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예레미야 33:15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시편 69:32
때는 아직도 비루하고 참혹하였다. 예레미야는 갇혔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 곤고함을 당하고 있었다.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렘 33:15).” 이와 같은 말씀은 때로 잔인하게 들린다. 도무지 그러한 사랑, 나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찌 감당할까?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시 69:32).” 아, 우리의 곤고함 중에 주를 찾는 것이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겪고 있는 곤고함을 견디며 하나님을 찾는 것이겠다. 시인은 이어서 노래한다.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29).” 주가 행하셔야 하는 일이다. 우리가 개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30-31).”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그럴 수 없는 중에’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는 우리 모습이 안 믿는 이들이 보기에는 더욱 더 한심하고 민망할 수 있는 일이겠으나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32).”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어찌 분별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자신도 갇혀서는 그러한 자신을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같이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라고 하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9).” 이 모든 게 하나님의 뜻 때문이었다. 영원 전부터 예수 안에서 은혜대로 하시는 일이다! ‘오직 자기의 뜻과 은혜’ 때문이라는 말씀인데….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우리 ‘지식으로 알 수 없는 이유’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다. 이는 스스로 결정하시고 그리 바라시는 목적이다. 여기서 분명히 붙들어야 하는 것이 저는 선하시고 인자하시며 공정하시고 공의로우시다!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묻지 않는 것은 우리의 지혜다. 바울은 이를 두고 논쟁하고 쓸데없는 상상과 추론과 의미부여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4).” 즉 내가 나를 잘 안다! 내가 이해하고 이를 다 알 수 있다면, 이미 그것은 지식을 넘치는 사랑이 아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3:18-19).” 지식에 넘치는 사랑, 도무지 나의 지식으로는 알 수 없고 이해하고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인데 이를 두고 묻고 따지고 씨름하는 그 자체가 이미 불신앙의 일종인 것이다. 어째서 우리를 지으시고 타락을 지켜보시고 구원하시는지 그 이유와 목적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 그러니 오늘 성경에서 예레미야도 다윗도 저들의 처지와 그 상황과는 상관없이 주를 의지하고 신뢰한다는 것 아닌가? 어째서?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렘 33:16).” 반드시 올 ‘그 날’을 아는 것은 주의 약속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스스로 가치를 운운하고 무엇을 규정하며 자신을 선도하려 드는 것이 죄악 되다. 완악함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이 ‘지식에 넘치는, 하나님의 뜻과 은혜,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찌할까? 모세의 진술을 들어보자.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느냐?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신 4:31-34).”
곧이곧대로 내 이야기로 들린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돌이키셨고, 어떠한 유년의 시절에도 함께 하지 않으신 적이 있었던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채우시고 인도하여 주심을 알지 않나? 어쩌면 나는 우울하였고 조금은 답답하여서 남모르게 힘이 들던 하루였다. 장마철이라 몸은 고단하고, 그 이유로 아이는 당분간 오지 않도록 하였더니 오히려 더 자꾸 신경이 쓰였다. 아무리 그래도 좀처럼 나아지는 것은 없고, 점점 더 나이 들며 내 몸 하나 구사하는 일에서도 힘에 겨울 텐데… 하다못해 가족들에게조차 변변하게 모범이 되지 못하는 위인이라. 그러한 신세한탄으로 혼자 은근히 꿀꿀하고 있던 하루에서 말씀이 나를 찾아오신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 40:5).” 돌아보면 나의 생 그 어느 순간도 주의 은혜가 아니었던 때가 없다. 심지어 하나님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탕자’처럼 허랑방탕하게 지낼 때도, 가만히 돌이켜보면 더 그릇된 길로 가지 않도록 그때마다 막으시고 돌보시는 이가 계셨다. 더는 손 쓸 수 없이 파국으로 치달을 때도 비로소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려고, 내 입을 열어 주님! 하고 찾을 때까지 참고 또 기다려주신 이가 그 자비하시고 인자하신 나의 하나님이 아니셨던가? 그때 이미 죽어 마땅했을 죄인인데…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139:17-18).”
꿀꿀하니 어쩌니 하면서도 이처럼 설교 원고를 작성할 때에 말씀으로 찾아오시고, 아침에 몸을 삐끗거리며 일어나 앉자 말씀을 열어 보이신다. 이 지식이 나에게는 참으로 기이할 따름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6).” 어째서 나 같은 쓸모없는 자를 이리도 사랑하시는지, 이를 위해 왜 하나님은 그처럼 오랜 시간을 참고 기다리셨는지, 또한 오늘도 여전히 더디기만 한 완악한 마음을 어르시며 말씀으로 위로 하시는지, 나는 나의 지식에 넘치는 그 이유와 목적을 알 길이 없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도무지 측량할 길이 없다. 하나님의 뜻, 그 놀라운 섭리의 세계를 가늠조차 알 수가 없다. 누가 애 둘 낳고 뒤늦게 애써 지난 10여 년을 죽어라 하고 박사학위를 따고 어디 강사 자리라도 구하고 있는데, 한참 늦게 그것도 자격요건이 되지 않아 논문 수도 이력도 갖추지 못한 한참 후배가 ‘엄마 찬스’를 쓰며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원망이 나온다며 전화를 하였다. 씩씩거리며 여전히 분이 삭히지 않아 하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 나에게도 교수 엄마를 주시던가? 이게 말이 돼? 하며 부당함을 호소하는데… 그러니 뭐라 일러 위로의 말을 건넨들! 마른 우물에 갇혀 있으면서, 로마 감옥에 갇혀 기약할 수 없는 세월을 보면서, 앞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주의 이름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그러는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인 것을 오히려 곤고한 중에 있는 자에게 그러한 자신의 처지가 도움이 되고 이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라 말하는 것일까? 오늘 본문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긴 장마철 내내 온 몸에 파스를 잔뜩 붙였더니 피부가 다 뻘겋게 성이 났다. 그 위에 다시 파스를 붙이면 불에 덴 듯 화끈거려 한참을 몸을 비틀어야 하고, 오후께는 땀이 차서 쓰라리다. 그야말로 사는 게 고역이라.
그럼에도 나에게는 이러한 신이 없다!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옛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들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사 64:4).” 능히 건널 수 없는 강 같다. “다시 천 척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겔 47:5).” 측량할 수도 없는 바다 같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9).” 참 신비하고 놀라운 샘물 같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 13:1).” 이 지식은 내가 아는 그 이상이고 넘치고 넘치는 사랑이며 알 수 없는 앎의 것이다.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인정할 수 없고 믿어지지도 않는데 이를 의지하고, 이와 같은 말씀이 귀에 선명하게 들리도록 하시는 것이었으니! 어려울수록 더욱 의지하게 되고,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창 26:22).” 그때마다 나의 걸음을 오히려 더 넓히시며, “주께서 또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내 발이 미끄러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삼하 22:36-37).” 그래서 더 명철을 구하게 되고,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잠 4:5).” 다닐 때 걸음을 지키시었다. “다닐 때에 네 걸음이 곤고하지 아니하겠고 달려갈 때에 실족하지 아니하리라(12).” 곧 오늘의 곤고함이 은혜다. 주를 바라게 한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 33:29).”
그러니 나는 주께만 의뢰함이라.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시 69:2-3).” 이처럼 주께 아뢰고 고할 수 있는 것이 복이고 특혜였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5).” 나를 나보다 잘 아시는 이가, “여호와여 나를 반기시는 때에 내가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13).” 고로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3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