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전봉석 2020. 8. 13. 06:03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45:5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시편 82:8

 

 

사람들의 환심과 지지를 받는 거짓 목회자들이 어느 시대에나 득세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는, 당시에도 예레미야를 적대시하였다. 그런 가운데 곁에서 돕는 바룩이 있었다. 일찍이 저는 동역자로서 괴로워하였다. “네가 일찍이 말하기를 화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45:3).” 이러한 바룩을 하나님은 오늘 위로하신다. 저는 예레미야가 갇혔을 때에 말씀을 기록하는 일을 도왔다(36:1-5). 그 기록을 성전에 가져가 선포하기도 하였다(6-8). 이를 듣고 여호야김 5년에 왕은 예루살렘에 금식을 선포하기도 하였다(9-10). 그러나 그 내용을 뜯어보던 왕은 하나님의 계시를 불태운 뒤, 바룩을 체포하고 예레미야를 끌고 왔다(20-26). 바룩의 탄식은 그로 인해 비롯되었고, 하나님의 위로는 저에게 전하여진다. 오늘 본문은 바룩에게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45:5).” 하신다. 저에게 큰일은 민족의 회개다. 주의 백성들이 돌이키는 것이겠으나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불러 유다민족의 죄악 됨을 알리신다. 그리고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릴 때에 저의 생명은 보존될 것을 말씀하신다.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4-5).”

 

말씀을 되뇌며 이와 같은 역사가 여전한 것에 놀란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다를 바 없다. 주를 모르고 외면하며 살면 모를까, 안다고 하고 믿는다고 하면서 심지어는 말씀을 전하는 자로 사는 일에 전념하지 못하는, 정치화된 종교화된 목사를 보면 두렵다. 저가 몰고 다니는 군중이나 쥐고 있는 세력이 두려운 게 아니라, 저의 말과 신념이 너무도 당당하여서 말이다. 인기 영합주의로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저들의 마음을 빼앗는 목회는, 저가 어떠하든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8.15 광복절을 앞두고 특히 보수연합의 교회와 목사가 나서서 정치쟁점에 휘말리는 것에 우려가 크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4).” 어쨌든 선한 의도에서라 해도,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5).” 어쩌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큰 일, 선한 일을 찾고 바라고 구하는 것은 아닐까? 나름의 보람과 가시적인 성과와 어떤 결실을 두고 자화자찬에 겨워하는 주의 일이란 없다.

 

나는 요즘 같은 주의 일을 하는 젊은 동역자와 하루건너 한 한 번씩 아침마다 성경을 나누면서 주의 하시는 일을 본다. 전에부터 저를 두고 기도 제목 중이었던 목사고시를 다시 결심한데에 응원하였다. 모르겠다, 내가 아는 한 결코 쉬운 결심도 결의도 아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한다고 해서 모두 갈 수 있는 길도 아니고, 가다가 아니 간만 못한 결과로 배회하는 이들도 여럿 보았다. 나만 해도 무난하지 않았고 가다 돌아서고, 돌아서면 끌려오기를 몇 번씩이나 되풀이 했는지도 모른다. 다 끝내고(?) 그야말로 ‘목사고시만 앞두고 있으면서도 그 내적갈등은 피 말리는 일이었다. 나는 이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지경에까지 끌려왔고 두 번씩 낙방을 하며, 그것도 한 번은 논술에서 한 번은 인성겸사에서 떨어져 마음을 새삼 다지게도 하셨다. 그때 면접관으로 두 번씩이나 마주 앉았던 원로 목사는 딱한 마음에 위로를 하였는데,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또 떨어지면 또 오면 된다. 내게는 이제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그때도 그렇게 대답하였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만의 사막은 시작되었고, 사막은 하나님 외에 달리 의지할 게 전혀 없는 전무한 지점다. 그러니 저들이 염려해주고 위로하며 혹시나 하고 그렇게 크게 실망하거나 낙심할 것도 없었다. 되레 사막은 아주 예민하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손길만을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유일한 장소요 시간이었다. 가령 그때, 두 번쨰 목사고시를 떨어지고 있을 때 위암말기로 서른 중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던 친구 동생을 위로하고, 말씀을 찾아갈 수밖에 없던 '그녀와의 50일간의 여정'은 나에게는 참으로 값지고 고귀한 은혜였다. 마지막 그녀의 임종을 지키며 찬송과 예배로 인도할 때, 모두들 섬기는 교회들이 있었고 각 교회의 담임 목사들이 달려오고 있던 찰나였는데 그렇게 나를 세우셔서 그 영광의 순간을 채우게 하셨다. 지금도 가끔씩 내가 누구인지 까먹고 있을 때면 그때의 사막은 나를 불러 세운다!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5).” 하시는 오늘 본문의 말씀은 내게 그런 의미로 다가온다. 마치 목회를 자신의 어떤 보람과 이상을 얻고자 하여 한다면, 갈 수 없는 길이겠으나 간다 한들 바른 길로 가기에는 묘연하다.

 

나는 아침에, 저의 마음을 다시 잡으신 이가 저의 결심을 돋우시며 그렇게 하시고자 이 미천한 사람을 또, 그, 자리를 채우게 하셨다는 것을 느끼며 고마우면서도 두려웠다. 이내 우리가 가는 길은 주께서 아신다. 심지어 우리 스스로 관여할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다만 의탁뿐이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 이 길은 사막 위에 있다. 길이 없는 길이다. 사막은 그렇듯 역설적이게도 나에게는 천국의 삶을 연상하게 한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삶. 다른 것은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삶.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62:2).” 나는 저의 미루고 있던 결심을 붙드시고 한 걸음,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하심을 축복하고 응원하였다. 한편으로는 안쓰럽고 두렵고 어떤 염려와 근심이 앞서기도 하였지만,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6).” 오직 주만을 의뢰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는 게 척박한 듯하나 하나님의 돌보심 하나로 모든 게 꽉 채워지는 삶이란! 나는 송구해하면서도 그리 확신하였다. 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라 할 말도 없는 사람이겠으나 나는 그리 격려하였다. 주가 함께 하심이 가장 큰 풍요로움이고 충만함이고 넘치는 은혜이다.

 

그러는 중에 아이가 일찍 왔다. 아이도 놀라고 전도사도 놀랐다. 저가 돌아가고 아이는 여느 때와 같이 일기를 쓰고 성경을 옮겨 적었다. 긴 장마 기간이었다. 비를 핑계로 나 또한 아이를 피하고 있었던 것 같다. 갈 데 없이 배회하고, 사람들 흉내를 내며 뭔가 해보려는 아이의 마음에 절실한 것은 하나님이라. 나는 종종 이를 일깨운다. 우리는 모두 집을 나간 아들이면서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아들이기고 하다(15, 탕자 이야기). 나간 이는 남은 이를 경멸하고, 남은 이는 나간 이를 멸시한다. 나간 이는 대책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고 남은 이는 외골수로 같이 지루하게 여겨진다. 둘은 전혀 다른 것 같으나 실은 하나다. 나간 이는 돌아와야 하고 남은 이도 들어가야 한다. 남았다고 하나 밖이었고, 저의 밖은 나간 적이 없으나 들어간 적이 없는 것과 같다. 나간 이는 방탕하고 남은 이는 신중하지만 서로의 경멸과 멸시는 모두 자신을 두고 이르는 소리라, 실은 하나다. 다를 바 없이 우리는 모두 아버지의 마음 밖에서 아버지를 바로 알지 못한다! 그러는 중에 비난과 비판이 일어난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15:30).” 남은 이는 나간 이를 비난하는 것이나 저를 다시 받아들이는 아버지를 비난하는 것이다. 나갔다 온 이는 아무 곳에도 남겨진 이에 대한 사죄나 용서가 없다. 그저 다들 자기 연민에 빠졌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29).” 그저 일이 일로 여겨질 때 셈을 바라는 마음은 중심일 수밖에 없다. ‘내가 어떻게 했는데하는.

 

그러는 내 안의 중심에 오늘 말씀은 일침을 가하시는 듯하다.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45:5).” 이어서 바로 보면 오늘 시편의 말씀이 그 다음 말씀으로 이어져도 무방할 것 같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82:1).” 내 안에 얼마나 자주 판단과 비난이 일어나고 멸시와 경멸이 사로잡고는 하는지!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셀라)(2).” 사람들이 몰려다니는 안개라. 이를 휘휘 저으며 마치 신선놀음하듯 선동하고 구호를 외쳐대는 역할이 아니다.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5).”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고 정작 무엇을 의지하고 붙들어야 하는지, 사막은 우리를 일깨워서 우리 가는 길을 바로 세운다. 고독과 연민은 모두 교만한 것이라. 아버지는 나를 붙들고 손을 이끄신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15:31-32).” 오로지 말씀만을 붙들고 말씀으로 의뢰하며 말씀에서 말씀을 찾기를, 나는 저에게 당부하던 말을 나에게 재차 다짐하였다.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8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