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전봉석 2020. 8. 25. 06:02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예레미야애가 5:21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시편 93:5

 

 

일련의 사태는 염려와 근심으로 짓누르는 것 같다. 어떤 기다림은 가혹하고 그 가운데 주의 은총은 묘연하기만 하다. 난리와 난리 소문이 이어지면서 사람들의 마음은 피폐해져 간다. 그런 와중에 단비 같은 시간이 내게 있다면 이처럼 말씀을 묵상하는 때이고, 누구와 말씀을 나누면서이다. 막연하기 짝이 없던 기다림은 나의 모든 일상을 빨들이고 있었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구태의연한 표현은 이보다 더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게 없었다. 나는 내가 말을 하면서 들려주시는 진리가 놀라웠고, 들으면서 전하여주는 말씀이 운동력이 있어 새로웠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4:12-13).” 참으로 그러함에 깜짝깜짝 놀란다. 여전히 나는 누구보다 염려에 시달리고 범불안증이란 희귀한 병명처럼 지루하게 불안을 느끼며 고통스러워한다. 이와 같은 현실은 막연한 개념들 사이에서 신음하다 언뜻 손에 잡히고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는 성경의 비밀한 세계를 맛보는 데 유용하였다.

 

그것으로 신음하며 주께 호소한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5:21).” 하나부터 열까지 주가 하셔야 하고 하시기를 즐겨하신다. 나의 의로움은 이를 믿은 것뿐이다. 그 믿음은 막연한 것이나 놀라는 증거로 나타난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의연 중에 나의 가는 길이 그러하여서,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13:15).” 고통을 호소하다가 찬양이 드려지는 데 따른 놀라움을 어찌 표현할 길이 없다. 곧 나는 비난 받아 마땅하고 버려져 아무 쓸모없는 것이 당연할 텐데도 나의 기도가 주께 상달된다.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8:4).” 이를 목격하고 체험하는 일은 놀랍다. 날마다 매순간 일어나는 일이면서 이를 일일이 감사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가령 누가 처음 글쓰기를 할 때 쓸 얘기가 없다며 호소한다. 쓸거리가 없어 어떤 특정한 사건이나 상황만을 쫓는다. 것도 그 실태에만 한정한다. 그러나 그 일이 있기까지 우리의 숱한 일상은 무의식적으로 외면당하고 무시되며 시선에 머물지 못할 뿐이다. 나는 그에게 막연하다고 여기는 그, 일상을 적어보라고 한다. 어디까지 가는 동안, 또는 집에서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었다고 여기는 그 버려지는 시간 같은, 그 속에 담긴 무수한 이야기가 글의 소재다. 하루 중에 아무 것도 안 하고 지나는 시간이란 있을 수 없다!

 

성령은 은밀하고 내밀하게 역사하시는 것 같으나 대놓고 우리의 시간을 소유하신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일은 저절로 믿어지는 것처럼 저절로 의롭게 되어간다. 어떤 의도나 애써 충성하여 거두는 의로서는 아니다. 나는 어떠하든 죄인이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아무도 죄가 없다 할 수 없다. 천국은 커트라인이 있는 게 아니다. 몇 퍼센트 이상 의로움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게 아니다. 이미 율법으로는 모두가 저주 아래 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3:10).” 아무도 자기 의로 의롭다하심을 받을 수 없다. 애써 수고할 때 우리가 빠지기 마련인 자아도취는 스스로 자신을 속인다. 바룩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그 때문이다.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45:5).” 아무 일도 하지 않는데 어떻게 의로울 수 있을까? 의롭다함을 얻는 길은 하나뿐이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5:19).” 한 사람의 순종으로 우리가 의인이 되었지, 우리가 죽자고 싸워서 이룬 게 아니었다.

 

이를 구약에서 이사야는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내게 대한 어떤 자의 말에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 하느니라(45:24-25).” 이 의는 하나님 안에서,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다. 바울은 그리 설명하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 우리는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 안에 있다. 고로 여호와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고자랑하는 것이다. 예레미야를 대신하여 말씀을 전하다 낙심하였던 바룩하게 하신 말씀도 그런 의미다.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45:5).” 주가 더하신다. 이를 우리는 볼 뿐이다. 가령 아이는 일하지 않아도 부모가 벌어오는 것으로 산다. 아이의 일은 부모에게 속하는 것뿐이다. 그 품에서 즐거워하는 게 일이지, 먹고 살기 위해 아이가 밥벌이를 해야 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그러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18:17).”

 

그러므로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4:4-5).” 이를 보다 살뜰하게 표현하면,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3:7-9).” 오직 그 안에서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다. 내 의가 아니다. 뭘 해서 이룬 업적이 아니다. 일련의 사태를 통해 나는 더욱 주가 하시는 일과 그에 따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묵상하게 된다. 이 땅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것이 의다. 구원에 대해 나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4:12).” 더욱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시고 그 죗값을 담당하셨다는 것이 가장 이해가 안 된다.

 

가끔 느끼는 것은 오히려 나의 의가 주의 구원에 방해가 된다! 내가 뭘 좀 하려는, 어떤 선한 의도가 일을 그르칠 때 보면 그렇다. 결국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9:31-32).” 그러니까 자꾸 내 안에서 자꾸 뭐라도 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당위가 나로 하여금 주를 온전히 경외하는 데 오히려 훼방을 논다. 목사로서, 그래도 명색이 교회인데 뭔가 이런 시국에 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한데 성경은 누누이 강조하기를 나의 의는 완전히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2).” 내가 하는 게 아님을. 누가 오고, 누구를 더하는 모든 일에는 주가 주도적으로 하시는 것임을. 다만 나는 거기에 있을 뿐이고, 그러는 나의 기다림은 그저 가혹하여 막연한 것이 아니라, 무던히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림은 관계에 따른 용어다. 나와 관계없는데 비행기를 기다리고, 어느 나라 어느 바닷가에 물이 들어오기를 기다리지는 않는다. 노아의 기다림은 오랜 세월 방주를 짓는 것이었고, 앞서 에녹의 기다림은 묵묵히 주와 동행하는 것이었다. 곁의 누구도 저를 이해할 수 없는 까닭은 저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이 기다림은 성립되고 무던함을 더하였다.

 

가령 지난 봄날 1차로 코로나가 확산되고, 아들이 필리핀에서 돌아와야 할 때의 나의 기다림은 가혹하면서도 빠져나올 수 없는 참여였다. 거기서 비행기 표를 구하지 못할 때의 애태움과 간신히 구한 비행기 시간과 그 날짜를 기다리며, 저들 공항이 폐쇄될까 하여 매일매일 촉각을 곤두세우고 저들 뉴스를 뒤져보았던 것은, 관계다. 그와 같은 관계 속에 있던 사람들은 아들이 무사히 한국에 들어왔다는 소식에 안도하고 기뻐할 수 있었다. 딱히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는, ‘아들이 들어왔어?’ 하는 식으로 언제?’ 하면서 별 관심이 없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주를 기다리고 주의 말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까닭은 모두가 다 관계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성립되었다는 증거다. 아니면 굳이 기다림은 막연하고 뜬금없을 따름이다. 그러든가 말든가, 관계 밖의 관계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오늘 나는 이와 같은 마음을 토대로 시편의 기도를 읊조린다.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93: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