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와 함께 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종 야곱아 내가 너와 함께 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흩었던 그 나라들은 다 멸할지라도 너는 사라지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를 법도대로 징계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레미야 46:28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무릇 주의 원수들이 떠들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었나이다
시편 83:1-2
유다를 가운데 두고 애굽과 앗수르의 공격이 빈번하였고 그럴 때마다 고육지책으로 저들과의 화해를 모색하느라 빌붙기도 하고 피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강한 줄 알았던 애굽은 이내 바벨론의 공격당하고, 앗수르는 1400여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저들에 의해 멸망하였다. 때로는 주의 자녀로 살면서도 볼품없고 쓸모없이 당하나 이내 오늘의 말씀처럼 주가 다시 찾으심을 되새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종 야곱아 내가 너와 함께 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흩었던 그 나라들은 다 멸할지라도 너는 사라지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를 법도대로 징계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렘 46:28).” 끝장난 것 같고 더는 희망이 없다고 여길 때 하나님은 이를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 오전에 오는 아이와 같이 이사야를 읽었다. 전날에 읽은 61장과 다음에 이은 62장의 말씀은 고스란히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었다. 문득 느낄 때면 말씀이 나를 붙드시고 이끄시고 함께 하시는 게 귀하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는 이사야의 증거가 내 것이라(사 61:1).
내가 이를 알고 내게 향하는 말씀으로 듣고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아이에게도 말해주고 싶었다.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2-3).” 오늘 나를 여기에 두시는 이유였고 나로 하여금 주만 바라게 하시는 목적이었다. 그러할 때에 하나님은 쉬지 않으신다.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62:1).” 이로써 우리를 주의 손의 아름다운 왕관이 되게 하실 것이다.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3).” 그러므로 쉬지 말라는 것,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6).” 이는 곧 하나님으로 쉬시지 못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7).”
이처럼 내가 말씀 앞에 앉을 때, 주를 바라며 누구와 같이 또는 저를 위하여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4).” 저가 나를 취하여 기뻐하신다.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5).” 그럴 때마다 내 안의 열등감이나 자격지심을 건드려 사탄은 쓸모없고 부끄러운 나를 공격한다. 가령 아이의 어쩔 수 없음 앞에서 좌절하다 더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로 인해 좌절할 때, 또는 누가 뭐라 하지도 않는데 지레 위축되고 눈치를 보며 기가 죽을 때, 하나님은 그렇게 나를 공격하는 사탄을 그냥 두지 않으신다. 사탄은 나의 쓸모없음을 들추지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말씀하시고,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슥 3:2-3).” 주께서 나의 더러운 옷을 제거하시고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히신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4).” 그러할 때 우리의 영은 깨끗하다.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5).” 아이는 성경을 옮겨 쓰고, 나는 저의 저 의미 없는 작업을 회의하다 이내 주가 역사하심을 말씀으로 일깨우심을 알게 된다. 말씀 하나하나가 곧 나를 향하신 것이라.
하나님은 꾸짖으시되 나의 영혼의 약함을 아시고 주 앞에 넘어지지 않게 하신다. “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끊임없이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지은 그의 영과 혼이 내 앞에서 피곤할까 함이라(사 57:16).” 이는 주의 마음이시라! “그의 탐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고 노하였으나 그가 아직도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걸어가도다. 내가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17-18).” 마치 부모의 마음처럼 징벌을 받아야 할 때도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그 고난의 정도를 적당히 하신다. “주께서 그 백성을 치셨던들 그 백성을 친 자들을 치심과 같았겠으며 백성이 죽임을 당하였던들 백성을 죽인 자가 죽임을 당함과 같았겠느냐(27:7).” 곧 “주께서 백성을 적당하게 견책하사 쫓아내실 때에 동풍 부는 날에 폭풍으로 그들을 옮기셨느니라(8).” 누구도 저의 공의하심 앞에 당당히 설 자 없음을 주도 잘 아신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시 130:3-4).” 다만 긍휼을 더하실 따름이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 11:9).” 다시금 느끼고 또 깨닫게 되는 것은 주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이 아니고는 단 한 시도 살 수 없는, ‘그슬린 나무’ 같이 ‘더러워진 옷’ 같이 쓸모없어 버려져야 마땅한 것이다. 아이는 다시 오면서 생활의 안정을 찾았고 카페를 배회하던 것에서도 놓여났다. 오기 싫어하면 모를까, 그 안에 두시는 사모함이 실로 희한하였다.
주의 인내하심이 아니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4).” 누구보다 나아서 내게 이러한 사명을 더하신 게 아니다. 무엇을 얻고자 어떤 성과를 바라시는 것도 아니다. 아이를 보다보면 그런 생각이 저절로 난다. 누구와 성경공부를 하다 또는 누구를 전화로 권면하다보면,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내가 주를 아는 것이다. 주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을 깨닫는 것이 나의 보배요, 귀한 사역이었다. 가시적인 어떤 성과나 나의 필요나 목적에 따른 어떤 의로움이 아니었다.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어디에도 쓸모가 없는 ‘그슬린 나무’ 같은 존재라는 것은 사탄은 끊임없이 강조하고 들추어서 공격하지만 주께서는 오히려 나의 보잘것없음을 들어 자랑하게 하신다. 어쩔 수 없는, 육신의 연약함으로 돌리신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그야말로 내가 나 된 것을 바로 알 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슥 3:2).” 오직 주만 의지할 따름이라.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유 1:23).”
긍휼히 여길 때 긍휼히 여기심을 받는다는 원리를 알 것 같았다. 자식에 대해서도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마음 쓰느라 진 뺄 게 아니었다. 주께 맡기고 나는 다만 내게 두시는 사명을 묵묵히 준행할 따름이다. 너무 애쓸 거 없다. 잘하려고 잘할 것도 아니다. 무던히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할 것을 순종하는 것이 복이었다. 아브라함도 자신을 ‘티끌 같은 나’라고 표현하였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창 18:27).” 그 모양 그 꼴이나 주께서 버리지 않으시고 깨끗이 하심은 오직 주의 긍휼하심이라. 오늘 시편의 말씀은 그러한 하나님을 의지하며 당당히 오늘에 맞선다.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무릇 주의 원수들이 떠들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었나이다(시 83:1-2).” 아무리 “그들이 주의 백성을 치려 하여 간계를 꾀하며 주께서 숨기신 자를 치려고 서로 의논하여(3).” 나를 고꾸라뜨리려 해도, 심지어는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목장을 우리의 소유로 취하자 하였나이다(12).” 우리는 이내 잘 안다. “나의 하나님이여 그들이 굴러가는 검불 같게 하시며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 같게 하소서(13).” 하나님이 다루실 것이다. 나의 ‘그슬린 나무’ 같은 쓸모없음도, 내 곁에 두시고 저를 위해 기도하게 하심도, 이내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로다.’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18).” 그리하여 오늘 말씀은 다시금 나를 붙드신다. “내가 너와 함께 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렘 46: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