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유다 가문이 내가 그들에게 내리려 한 모든 재난을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리니 그리하면 내가 그 악과 죄를 용서하리라 하시니라
예레미야 36:3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시편 72:18-19
물론 모두의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개인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개인의 체험을 모두에게 일반화시킬 수 없고 이를 말씀보다 우선해서도 안 된다. 간혹 개인적인 체험이나 남다른 은사를 가진 사람들의 경우 마치 자신을 누구보다 특별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의 뜻을 마치 자신은 다 잘 아는 것처럼 자신의 경험을 남에게 강요하고 이식하려 한다. 하지만 말씀보다 앞서는 그 어떤 경험도 우상일 수밖에 없다. 세례요한은 이를 경계하며 늘 자신을 낮추었다. 바울은 지난날의 기억과 지식을 배설물로 버렸다. 이는 모두 자신을 말씀보다 앞서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 혹은 섭리에 대하여 누구도 단정 지을 수 없고 함부로 속단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8-9).” 하나님의 섭리는 ‘오직 자기의 뜻과 은혜’로 하심이다. 원인도 없고 어떤 과정에 의한 결과로도 아니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해서 새삼 하나님의 뜻이 작동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종종 ‘갇힌다.’ 질병에 갇히고, 가난에 갇히고, 애써 수고하던 일에서 실패에 갇힌다. 그러할 때 이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오히려 이 가운데서 복음을 받으라 한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오는 것이다. 갇힌 것에서 놓여나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쓰라고 성경은 이르지 않는다. 자신이 수고하여 얻은 결과로 나음을 받거나 성공을 이룰 수 있게 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한다. 즉 주신 바 오늘 나의 질병, 이 어려움, 난처함이나 고통과 같은 갇힌 바 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신 부르심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 나의 불안증? 또는 약한 육신? 뭘 해도 안 되는 것 같은 어려움? 부흥하지 않는 교회? 흔히 남들이 보기에 ‘부끄러울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실은 주께서 거기에 부르심이다. 그러면서 성경은 분명히 하셨다.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것이 주의 뜻이요, 섭리다(딤후 1:8-9). 이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주께서 이미 계획하신 일이다.
가령 나의 장애는 부친의 거역으로 생겨난 돌발적인 불행이 아니다. 저를 부르시기 위한 수단으로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나의 부친은 주의 부르심에 따랐고, 훗날 목회를 하며 나의 나 된 것에 대하여 아주 특별한 은사임을 강조하며 키우셨다. 그때는 그 말이 싫었는데 이제는 그 확신이 나를 붙드신다. 곧 나의 질병과 공황, 불안 따위의 어려움이 나로 하여금 더욱 간절하여 주 앞에 서게 한다. 그러므로 나의 복이라. 우리의 아주 특별한 사명이라. 나는 누구에게 이제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한다.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는 거지처럼 살았던 그의 생을 다한 것이 저의 사명이었다. 주께서 모든 비유를 익명으로 하시다 그 가운데 저의 이야기만 이름을 짚어 단 한 번 명시한 까닭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삶’이 저의 생이었다. 그것으로 다다. 거지로 살다 거지로 죽어도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사는 것으로 사명을 다한다. 하나님의 뜻은 원인이 없다. 스스로 결정하심으로 하나님의 목적이 곧 섭리이고 원인이며 결과이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공의로우시다. 우리 신앙의 기본 전제다.
욥은 그래서 자신에게 희망이 없다 해도 주를 신뢰한다고 하였고, 다윗은 주의 인자하심이 자신의 생명보다 낫다고 하였다. 즉 내 뜻이 아니라 주의 뜻을 바라는 까닭은 그의 인자하심이 나의 목숨보다 귀하기 때문이다. 나를 터무니없이 죽이신다 해도 저는 공정하시고 선하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너무 주의 뜻에 관여하려 드는 것 그 자체가 이미 그릇되다. 그 뜻을 알려달라고 억지를 쓰는 것도 불순종의 하나이다. 주술을 외우고 마술을 부리듯 어떤 은사를 구가하고, 그와 같은 인위적인 감정을 개인적인 성령체험으로 여겨 모두에게 적용하려 들면 자칫 이것이 이단이 되고 우상숭상이 된다. 저들만의 하나님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꼴이 된다. 우리의 가치를 우리 스스로 운운하는 것은 완악하다. 우리는 아주 쓸모없고 보잘것없다. 이를 들어 주께서 사용하심으로 귀할 수 있는 것이지, 스스로 자신의 일을 성역이라 하고 성직자로 굴면 이보다 꼴사나운 짓도 없다. 그리 삼으신 주의 영광이지 사람의 영광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면 할수록 자신은 작아지고 초라해서 몸 둘 바를 모른다. 죄인 중에 괴수라. 이와 같은 고백이 공연한 허풍이 아니다. 내 안의 두려움이 주의 사랑을 그릇되게 해석할 수 있는 이유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곧 주를 경외하는 두려움이 있고 자신의 믿음에 대한 불안정으로 오는 두려움도 있는데, 후자의 경우 스스로의 확신을 강요한다. 남을 억압라고 그것으로 자신을 의롭게 여기려는 불안을 내포한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실은 무의식적으로 강해져야 한다는 욕구와 함께 '남다른 은사', 체험 등을 붙들고 이를 방패 삼으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 그리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존 번연은 '나의 모든 사랑에 대해 반대되게 하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자식에 대한 사랑,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 어느 국가에 대한 헌신과 봉사,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줄 수 있을 정도의 사랑… 이 모두를 경계하고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도 그 자체로 선할 수 없고, 스스로 하나님의 선을 이룰 수 없다. 어떠한 선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곧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내 자신을 지켜야 하는 이유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1:21).” 때로는 질병에 갇혀 또는 가난과 실패에 갇혀 그러할 수밖에 없겠으나 이 모두로 주의 사랑을 삼을 수 있는 게 복이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함부로 누구의 안타까움에 대해 비판하거나 질타할 수 없고, 이를 나음 받기 위해 어떤 대안을 제시하거나 자신의 체험을 은사처럼 내세울 수 없다.
모세는 갇힌 반 된 것이 40년이었고 바울은 사흘 동안 눈이 멀었다. 어쩌면 평생을 갇힌 자로 살아야 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으로도 우리는 주의 뜻을 바라고 구할 수 있다. 돌이킴을 위하여 또는 다른 누구를 위하여 하나님이 어찌 어떻게 사용하실지 그 뜻과 섭리를 우리는 알 수 없다. “유다 가문이 내가 그들에게 내리려 한 모든 재난을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리니 그리하면 내가 그 악과 죄를 용서하리라 하시니라(렘 36:3).” 다만 우리는 기록할 뿐이다. “이에 예레미야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부르매 바룩이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하니라(4).” 이처럼 우리는 누군가에게 읽혀지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누구도 남의 이야기가 없고 나의 이야기 어느 것도 허투루 쓰이지 않는다. 우리 믿는 자에게는 모든 이야기가 주의 이야기다. 남의 이야기란 없다. 그 안에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을 더하신다. 읽혀지고 읽어져야 한다. 곧이곧대로 주의 살아계심을 신뢰하는 일이다. 어떠하든 저는 선하시며 오늘 내게 행하시는 이 모든 일, 기록은 먼저는 나 자신에게 읽혀져야 하고 나아가 내 곁의, 주변의 모든 이에게 들려지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누구와의 통화에서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설명하는 데 있어, 나의 질병이 또는 가난이 부끄러운 게 되지 않기를 바랐다. 하나님의 뜻은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우리로 그 자리에 부르심이다. 여기 오늘, 나의 질병으로의 부르심이다. 고통이 내게 말하게 해야 한다. 그러할 때 성령이 내 안에 두루 퍼짐을 느낄 수 있다. 환난은 그렇게 기묘하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3-6).” 엄연한 사실 하나는 그럴 가치도 없는 나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이다. 죽으면서까지 나를 살리신 뜻이다. 이에 이 지식은 값지다. “곧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을 즐겁게 할 것이요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 악한 자의 길과 패역을 말하는 자에게서 건져 내리라(잠 2:10-12).” 왜 이를 지켜야 하고 간직해야 하고 근신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은 홀로 기인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다.
저는 선하시고 인자하시며 자비로우시고 긍휼하시기를 무궁하시다. 이에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시 72:18-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