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이스마엘이 또 미스바에서 그다랴와 함께 있던 모든 유다 사람과 거기에 있는 갈대아 군사를 죽였더라
예레미야 41:3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시편 77:1
아무런 제지 없이 악이 자행된다. 막무가내고 속수무책이다. 왕의 종친 이스마엘은 다윗 가문의 사람이나 하나님의 회복을 훼방하듯 닥치는 대로 죽이고(2-3), 무너진 예루살렘 터에 예배드리러 온 80여 명의 순례자를 무참히 살해한다(4-7). 남겨진 백성을 끌고 암몬으로 간다(10). 아무 이유 없다. 군 지휘관으로 있던 요하난도 제지하지 못했다. 일찍이 그다랴가 이스마엘의 만행 계획을 알렸다(40:13-15). 그러한 경고에 안이하게 대처하는 동안 악한 만행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자행되고 들풀처럼 번져 쓸고 지나간다. 이처럼 우리의 혼란은 하나님의 손길, 간섭과 관여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때이다. 본문의 말씀을 읽으며 뭐가 뭔 소린지, 왜 저런 짓을 하는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스마엘의 악행에 혀를 내두르다 어제를 생각하였다. 친구는 각각 네 시간씩 왕복 여덟 시간이 걸려 인천을 다녀갔다. 저와 만나 간단하게 점심을 먹은 시간까지 포함해서 여덟 시간을 대화했다. 10여 년 만의 만남이었다. 저의 그간 근황을 듣는데, 그 이야기가 너무 복잡하고 맥락이 어려워서 나는 메모를 하며 들어야 했다. 하나의 이야기는 그렇게 여러 개의 다른 이야기와 엉기고 얽혔다. 더해지는 사연마다 구구하였고 엉킨 실타래 같은 이야기는 복잡하였다. 저녁 7시에 헤어지기 전에 나는 친구를 위해 기도하였다. 친구의 가슴저린 눈물이 마음 아팠다. 돌아오자 기진하여 나는 쓰러져 잠이 들었다.
<회개>의 히브리어 어원은 ‘깊이 숨을 들이 마시고 한 숨을 내쉬다.’이다. 슬픔과 회환을 느끼는 것이다. 이는 불편함인데 신음과 한숨이 섞인 깊은 숨이다. 이어서 ‘돌아보다, 뒤돌아서가다.’는 동사를 같이 내포한다. 느낌으로만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로부터 되돌리실 때, 그간의 죄로 회한에 젖어 통회하는 마음은 깊은 숨을 몰아쉬지만 거역하고자 하는 ‘동물적인 고집’도 으르렁거리듯 숨을 헐떡이게 되어 있다. 이 둘은 충돌하여 서로의 숨을 완전히 끊어놓든지 아니면 조금 숨통을 틔우는데, 그것은 변형된 형태의 ‘자아 찾기’ 내지는 ‘의미부여’라 이름붙이면 좋을 듯하다. 대놓고 말해 이를 교묘하게 악용하는 게 자신을 종교화시키는 것이다! ‘신유은사나 성령의 역사’를 내세워 사람의 악함과 약함을 뒤섞어버리는 무리가 있다. 이들의 특징은 지극히 종교적이다. 종교심을 부추겨 몇 시간씩 기도하게 하고 그 어떤 열심보다 더해서 다른 각도의 하나님을 우상화시킨다. 곧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하나님’으로 복음의 진리를 호도하는 것이다. 가시적인 충족을 위해 안수나 안찰, 예언이나 과거를 들추어 맞추는 매파짓도 서슴지 않는다. 것처럼 보다 자극적으로 ‘어떤 영매’를 두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도 한다. 순간 마음은 뜨겁고 몸의 열이 올라 긴가민가하던 것이 순간 선명해지는 것도 같다. 그동안 자신이 살아왔던 인생을 부정하게 되고 이를 회개라 여긴다. 그야말로 신천지가 열리는 듯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경험을 한다. 이러한 체험의 특징은 사람을 더 완고하게 하여 맹목적으로 그러한 행위? 의식? 종교적인 경건에 동참하게 한다. 숨은 자신의 고약한 자아와 종교화된 이상향의 자아가 하나로 묶여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회개? 체험은 지극히 혼란스럽고 두려운 일이다. 한 사람이 앞서고 뒤를 따라가면 영락없이 인위적인 적극성을 띈다. 저가 곧 교주 같은 존재, 하나님이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그처럼 인위적이지 않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이는 우리가 나설 수 없는 역사다. 성령의 역사나 신유의 은사나 어떤 '특별한 주동자'에 의해 일이 발행하는 것이 아니다. 병약하고 절박한 사람들이 그 사람의 소문을 듣고 그 교회로 단체로 모여든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 사람이 사람의 필요와 허기를 달래기 위한 조작은 모두 악하다. 이를 막을 방법이 없다. 이단에 빠지거나 어떤 신비적인 은사에 맛을 들이면 헤어나기 어려운 까닭도 (그런 게 아니고, 자신들은 다르고, 심지어 자신을 내려놓았다고 주장하지만) 전의 자신과 새로운 형태(신비적인 은사체험)의 자신은 보태어지면서 더욱 완고한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6-7).” 이는 엄연히 사람이 사람에 의해 사람의 필요로 가져오고 끌어내고 뒤집어엎는 것이 아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8).” 성령은 때로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언제 그러했는지 모르게, 우리를 주의 은혜로 물들게 한다. 열광하듯 기도하고 아우성치며 정기적으로 모이고 기를 써서 얻어내어 주를 부르고 찾아야 하는 과정이 아니다. 엄연히 지금은 성경의 시대다.
그런데 신비를 찾고 경건을 도모하면 사탄은 덩달아 세를 확장한다.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 12:45).” 어떤 이유와 목적에 의해 하나님을 찾고 갈급하여 저를 체험하려 한다는 일은 이처럼 위험하다. 그래서 만났다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대부분이 동일하다. 가령 병 고침을 받은 체험을 한 사람은 이제 진리와 말씀과는 무관하게 그 목적이 바뀌었다. 신봉하는 것으로 자신의 중재자? 영매자? 지도자? 특별 사역의 목사? 또는 사상 따위를 맹신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나름의 논리를 갖고 더욱 단단히 무장하게 되어 저는 자신이 아는 것과 경험한 것을 불도저처럼 확신한다. 그러면서도 전에 보다 더 고단한 생에 이끌린다. 기도는 무슨 주술처럼 의무적이고 성경을 듣는 일과 보는 일은 ‘종교 행위’의 하나가 되었다. 몸은 으깨져도 기도시간은 엄수하고, 살고자 기도한다! 죽겠으니까 말씀을 따른다. 몸이 감당이 안 되는 것을 마음이 요구하고, 마음을 주체할 수 없으면서도 몸을 이끈다. 이를 가까운 자식에게 강요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포교한다. 마치 노역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처럼 헤어날 길이 없다. 사는 게 고단하고 사랑이 일이 되었다. 그러면서는 ‘돌아온 탕자’의 형처럼 아버지의 잔치에서 늘 자신은 소외되는 느낌이다. 백날 수고해도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 같다.
이렇듯 자신이 자신을 심판하는 셈이다.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사 나와 더불어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 보옵소서.” 자기 안에 억울함으로 가득하다. “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마는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팠나이다 내가 주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려 하고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유익한 말을 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렘 18:20).” 말씀 앞에 자신을 놓아둘 겨를이 없다. 은사와 은혜는 무거운 철갑옷처럼 힘에 겹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신다.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사 51:4).” 사람의 이해를 돕거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이 동원되면 여지없다. 여기에 맹목적인 허기가 더해지면 스스로도 ‘무당과 다를 바 없는’ 그런 짓거리에 하나님의 일을 운운하며 괜찮다고 여긴다. 그건 아니라고 우긴다. 귀신들의 문양대신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귀신들린 저들의 점괘대신 통성기도로 흥분하고, 느껴지는 희열과 느낌, 실제의 고침과 변화?를 혼용하여, ‘혼재된 경험-체험’은 어느새 뜨거운 신앙으로 둔갑한다! 아, “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렘 31:19).” 정작 돌이키기 전보다 돌이킨 후의 사정이 더 교착상태가 되었다. 혹시 소망이 있을까 해서 자기 입술을 재에 대기도 한다.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애 3:28-29).”
나는 마음이 어렵고 속상하였따. 말씀으로 말씀으로 말씀으로만 이끌려고 하였다. 주일에 한 번, 설교 듣는 것으로 성경 보고 묵상하는 일이 전부인 저에게 말씀으로의 길은 묘연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자신은 늘 가까이에 성경이 있다고 여긴다. 그렇듯 누구 설교 잘하는 목사들의 설교나 동영상으로 족하게 여기기도 한다. 정작 내밀한 관계의 묵상과 하나님과의 사랑은 체험할 길이 없다. 실제 긍휼이란 단어의 어원은 '하나님의 자궁'이란 뜻이다. 모태에서의 자궁을 연상하게 되나 아가서의 내밀한 사랑의 자리처럼 성숙한 사랑의 관계에서의 자궁을 맛보아야 한다. 우리 성도는 저의 신방에 들어야 한다. 그저 이해와 머리로 듣고 아는 것으로는, 이를 교묘하게 부추겨 사탄이 곁을 떠나지 않는 방식이다. 진정한 사랑의 성교와 쾌락의 성교를 같은 것처럼 바꿔치기한다. 그래서 성령 체험은 자칫 마약과 같다. 신유은사는 아주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지 구약시대처럼 성경이 없던 때의 우여곡절을 마치 사람의 필요에 의해 신을 부르는 밀교적인 것이 아니다. 숨기고 은밀한 은사는 사탄의 장기다. 그저 안타까워하거나 변론을 위한 논박은 부질없다.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은 정치나 종교가 미친 사람과 다를 게 없이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의 아룀은,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통회와 자복일 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그러므로 문자로 똑똑히 이성의 시대에 주어진 성경을 또박또박 읽고, 자신의 입을 열어 또박또박 발음하여 아뢰면 된다! 인위적으로 뭘 자꾸 방언을 하고 환상을 보고 어떤 환홀경을 못 잊어하는 것인지!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시 77: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