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전봉석 2020. 8. 2. 06:01

 

그 계약은 사람마다 각기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롭게 하고 그의 동족 유다인을 종으로 삼지 못하게 한 것이라

예레미야 34:9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시편 70:5

 

 

하나님은 우리 삶에 깊이 관여하시고 채워지기를 원한다. 아니면 우리는 언제든 악한 심령으로 괴롭힘을 당한다. 스스로 채워지는 만족함은 없다.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요이 1:9).” 곧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 성경은 우리로 그러하기를 구한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3:19).” 결국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을 때 채워지는 하나님의 충만함인데, 이는 분명 나의 지식에 넘치는 것이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18).” 능히 알 수 있게 하시는 이가 채우심인데, 먼저는 선한 것으로 채우신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15:14).” 성경은 이를 확신한다. 그럴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이 아니다. 기대도 아니고, 엄연한 사실로 증거하고 있음을 본다. 그와 같은 믿음이 충만하게 채우신다. 그런 자를 세우심이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6:5-6).”

 

곧 성령이 충만하게 채우신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7:55).” 죽음의 위협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온전한 믿음으로 채우시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10:22).” 인위적으로 내가 어찌 하려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이처럼 일어나 앉아 말씀을 따라가는 일도, 누구로 인하여 마음이 기울어서 주를 바라는 일에서도, 소망의 풍성함으로 채우신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6:11).” 서로를 돌아보며 위하고 그 마음을 기울일 수 있는 것도 그러해서였다. 곧 이는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예수를 보지 못하고도 사랑한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이로써 기쁨이 충만하게 채우신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일 1:3-4).” 그리하여 따라서 선한 행실을 행함으로 가득하여진다.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딤전 5:10).”

 

이를 하나님의 뜻으로 아는 일에 충실한 것으로 채우신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9-12)” 그러려면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5:17-18).” 이처럼 성경의 이끄심을 따라가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1:11).” 오늘 아침 말씀에서도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가 행하여야 하는 일에 대해 묵상하게 된다. “그 계약은 사람마다 각기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롭게 하고 그의 동족 유다인을 종으로 삼지 못하게 한 것이라(34:9).” 누가 말하길 노예제도는 성경시대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그리 사람을 지으신 바 없다. 높고 낮음, 있고 없음의 서열은 사람들에 의해 사람들이 취하여 끌어들인 것이다.

 

오히려 시편의 말씀에서 나는 종종 당황하는 것이 서열의 정점에 있는 다윗의 기도에서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70:5).” 어찌 왕이 가난하고 궁핍함을 호소하는가?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1).” 이와 같은 진술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세상 그 무엇으로 체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어떤 공허함과 궁핍함이 있는 것이다. 권력의 정점은 없고 그 위로 또 다른 권력이 늘 견제한다. “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가 수모를 당하게 하소서(2).” 그러니 주께 호소하는 길밖에. 그 자리가 어떠하든 사람 안의 만족함은 하나님으로밖에는 채울 수가 없는 것이다.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3).” 오늘 말씀을 연관 지어 열한 가지의 채우심을 찾아보았는데, 선한 것(15:14), 믿음(6:5), 성령(7:55), 온전한 믿음(10:22), 소망(6:11), 영광의 즐거움(벧전 1:8), 기쁨(요일 1:4), 선한 행실(딤전 5:10),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1:9), 성령 충만(5:8), 그리고 의의 열매로였다(1:11). 이를 이처럼 꼼꼼하게 메모해두는 까닭은, 같이 오전에 성경을 공부하는 전도사에게 이르는 것처럼, ‘한 주간 내가 무엇을 보고 어떤 책을 읽고 누구와 어떤 대화를 주로 하고 어떤 일에 마음이 빼앗기고 살았느냐하는 문제는 단순히 나 개인의 일의 아니었다. 사역자로 사는 일이란 일거수일투족이 주의 쓰심에 합당한 자로 채워지는 일이었다. 내가 임의로 노력한다고 그리 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허물과 실수까지도 주님은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지만, 분명히 이와 같은 충만함은 인과적인 관계이다. 원인-동기부여가 있을 때 결과로 나타난다.

 

숱하게 메모했다 이처럼 묵상 글로 적어두고 다시 옮겨두어 설교 원고를 작성하고 또는 누구와 통화하거나 저를 위로하여야 할 때 말씀으로 다가갈 수 있는 데 유용하였다. 다른 이는 어떠한지 몰라도 나에게는 그러한 유익이 있었다. 그리고 실제 이를 기다렸다는 듯 필요로 하는 이와 통화하거나 저와 같이 성경 공부가 이루어지게 하신다. 그러니까 다음 일은 내가 의도하는 바가 아니다. 묵묵히 더해지는 사명이었다. 사역자는 이에 무던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그리 알고 있고 그리 말해주었다. 더 좋은 수를 찾아 여러 갈래의 길로 나아가겠으나 그리하여 나의 방식이 처량하고 한심하게 보일지는 알 수 없으나 늘 나의 결론은 주가 이루신다. 주가 이루시게 하여야 한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18-19).” 내가 임의로 어찌하려 할 때 몸은 고되고 마음은 어렵고 일은 꼬이고 서로의 관계는 불편하여진다. 늘 보면 주의 일은 무난하였고 순탄하다. 그 멍에는 무겁지가 않다. 가령 누구 때문에 너무 마음이 쓰이고 힘을 기울여 진이 빠지는 일이라면 열에 아홉은 내가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오고 안 오고, 마음이 기울고 멈추고, 서로 의지가 되고 안 되고 하는 그 모든 게 주의 주도하심 가운데 있었다. 모르겠다. 그러해서 나는 늘 수동적인 자세로 주의 말씀을 기다린다. 능동적으로 내가 무엇을 주도하려 하면 오히려 내 손은 망손이라 십중팔구 망한다. 성경적으로 그렇다는 게 아니라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에서다.

 

어제는 같이 옆을 쓰던 사무실이 나갔다. 주인과 이런저런 절차가 끝났겠으나 아무도 없자 내게 이런저런 푸념을 늘어놓았다. 저도 어디 교회 집사로 알고 있었다. 그간 서로가 너무 소원했으나 굳이 가까워질 것도 없었다. 나름은 더 넓혀 직원들 여럿과 같이 쓸 곳으로 간다는데, 누가 들고 나는 일은 이래저래 번잡스럽고 어려운 일이다. 비가 억수로 퍼부었고 오후에는 집에 있어 늘어져 몸을 다독였다. 이러저러한 일상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향하신 뜻이 계시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15:11).” 그 선하신 뜻을 우리가 미처 다 알지 못할 때에도 주는 선하시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7:18).” 그러므로 우리는 주를 찾고, 주를 찾는 우리로 주가 기뻐하신다. 오늘 아침의 고백이다.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70:4).” 우리로 주께 기뻐함이 주로 우리가 기뻐하는 길이다. 비록 어떠하다 해도 주께 아뢰고 주께 고할 수 있는 게 가장 귀하고 복된 일이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