겠다고? 저의 행하심과 그 계획과 의도를 파악한다고? 주의 뜻과 섭리를 이해하겠다고? 바울 사도는 단언하는 것이다!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나의 이해와 상식으로는 다가갈 수도 알 수도 없는 세계이다. 누가 다소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하였다. 마흔이 다 돼 결혼하여 첫애 둘째애를 연달아 보았는데, 둘째가 선천성난청이란 판정을 받고 실의에 빠졌단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이 그 부친은 파계승으로 어디 암자를 가지고 있는 주지승이다. 그러니 아이엄마가 처녀 때 믿음이 좋았던 사람인데 뒤늦은 결혼에 믿는 사람도, 가정도 보지 않고 그리 결혼을 했던 모양이다. 중간에 그 말을 전하며 자기 후배를 위해 기도해달라는데 나는 무슨 기도를 해야 할지 잠깐 되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모든 시련에는 이유가 있고, 갑작스런 일에는 하나님의 다급하신 심정이 있다. 직접 저들에게 향한 것인지 그 소식을 전하는 누구를 위한 것인지, 나는 노트에 그리 적다가 말았다. 그래서 복음은 계시다. 열어 보여주시지 않는 한 우리 스스로 알 길이 없다.

 

내가 머리를 높이 들면 주께서 젊은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며 내게 주의 놀라움을 다시 나타내시나이다(10:16).” 내가 감사한 것은 도리어 나의 연약한 육신과 늘 별 볼 일 없는 마음이다. 그래서 더욱 더 주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와 주의 이름을 간절히 부를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이 은혜가 족한 것이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온 몸에 치렁치렁 파스를 붙이고, 자식들 보기에도 민망하여 앉고 일어설 때면 끙, 하고 앓는 소리도 속으로 삼키면서도나는 덕분에 설교 원고 초안을 여러 번 수정하며 작성하였고, 존 번연이나 칼빈의 책을 붙들고 저들이 씨름하였을 말씀으로 족하였다. 희한한 일은 전에 그처럼 즐기던 책들은 이상하게 손에 잡히지를 않는다. 새로 출간했다고 선생이 보내준 책들이나 이번에서 어디 후보 상으로 오른 친구의 새로 쓴 소설도 읽어보기는 해야 하는데, 그게 참어떤 의미에서는 매일 똑같은 소리 같이 존 번연의 책이나 칼빈이나, 로이드 존스 목사의 설교집이나 옥한흠 목사의 설교나, 다들 그 소리가 그 소리 같은데 그걸 또 읽고 또 듣고 하면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다른 더 좋은 길을 나는 알지 못한다. 결국 하나님의 기쁨은 우리의 거룩이 자라가는 것이지 이 땅에서의 승패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를 베드로는 단도직입적으로 전하였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결국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우리의 거룩인데 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는 것이고, 주의 뜻에 합당하게 순종하는 삶이고, 열매를 맺는 삶이다. 말이 쉽지 열매를 맺는 것은 자기가 죽어지는 일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12:24).” 그런데 독자적으로 자신이 살겠다고 하면 무슨 수로 열매를 맺을까? 예수님도 밀알이 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8).” 바울은 이를 위해 날마다 죽는다고 하였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결국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일이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사나 죽으나 내가 주의 것이라니! 이는 나는 육체를 죽임으로 내가 산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3:5).” 남보다 못한 오늘의 나로 나는 남보다 절실하게 주의 도우심과 저를 바람이 나를 주도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전에처럼 뭐든 내가 할 줄 알았고, 해야 한다고 여길 때는 뭐라도 하려고 기를 쓰고 사람을 기웃거리며 저들로부터 인정받는 삶이 되고자 애썼으나 지금은 그게 다 헛되다는 것을 알았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산다는 게 얼마나 귀하고 고결한 것인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 저마다 가지고 사는 사연은 그 필연 속에 하나님께 대한 거역하는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 처녀 때 혼자일 때 그처럼 바라고 구하던 주의 사랑은 한 남자의 사랑으로 가정을 이뤄 사는 데 연연하다 선천성난청이란 아이의 병명을 듣고 무너지면서 그 안에 다시금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기력이 생길까? 나는 이를 바라였다. 무탈하게 떵떵거리고 누리며 천년만년을 사느니 단 하루를 살아도 온전히 주를 바라며 주의 은혜를 회복할 수 있기를. 이내 죽으면 살고 살면 죽는 것이 우리네 이치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17:33).” 열매는 죽은 씨앗에서 싹을 틔워 올라오는 줄기에서 나온다. 그러자면 뿌리를 바로 내려야 하는 것이다.

 

이 원리는 내가 주 안에 주가 내 안에 거하심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15:5).” 우리의 열매가 출세와 성공일 리 없고 누리고 잘 사는 데 목적이 아니라면, 오히려 그와 같은 돌과 가시를 걷어내야 한다.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13:22-23).” 뻗어나는 염려의 넝쿨을 잘라내야 한다. 세상을 사랑하고, 물질을 신뢰하며, 자기 능력을 과신하고, 그 주장을 내세우는 가운데서는 믿음이 온전히 뿌리내리지 못한다. 기도의 내용이 시집 장가가는 일이고, 병 고침을 받는 일이고, 목표와 이상을 이루는 것이라면, 그리 수고하였더니 거기가 애굽이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 4:10).” 또한 많으므로 떠나고,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19:22).”

 

이를 붙들고 내가 씨름하고 근심하는 동안에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주가 돌보신다. 여기에서 감사뿐이라. 감사는 하나님의 평강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4:6-7).” 감사는 곧 전파되는 증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26:13).” 감사는 사랑이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7:47).” 은총이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6:38).” 감사가 곧 믿음이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1:8).”

 

이 아침 말씀을 끌어다 되뇐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24:5).” 비록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는 저들 신세지만, 주가 잘 돌보시겠노라고 예레미야에게 광주리에 담긴 무화과로 환상을 보이시며 약속하신다. 그처럼 오늘도 주가 돌보실 것이다. 내가 염려할 것이 아니다. 자식도, 아이들도, 심지어 나 자신의 이런저런 어리숙한 문제들도 주가 책임지실 것이다. 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60:12).” 하는 오늘 시편의 말씀이 마침표 같다. 결국 나의 입에서 나오는 감사는 그 자체로 기적이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주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응답하소서(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