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전봉석 2020. 8. 19. 05:59

 

 

너희 마음을 나약하게 말며 이 땅에서 들리는 소문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소문은 이 해에도 있겠고 저 해에도 있으리라 그 땅에는 강포함이 있어 다스리는 자가 다스리는 자를 서로 치리라

예레미야 51:46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시편 88:13

 

 

여러모로 주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음을 당하는 것에 분노한다. 교회가 욕을 먹고 믿음과 신앙이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게끔 구는 몇몇 무리와 헛된 신앙의 모습이 사회를 어지럽히고 국가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있다. 그와 같은 기사에 한껏 목소리를 높여 우롱과 저주의 댓글이 달리고 그러느라 연일 주의 이름이 우스갯소리로 씹힌다. 오늘 말씀에서 나는 그에 따른 두려움을 느낀다. “화살을 갈며 둥근 방패를 준비하라 여호와께서 메대 왕들의 마음을 부추기사 바벨론을 멸하기로 뜻하시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보복하시는 것 곧 그의 성전을 위하여 보복하시는 것이라(51:11).” , 주는 보복의 하나님이시라. “곧 멸망시키는 자가 바벨론에 이르렀음이라 그 용사들이 사로잡히고 그들의 활이 꺾이도다 여호와는 보복의 하나님이시니 반드시 보응하시리로다(56).” 다들 겁이 없다. 희희낙락 노아의 시대를 연상하게 한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17:27).” 이를 마음에 두고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지혜라. 그러는 중에 너희 마음을 나약하게 말며 이 땅에서 들리는 소문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소문은 이 해에도 있겠고 저 해에도 있으리라 그 땅에는 강포함이 있어 다스리는 자가 다스리는 자를 서로 치리라(51:46).”

 

난리와 난리 소문이 끊이지 않는다. 이는 모든 재난의 시작이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24:6).” 그러면 그럴수록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7-8).” 그러니 나는 이와 같은 말씀 앞서 부복한다. 뭐라 하기보다 나나 바로 주 앞에 서야 한다. 다른 길 없다. 아이는 오전 일찍 면접을 보고 글방에 왔다. 이런 와중에도 돈 벌 궁리다. 사는 게 일이 되었다. 아이엄마의 심정도 이해는 간다. 정황상 오래 다닐 수 있는 곳은 아닐 것 같아서 돼도 걱정인데, 나 혼자 생각이다. 아이에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늘 하던 대로 일기를 쓰게 하고 말씀을 필사하다, 함께 성경을 읽고 저를 위해 기도하였다. 세상은 우리를 고발하고 주께서는 우리를 변호하신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나는 이 말씀을 여러 날 되뇌며 묵상한다. 문득 다윗의 이야기가 연상된다.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반기에 몸을 피할 때, 사울의 친족 중 시므온이 쫓아오며 저주를 퍼부은 일이 있었다.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삼하 16:13).” 그때 저마다 저를 죽이라 했으나 다윗의 생각은 달랐다.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11).”

 

훗날 압살롬이 죽고 모든 시국이 진정되자 그때의 아비새가 또 왕께 그때의 일을 상기시켜 아뢴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대답하여 이르되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말미암아 죽어야 마땅하지 아니하니이까 하니라(19:21).”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다윗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너희가 오늘 나의 원수가 되느냐 오늘 어찌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겠느냐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리요 하고 왕이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고 그에게 맹세하니라(22-23).” 여기서 나는 시므이와 다를 바 없고 아비새는 항상 그러한 나를 고발하는 사탄이며, 다윗은 이를 변호하며 살리는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13:8-9).” 앞서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7).” 하시는 징계의 날이 거듭되었다. 그때마다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하는 변호가 이어졌다. 오늘에 이르러 일련의 사태와 창궐하는 전염병의 기세가 심상치 않으나, 포도원지기의 기도가 들리는 듯하다. 다윗의 관용과 용서가 생각난다. 그저 다들 사느라 급급하고, 사는 데 따른 보람을 이 땅에서의 누림으로 보상받으려 하는 심리가 팽배하니, 오늘 예레미야서의 경고가 들리겠나? “많은 물 가에 살면서 재물이 많은 자여 네 재물의 한계 곧 네 끝이 왔도다(51:13).”

 

일련의 사태와 사람들의 발광은 모두 메시지다. 다들 누구를 성토하고 어느 교회를 지목하나 저들의 그릇됨과 거짓됨은 내 안에 고스란히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또 다른 어느 교회도 유난히 신유은사에 무슨 성령집회를 그렇게 강조하였던 곳으로 이단으로 몰리던 곳이라 하고, 누구는 하나님의 심판의 칼날이 그런 것들을 속속들이 파헤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한 시각에 일정부분 동의하지만 결국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여야 한다. 이 모든 징후는 나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당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나는 설교원고 초안을 잡으며, 존 번연의 책과 칼빈의 책을 읽으며, 아이와 성경을 읽고 돌아간 후 말씀 앞에 앉아 일련의 사태를 예의주시하며 병적인 나의 두려움은 파동을 일으키지만 그것으로 나는 주를 의뢰한다. 뜬금없는 친구와의 통화에서 이런 시국에도 제주도 여행을 갔다며 대수로워하지 않는 것에 놀랄 따름이다. ‘에이, 설마!’ 다들 가벼이 여겨 경고의 메시지를 뒤로 하는 듯하다. 그러할 때 다윗의 기도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내 생명을 내 대적에게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27:12).” 설마, 나는 아니라고 누군들 확신할 수 있겠나?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넘기지 아니하셨도다(118:18).” 주께 호소하고 아뢸 수 있는 것이 특권이다.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43:2).”

 

그저 지나친 우려인가? 괜한 염려이겠나? 과연 그럴까? 세계적으로 난리와 난리다. 소문과 소문이 끊이지 않고 가짜뉴스는 버젓이 사람들을 현혹하며 더 많은 이를 휘두른다. 일부의 문제가 아니라, 다들 이를 신봉하듯 언제부턴가 유튜브가 신이 되었다.’ 저마다 나름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담보로 하는 뉴스보다 개인채널에서 떠벌이는 극우, 극좌의 막말과 선동과 자극적인 말초신경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이에 이성적인 사리분별은 훼손된다. 말끝마다 정부를 욕하고 정권 탓을 한다. 저주를 퍼부으며 죽일 것처럼 싫어하거나, 목숨을 다해 맹목적으로 저들을 지지하거나사람의 마음이 그만큼 휑한 까닭이다. 그 가운데 허울뿐인 말씀과 기도와 자신의 신앙은 귀신 푸닥거리하듯 무당처럼 지껄여대기에 여념이 없다. 누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이 사회의 극단적인 현상이다. 더욱이 배울 만큼 배우고 사회의 한 축을 담당하던 어느 교수가 또는 무슨 박사가 그런 소리를 지껄이며 낄 데 안 낄 데 오만 곳에 끼어들며 세 치 혀를 놀리는데, 가히 말세의 한 단면이라 여겨진다. 닥치는 대로 씹어댄다. 저마다 자신이 옳다.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자신의 신념이 그 어떤 우상보다 숭상된다. 그야말로 자신(自身)이 자신(自信)이 됨으로 자신(自神)이 되었다. 자기가 자기를 믿으니 자기가 신이라! 어쩔 것인가? 사탄은 이처럼 밤낮으로 우리를 참소한다. 그러나 모든 게 어두울수록 곧 날이 밝을 것이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12:10).”

 

이럴 때일수록 정신 차리자. 누가 뭐랄 거 없고, 세상 어쩌니 탓할 것도 없다. 노아의 때부터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새삼스러울 게 없다. 다만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 9:13).” 나는 누가 개탄스러워하며 전화를 하였을 때 그리 일러 다독였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너나 잘해라. 바로 서라. 말씀을 떠나지 마라.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4:2).” 오늘도 말씀을 곁에 두고 주께 아뢴다.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88: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