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전봉석 2020. 7. 31. 06:32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

32:27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시편 68:19

 

 

기도에는 능력이 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5:15).” 마치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처럼 여기지만, 하나님으로 행동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다. 한 기독교 학교 교장에게 학부모들이 항의표시를 했다. 왜 교회가 행동하지 않는가? 학교는 입장을 표명하고 현실참여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장이면서 그 교회 담임목사였던 저는 성도의 갈린 의견을 두고 침묵하였다. 강경발언을 쏟아내던 몇몇이 급기야 정식으로 교회와 학교의 입장문을 요구했다. 목사는 이른 새벽 단체문자를 돌렸다. 교회와 학교는 기도한다. 행동하고자 하는 이는 각자 믿음의 분량에 따라 행동하시라. 이와 같은 내용을 누가 전화로 알려주며 나는 어찌 생각하는가 물었다.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3:20-21).” 우리는 율법과 복음에 정통해야 한다. 그러자면 부지런히 깨어 있어야 한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2:3).” 복음의 진의가 무얼까?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4-5).”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이런 내용을 본 적 있다. 마귀를 지칭하는 삼촌 스크루테이프는 악령, 졸개로 비유되는 조카의 편지를 읽고 웃었다. 조카는 원수의 기도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는데, 원수는 예수이고 저를 믿는 성도들을 지칭한다. 저들이 기도할 때 능력이나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조카는 문의한 것이다. 삼촌은 의기양양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도하는 성도는 물론 무섭지. 기도는 능력이 있어. 하지만 조카야. 너무 당황할 것 없다. 기도하게 해. 열심히 기도하는 것도 당황할 것 없다. 다만 저의 안에 자기 신에게하게 하면 돼. 너도 곧 알게 되겠지만 원수는 하나지만 각자 바라고 있는 신은 각양각색이거든! 이처럼 은유적으로 풀어놓은 루이스의 글은 재미있으면서도 의미가 깊다. 누가 나에게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고 묻고, 심지어 너는 어느 쪽인가? 하고 묻는 것이 이 땅의 방식이라,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쪽인가를 확인하고 싶어 하고 이를 철저하게 확신하려는 경향이 있다. 기도밖에는 다른 능력은 없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26:41).” 나에게 기도란 우선 마음이 볶인다. 어떤 일이나 누구에 대한 마음이 들어와 감정이입이 이루어진 것이다. 외면하고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생인손처럼 아주 작고 사소한 일 같은데 온통 고통스러워 견딜 수 없이, 계속 속이 볶인다. 저에게 말한들 소용없고 내가 어찌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능력도 안 된다. 그러할 때 이를 기도의 신호로 여긴다. 그러니까 나의 기도는 주밖에 달리 아뢰고 의지하고 도움을 구할 수 없는 일이나 상황에 대한 것인데,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간다는 게 요즘은 그와 같이 온유하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둘씩 늘어나는 것 같다.

 

남의 일은 물론이고 자식 일도, 내 자신 일도 어느 것 하나 주 없이 할 수 있는 게 없다. 아니, 그리 행하려 할 때면 어김없이 문제가 생긴다. 곧 우리의 문제는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려고 하는 것과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는 경향과 그 문제로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못 미치는 것 문제다. 당장의 의분이 또는 선한 의도 내지는 나름의 각오를 중시할 때 이를 말씀에 비추지 못하고 여타 사람들의 동향에서 살피려는 따위의, 마치 자신은 잡은 줄로 여기는 교만이 그 안에 큰 것이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3:13-14).” 그러니까 내가 요즘 주의하려고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잘 안다고 여기는 마음이다. 마치 하나님과 동등 된 존재인 것처럼, 그 사랑은 의당 내가 독차지해서 나는 뭘 해도 괜찮다는 식의 오만방자함이 내 안에 있지는 않은가, 하는. 누구와 성경공부를 하면서 나는 저의 기도에 똑같은 의문을 가졌다. ‘나는 결심했으니 하나님이 결정하십시오.’ 하는. 분명히 기도에는 능력이 있다.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마음은 기본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 천군천사가 움직이고 성령이 행동하신다. 섣불리 기도가 오가는 그런 정도가 아니다. 한데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처럼 졸개 마귀는 우리 안에 각자의 신, 자기가 알고 지향하고, 붙들고 싶어 하는 하나님을 부각시켜 자기 유리한 쪽으로 저의 결정을 유도할 수 있다고 조성하는 것이다. 아주 살짝만 비틀면 누구보다 열심 있는 기도가 또는 희생과 헌신적인 기도가 전혀 엉뚱한 요구와 바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사탄이 더 잘 안다.

 

나는 문득 왜 그처럼 타락한 사람을 돌이키시려 하셨을까? 차라리 그보다 타락한 천사를 돌이키거나 되돌리시는 게 훨씬 수월하였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고 보니 가장 어렵고 이해 안 가는 것이 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그처럼 하나님은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부어주시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어쨌든 현재로서는 사람보다 천사가 더 우월하지 않나? 저들을 돌이켜 주의 자녀로 삼으시는 게 타락한 사람을 돌이켜 주의 자녀로 삼으시는 일보다 빠르고 간단하고 수월하셨을 텐데. 그랬다면 굳이 사람으로 오지 않으셔도 되었을 텐데. 그것도 왜 나 같이 하찮고 보잘것없는, 죄 많은 자를 끝내 돌이켜 주의 길을 가게 하신 것일까? 누구와의 성경공부에서 나는 그 은혜로 감격이 벅차올랐다. 또 오후께 누구와의 통화에서 그처럼 열심을 다해(?) 주를 바르게 섬기려는 이 시대의 훌륭한 기독교인들이 많은데 왜 하필? 고작 나 같은 나를?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8:12).” 참으로 난해하고 놀라운 사실은 내가 주의 자녀이고 백성이라는 사실이다! 누가 되고 안 되고, 그러니 사회정책이 어떻고 구조적인 문제가 어떻고 하는 일보다 더 큰 문제는 이다. 그런 나를 위해 주께서 기도하신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7:24-25).” 오늘도 이처럼 주를 힘입어 주께로 나아가게 하시는 것은 주님이시다. 내 의지로 알람보다 일찍 눈을 뜨고 이처럼 하루 첫 장을 말씀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가 이른 시간에 오고 함께 말씀을 가지고 삶을 나누고 사역을 다루며 주께 의뢰할 수 있는 것도 나의 능력이 결코 아니다.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신다. 내가 돌이켜 주의 뜻을 따름으로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 게 아니라, 아직도 원수 되어 있을 때, 죄와 허물로 죽어 있을 때,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5:10).” 그러한 쓸모없는 나로 주 앞에 돌이키게 하신 이는 분명히 주의 은혜다. 내 의지나 나의 결의와 행동이 아니다. 존 뉴턴의 말처럼 먼저 수렁에서 건진 바 된 자신이 여전히 수렁에 있다고 누구에게 돌을 던지고 밀어 넣을 수 있겠나? 하고 물었다. 저는 노예선 선장으로 악명 높은 자였는데 돌이켜 주의 은혜에 붙들렸을 때 누구보다 온유한 자가 되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주가 그리 이끄신다. 행동하는 지식인, 행동하는 종교인들이 판을 키운다. 구획을 나누고 진영을 나누어 서로가 서로를 겨눈다. 마치 이쪽은 선 저쪽은 악인 것 같다. 사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저들이 말하는 저쪽, 아직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의 일이다. 자신이 한 게 아무 것도 없으면서 마치 선봉에 서서 돌을 들고 상대의 머리를 겨누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로 인해 오해와 불신은 커지고 더 무서운 일은 하나님에 대하여 사람을 반목하게 한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7-8).” 나는 이제 누가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물을 때, 기도한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15:16).” 부디 말씀 앞에 숙연하여지고 더욱 더 온유하기를. 오늘 말씀에서도 이를 붙든다. “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32:27).” 이를 안다면 함부로 나서 누가 누구를 정죄하고 판단한 일이 아니다. 바울은 자신이 자신도 판단하지 않고 누구에게 판단 받기도 거절하였다. 그 하나님은 날마다 매순간 나와 함께 하신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68: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