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어찌하여 찬송의 성읍, 나의 즐거운 성읍이 버린 것이 되었느냐
예리미야 49:25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시편 86:17
다메섹은 아람의 수도로 한때는 하나님을 찬송하던 거룩한 성읍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의 낙타들은 노략물이 되겠고 그들의 많은 가축은 탈취를 당할 것이라 내가 그 살쩍을 깎는 자들을 사면에 흩고 그 재난을 여러 곳에서 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49:32).” 재앙은 두렵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일어나 고요하고도 평안히 사는 백성 곧 성문이나 문빗장이 없이 홀로 사는 국민을 치라(31).” 게달과 하솔을 통해 심판의 엄중함을 본다. 엘람은 전쟁물자가 풍요로웠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엘람의 힘의 으뜸가는 활을 꺾을 것이요(35).” 한때는 풍요롭고 번영하여 그 자체로 숭상의 대상이었던 이스라엘의 주변국들, 암몬과 에돔, 다메섹, 게달, 하솔, 엘람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오늘 우리 사회의 이야기로 들려야 한다. 저들은 속임이라. 덫이요, 함정이다.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옵 1:3).” 이에 지혜의 성경은 일깨우신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 18:12).” 견고한 줄 알았던 것이 갇힘이었다. “바위 틈에 살며 산꼭대기를 점령한 자여 스스로 두려운 자인 줄로 여김과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독수리 같이 보금자리를 높은 데에 지었을지라도 내가 그리로부터 너를 끌어내리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49:16).”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다. 내 안에 이는 이런저런 마음의 중심도 실은 교만함일까,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복이라. “에돔이 공포의 대상이 되리니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놀라며 그 모든 재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리로다(17).” 일련의 사태를 보며, 다시 ‘코로나19’ 전염병의 확산이 우려를 낳고, 사람들은 학습된 두려움이라 보다 안이하게 대처하는 것 같다. 가파르게 치솟는 확진자 수의 대부분이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데 따른 경각심은 없고 이를 부추겨 정치화 쟁점화하려는 데 말, 말들이 쏟아진다. 분명한 사실은 교만이다. 그 가운데 믿는다는 데 따른 자기들의 완고함은 그 어떤 성곽보다 견고하다. 성경은 누누이 강조하신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 20:7).” 무엇을 의지하는가? 참 신앙은 옳고 그름을 떠난 겸허함이다. “어찌하여 찬송의 성읍, 나의 즐거운 성읍이 버린 것이 되었느냐?” 하시는 오늘의 말씀은 경고다(렘 49:25). 예전에 어땠고, 뭐가 어떻고 하는 주장은 무의미하다. 나는 주께 아뢴다.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시 86:17).” 특히 노년의 부모를 두고 저들의 남은 생을 향한 주의 은총을 구한다.
그리스도의 의지를 묵상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어떻고, 개개인의 믿음이 어떤지, 별로 도움이 될 게 없다. 누구나 모든 시각은 외눈박이의 외침과 다르지 않다. 진영논리로 보면 한도 끝도 없고 저마다의 가치와 기준을 가지고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소리는 하등에 쓸모가 없다.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라 들을 때이다. 사태의 조짐을 보고 그 추이와 동향을 살피며 주의 선도하심을 주목해야 한다. “대저 여호와께서 신원하여 주시고 또 그를 노략하는 자의 생명을 빼앗으시리라(잠 22:23).” 주가 도우신다. 붙드시고 잃지 않으신다. 우리가 애쓸 것은 주를 바라보는 일이다. 정치를 논하고 어느 정권을 왈가왈부한들? 한때 암몬도 에돔도 다메섹과 게달과 하솔과 엘람도 쓸모 있는 땅이었고 저마다 그 쓰심이 뚜렷하였다. 이에 말씀의 경고는 어떤 어려움과 미련함과 어리석음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는 그 일을 중단하지 않으신다! 설령 우리의 모습이 주의 눈에 탐탁하지 않고 사탄의 행색이 완연하다 해도, 하나님은 광야 40년의 저들 소행도 참으셨다!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행 13:18).” 얼마나 주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꼴들인가? 그러나 우리를 향하신 주의 넘치는 사랑은 곤비하지 않으시고 피곤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사 40:28).”
이러한 주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아니라면, 그리하여 나를 심판하사 신원하기까지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미 7:7).” 주를 바람이 전부였다. 다른 노력과 수고와 애씀은 모두 헛되었고 교만을 낳을 뿐이었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8).” 오늘 본문에도 보여지는 일련의 주변들에 대한 예언은 오늘 내게 들려주시는 경고라.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당하려니와 마침내 주께서 나를 위하여 논쟁하시고 심판하시며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공의를 보리로다(9).”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주만을 바랄 수 있는 용기와 의지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것이다. “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 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보리로다(10).” 오늘 우리의 삶이 저들로 부끄러움을 알게 하시기를. 곤 나의 늙으신 노부모의 여생이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본이 되고 덕이 되기를. 자식들의 잘 됨이 어떠하든지 오직 주의 영광이 되게 하시기를. 나의 기도는 침묵 가운데 더욱 커지는 것 같다. 이는 장차 받을 사면의 날까지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27-32).” 성경의 맥락은 하나다. 주가 주관하신다. 구원은 주의 것이라. 은혜는 값없이 주신 것으로 이를 누릴 수 있는 것이 은총이요, 주의 자녀였다. 내가 무슨 염치로 주 앞에 서며 또한 입을 열어 말 한 마딘들 보탤까? 그러함에서 주의 전능과 긍휼과 자비하심이 나를 붙든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시 62:5).” 이것이 그저 나의 고질적인 병명이요, 소심함이라 해도 나는 나의 이 소심함으로 주를 의지한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6).” 누가한들 뭐 그리 대단하겠다고, 정권에 책임을 돌리고 어느 종파나 세상 그 어떤 추함에 책임을 추궁한다고 해서, 그러면 나는 좀 나은가?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7).” 두렵고 떨림으로 저들을 볼 뿐이다. 오늘 말씀의 경고라. 주변국들의 멸망과 저주는 그저 남의 이야기로 그치는 소리가 아니다. 그런 걸 이처럼 지루하게 성경으로 나열하여 서술하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들어야 한다. 보아야 하고, 오늘에 벌이지는 일련의 사태와 이를 바라보며 여러 말들로 대응하는 교회나 사람들의 태도에서도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
그러므로 기다림이란 범죄가 짙을수록 말씀으로 소망하며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이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시 27:14).” 그러할 때 주의 도를 지키고 약속 안에서 겸손하다.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37:34).” 근신함으로 말씀을 따르고 말씀의 방향에 온 맘을 기울인다.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는 그에게 복종하는 체할지라도 그들의 시대는 영원히 계속되리라(81:15).” 그러할 때 마치 나는 좀 나은 삶을 살고 저들보다는 의로운 줄 알면 교만함으로 저들과 같다.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필요하다. “무리와 말을 할 때에 그 사자가 그에게 이르니라 왕이 이르되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왕하 6:33).” 아니면? 우리도 설왕설래 말들에 휩쓸려 다닐 뿐이다. 온통 쏟아져 거리로 나오고, 저마다의 목소리로 자신들이 옳다 외쳐대는 구호 속에서, 전염병이 창궐하듯 교만과 아집은 터져 나와 아물 줄을 모르고 썩어간다. 일련의 사태가 무조건 저주요, 경고만은 아니다. 주의 넘치는 사랑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주께 더욱 마음을 기울이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시 86:1).” 오늘 다윗의 기도는 이러한 사례에서 모범적이다.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2).”
저의 이와 같은 고백은 자기 확신이나 자기 의지로서가 아니라 주의 은혜와 긍휼하심에 대한 신뢰이다.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3).” 이를 알기 때문에 자신의 경건과 주를 의지하려는 마음을 내세울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의 지식을 넘친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엡 3:18).” 그러므로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시 86:4).” 오늘 시편의 기도는 거침이 없다. 왜?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5).” 주의 긍휼하심을 알면 알수록 주를 의뢰한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11).” 곧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