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딸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그의 진노의 날에 그의 발판을 기억하지 아니하셨도다
예레미야애가 2:1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시편 90:13
우리의 가장 큰 슬픔은 주의 얼굴을 뵐 수 없을 때이다. 주의 얼굴을 가리실 때 우리는 암흑을 맛본다.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시 30:7).” 애가는 슬픈 노래다.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딸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그의 진노의 날에 그의 발판을 기억하지 아니하셨도다(애 2:1).” 작금의 현실은 슬프다. 서로의 관점이 얼마나 다르고, 다른 관점의 차이가 얼마나 두꺼운 벽을 쌓았는가. 어쩌다 교회는 진영논리에 휩쓸려 정치화되었던가. 일련의 사태가 무겁고도 두렵게 다가온다. 자성의 목소리는 약하고, 자기주장과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고집은 강하다. 죄는 혼자 움직이지 않고 단순히 한 겹으로 이어지지 않아서 수레를 끌 정도이니,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사 5:18).” 그저 세상적인 인식과 지원을 받는다. 아, 암울하기 짝이 없는 이때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기하급수적으로 확진자 수가 늘어나고 이러다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를 것인데도 다들 설마, 하는 안이함으로 두고 보자 하고 태평하다. 어찌하여 노아의 때와 같은 것일까?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눅 17:26).” 내 안의 두려움이 괜한 것일까?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27).” 안이하고 무뎌진 죄는 닥치고도 자기와는 별개로 놓고 경고 앞에서도 생뚱맞다.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28-29).” 이와 같이 오늘은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30).” 나는 두려워 주의 얼굴을 찾는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눅 17:26).” 가만히 말씀 앞에 앉는다. 뭐라 한들, 가족들조차 해이하다. 본래 진리를 말함으로 듣지 않는 법이다.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8:45).” 다들 자기주장에 함몰되었다. 갇힌 영혼은 밖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믿음은 항상 엄청난 저항에 부딪치는 것이다.
우리 영혼은 더럽고 추하다는 저항에 부딪친다. 우리 영혼은 깨끗함을 얻었다. 이를 위해 충분한 값을 지불하셨다. 그럼에도 믿음에는 회의와 갈등이 늘 같이 동승한다. 우발적인 혈기와 추악한 본성이 나를 주장하며 그 고약한 기질의 성격을 드러낼 때, 성령은 그러한 나에게 의로움으로 인도하신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보다 나은 사람이 아니다. 기질적으로 더 못됐고 추하며 자칫 자기 이상과 신념에 빠져 믿음을 오용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미끄러져 넘어지기 일쑤고 안 믿을 때보다 더 추하고 옹졸하여 자기혐오에 사로잡힐 때가 있지만 그럴 때마다 주님은 우리를 감싸시고 변호하신다. 그러한 우리를 거부하지 않으신다. 이러한 내용의 존 번연의 글을 읽으며 공감하였고 밑줄을 긋고 오래 되새겨야 했다. 저들, 믿음의 사람들이 묵상하였던 것은 오늘도 믿음의 사람들이 되짚어 묵상할 수 있어야 하는 영역이다. C. S. 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사탄인 삼촌은 조카에게 충고한다. ‘믿는 자들의 믿음에 대해 너무 주의를 기울이지 마라. 신앙과 정치를 이용하면 쉽다. 사회에서 기독교가 기여해야 하는 역할을 부추기기만 하면 종교는 수단이 되고 믿음은 신념이 되어 말씀과는 전혀 무관하게 그 믿음을 숭배할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단면을 흡사 보고 쓴 것처럼 은유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대목이다.
모르겠다. 나는 두렵다. 두려워서 주의 이름을 되뇐다. 이런 와중에 아이와 아이엄마는 어디 공장에서 3, 4일 일해보고 할 만하면 9월부터 정식으로 출근하게 되었다고 좋아라한다. 아내는 다들 하고 있으니까 별 무리 없을 것이라며 나의 염려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러는 중에 공부방은 폐쇄된 듯 인근 교회에서 확진자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는데 그 교회가 또 음악학원이나 무슨 시설을 같이 운영하였던 모양이다. 원장이 양성판정이 나왔고, 저의 가족 중 누가 지난 광화문집회에 참석했었다고 하였다. 어쩌다 동선이 그리들 겹치는지… 여러 보수단체가 현 정권을 비판하며 집회를 열고, 거기에 여러 교회들이 합세를 하고, 이를 믿음의 선봉에 선 듯 목사들이 나서서 주도하고, 이에 전염병이 전파되어 확진자가 지역사회 감염으로 전파되어 당장 내 곁의 사람들을 위협하는데도 이를 공작이고 음해라며 가짜뉴스를 생산하고, 그것을 또 충견들처럼 서로들 물고 뜯으며 굶주린 늑대들처럼 달려든다. 당장 우리 동네도 저 교회 하나로 여기저기 모든 기관이 마비되고 학교는 개학을 연기하였으며 여느 학원들도 된서리를 맞고 있다. 건물은 폐쇄되었고 아이들 수백 명은 강제로 부모 손에 이끌려 보건소에서 검사를 받아야 했다. 그 중심에 교회가 있고, 교회는 자성의 목소리를 내기는커녕 종교탄압을 지껄이며 왜들 그렇게 정권을 향해 쌍심지를 켜고 덤벼드는지. 이들이 좌경화된 공산당 빨갱이면 저들은 우경화된 미국의 앞잡이들인가. 아, 나는 자꾸 속상하고 부끄럽고 두렵다. 이를 정치 쟁점화 하여 접근하는 시각의 무리들을 증오한다. 더욱이 목사가 선봉에 서거나 믿음을 가장한 신앙의 목소리를 혐오한다.
그러나 끝이 아직 아니라, 이제 시작이라니!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마 24:6).” 결국 그 증거로는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7-8).” 나는 두렵다. 병적인 불안증인지 죄에 대한 인식으로 우리의 어쩔 없는 죄질에 대한 공포인지 모르겠다. 다들 저마다 뭐라 한들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때마다 값없이 돈 없이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고 보호하시는 주의 은총이 아니고는 살 길이 없다. “약한 자를 그가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신원하여 주시고 또 그를 노략하는 자의 생명을 빼앗으시리라(잠 22:22-23).” 우리의 약하고 연약함을 주가 더 잘 아신다. 그러므로 “훈계에 착심하며 지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23:12).” 말씀으로 전념하자. 어느 목사를 중심으로 헛된 환상에 사로잡히지 말고,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31:9).” 부디 말씀에 서고 말씀으로 서로를 돌보자. 주께서 그러한 나의 궁핍함을 아신다.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시 109:31).” 나는 종종 그 어느 벽보다 더 높고 견고한 벽을 가족에게서 느낀다. 뭐라 하면 또 그러는가? 하고 병적으로 치부하니, “내가 공의로 그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사로잡힌 내 백성을 값이나 갚음이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사 45:13).” 주가 나를 일으키시고 말씀으로 세우시지 않으면 어디 멀리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기 만하다.
이와 같이 말씀을 묵상하고 붙들고 의지하다보면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아무 것으로도 갚을 길 없는데, 그래서 감사뿐이라. 감사는 모두가 드릴 수 있는 공통된 보답이었다.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시 109:30-31).” 또한 다윗과 같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며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떨면서도 은혜를 부어달라고 기도한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4:1).” 지금과 같은 시국에 은혜가 아니고는 살 길이 없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25:16).” 죄로 얼룩져 송구하고 속상하고 염치없기 그지없으나,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26:11).”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기시고 한국교회들 위에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30:10).” 오늘 우리의 이 고통을 누가 당할까? 신념 좋은 믿음의 종파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활개 치며 부상할지 모르나, 온전히 주를 바라며 말씀을 의지하고자 하는 저희에게,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31:9).” 그러할 때 성경의 든든한 약속이 우리를 지키신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나는 이를 붙들 따름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시 90:13).” 곧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11).” 우리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12).” 이에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