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궁핍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
예레미야 44:18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편 80:7
성경은 우리에게 근신을 지키라 한다. 근신은 세상과 떨어뜨려 자신에게 경계를 두고 이를 지키는 것이다.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잠 5:2).” 그런 의미로 울타리를 두르고 벽을 세운다. 세상은 넓은데 자신의 운신이 그만큼 폭이 좁아지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으로 자신을 지킨다. 오늘 시편의 한 대목을 다시 보면,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시 80:12-13).” 이는 오늘 예레미야서의 정황을 이해하는데 단서를 더한다. 유다는 바벨론의 고통과 핍박을 피하여 애굽에 의존하였다. 저들 우상을 숭배하니까 살만하였고 훨씬 나아진 것 같았다. 그러다 예레미야의 지적으로 우상을 버리니까 오히려 더 큰 곤란이 찾아오는 듯하다. 그래서 절규한다.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궁핍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렘 44:18).” 그러느니 그대로 우상을 섬기며 사는 게 나은 듯도 하다. 예레미야는 이를 반박하는 것이다.
“너희가 너희 선조와 너희 왕들과 고관들과 유다 땅 백성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분향한 일을 여호와께서 기억하셨고 그의 마음에 떠오른 것이 아닌가? 여호와께서 너희 악행과 가증한 행위를 더 참을 수 없으셨으므로 너희 땅이 오늘과 같이 황폐하며 놀램과 저줏거리가 되어 주민이 없게 되었나니 너희가 분향하여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며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율법과 법규와 여러 증거대로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재난이 오늘과 같이 너희에게 일어났느니라(21-23).” 표면적으로는 우상숭배를 멈추니까 더 큰 괴로움이 찾아온 것 같다. 결국 믿음의 싸움이 필연이다. 시련과 고난에 무릎을 꿇고 이를 해결하는 데 급급할 것인가? 아니면 그러해도 주를 신뢰하며 묵묵히 지킬 것을 온전히 지킬 것인가? 담을 헐고 살 것인가? 근신을 지킬 것인가? 앞서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기리니 그도 너희를 불쌍히 여겨 너희를 너희 본향으로 돌려보내리라 하셨느니라(42:12).” 주의 긍휼하심과 은총이 함께 하지 않으면 모든 잘됨도 허사요, 나음도 허사요, 출세와 성공도 허사요, 보다 나은 삶의 질도 허사다. 허사란 소용없는 일이다! 애써 붙들었으나 안개라. 허공이라. 나중에 보면 쥔 게 없다.
우리의 절박함이 우상을 끌어들인다. 문제 해결만이 관심이면 사탄은 득세한다. 가장 빠르고 실질적으로 도와준다. 남방 여인을 붙이고 애굽의 도움을 꾀한다. 모든 게 호의적이며 우호적인 것 같다. 하루는 애굽에서 나온 지 일 년쯤 되었을 때 백성들이 또 극성이라, 모세가 절규하듯 저들을 붙든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신 1:31-32).” 문제는 우리의 만족할 수 없음이다. 고작 노예로 살았던 애굽에서의 삶이 좋았으면 뭘 얼마나 좋았겠나? 그저 종노릇하던 때를 돌아보며 쩍하면 그리워하고 그때를 회상한다. 그러다 오늘의 처지와 비교하며 원망이 인다. 모세는 일깨우기를 일 년여 광야 길을 하나님은 마치 ‘자기의 아들을 안은 것 같이’ 우리의 ‘걸어온 길에서’ 우리를 안아서 ‘이곳까지 이르게’ 하지 않으셨던가? 그럼에서 ‘이 일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믿음은 지켜야 하는 근신과 같다. 둘러쳐야 하는 성벽과 같다. 허물어버리면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일련의 친구 이야기 또는 누구의 경우에도 문제가 문제였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념하면서 이게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을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와서는 그럼에도 그게 아닌데, 하는 것을 듣고 깨달아 알면서도, 우상숭배를 멈추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하는 것에 전전긍긍하여 물리칠 수가 없다.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다시 모세의 설교를 들으면 첫째, 하나님이 싸우셨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신 1:30).” 여전히, 이제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다! 둘째, 자식처럼 우리를 안아서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31).” 이곳까지 온 게 어쩌다 우연은 아니다. 셋째, 여전히 저는 우리의 갈 길이 되신다!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33).” 때론 답답할 테지! 언제 멈출지 또는 떠나야 할지, 그 여정은 또 장막을 쳤다 걷었다 하는 고달픈 현실로 이어지는 터라 고단하기 이를 데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 여든 한 살의 노구를 이끌고 육십만 그 이상의 군중을 이끌고 앞서야 했던 모세의 광야 일 년은 뭐 그리 좀 나아서 그런 소릴 하고 있겠나. 서른아홉 해가 지나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두고 모세가 목숨을 다하면서도 이같이 저들을 꾸짖는다.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32:6).”
저가 강하게 붙든 것은 하나님 한 분이셨다. 잘 따라주는 백성들도 또는 자신 안의 투철한 사명의식도 아닌, 누구보다 처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었던 저의 믿음이다. 자신을 지으신 이를 저는 바로 알고 붙들었다. 사십여 년 간 저는 자신의 그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체험하고 그의 처소로 삼았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33:27).” 이래저래 마음이 어렵고 속상하고 답답한 하루하루다. 누구는 생각이 너무 많다고 하고, 누구는 쓸데없는데 자꾸 마음을 써서 그렇다고도 한다. 나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속앓이를 주의 말씀으로 위로로 삼는다. 누구와 대화하다 또는 어떤 이의 사연과 그 구구한 인생살이를 보며 그것이 내게 주시는 교훈이라! 누구보다 열심이고 잘 믿고 승승장구 복에 복을 받는 것처럼 살지만 저가 믿는 하나님은 우상이라. 온갖 잡신을 버무려놓은 듯 혼재 된 것이다. 그러니 주변을 같이 하는 이들이 어떤 신을 섬기든지, 그가 어떤 방식으로 돈을 벌고 학벌을 더하고 권세를 누리는지, 저는 저들의 면면을 세밀하게 살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두루두루 잘 사는 게 복이라. 안 아프고 돈 잘 벌고 하는 일이 척척 잘 풀리면 만사형통이다. 미신적으로 하나님을 혼합하여 절간에고 성당에고 때로는 함께 어울리며 화합하여 평화로운 지상낙원으로 족한듯하다. 모세는 이를 엄금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다른 것은 모두 허사다.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저가 나를 안아 품에 두신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맞서 싸워야 하는데, 애굽과 화친하여 저들의 신과도 두루 잘 지내는데 굳이 그럴 이유를 모르겠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지 않으시면, 저는 다만 친절한 동네 아저씨, 남, 이웃 정도로 족한 것이면… 어느 훗날 더 큰 끔찍한 사실 앞에서 어쩔 것인가? 누가 말하길 ‘인생은 산책인 줄 알았는데 아무런 준비가 안 된 마라톤 같았고, 그저 운동경기인 줄 알았는데 죽고 사는 전쟁터였다.’ 광야는 우리에게 이를 일깨운다. 척박한 인생은 하나님으로만 필요한 살이다. 다른 무엇은 신기루일 따름이다. 운 좋게 만난 오아시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영원하신 아버지, 우리의 영원한 처소를 깨닫게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오늘 우리는 성경의 시대를 산다. 예수를 나의 형으로, 친구로 주셨다. 성령이 함께 하신다. 말씀이 지척인데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까닭은 잘 사는 사람 열에 아홉은 하나님이 없거나 저들의 하나님을 섬길 따름이고, 성공하고 출세하는 사람 열에 아홉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모두가 평화롭기만 하다. 그러나 우리의 신분은 특정되었으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한 마디로 안 그래도 된다! 다시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다!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인데도 여전히 종노릇하던 고질적인 습성이 몸에 밴 탓에 점괘를 만지작거리고 누가 어디서 잘 되고 성공했다고 하면 그곳으로 쏠린다.
예수님은 곧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다(요 17장). 그 기도 가운데 서른아홉 번이나 아버지, 아버지를 부른다.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도 다를 게 없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의 신앙고백도 다르지 않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 곧 우리의 신분과 삶은 특정된 것이다. 고로 오늘 시인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한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80:7).” 때로는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5).” 하지만 이는 괴롭히기 위하심이 아니고 돌이켜 주를 온전히 바라게 하심이다. 그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7).” 주께서 오늘 여기에 우리를 심으셨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8).” 그런데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12).” 이는 우리의 존재의 의미를 바로 알게 하심이다.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15).” 결국 오늘 우리는 주의 것이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