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그들이 가면 이들도 가고 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는 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더라
에스겔 1:21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시편 94:11
누가 어떤 말을 하면 그것이 삽시간에 퍼져 사람을 선동하는 시대다. 어느 목사의 자성의 글을 대통령이 공유하자 순식간에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하였다. 저의 글을 얼핏 읽어 그 내용을 정확히 옮겨 올 수는 없으나, 개인방역과 그에 따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세를 성찰하고 묵상한 것이었다. 이를 공감하여 내가 이해하고,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으로 정리하면 그런 소리다. ‘마스크를 쓰라’는 것은 입을 다물고 막말을 금하며 남에 대해 헐뜯고 서로를 증오하는 것을 멈추라는 것이다. ‘손을 자주 씻으라’는 것은 자신을 청결히 하며 돌아보아 스스로를 주 앞에서 바로 하라는 소리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으로 너무 밀착되었던 관계에서 거리를 두고 곁에 두시는 자연과 모든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내밀하신 손길을 느끼며 누리라는 것이다. ‘대면 예배를 금지하라’는 것은 형식적으로 무책임하게 모이고, 습관적이고 수동적으로 드려지던 예배를 일상 가운데 자신의 소소한 혼자 있는 시간들이 곧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였다는 것을 알라는 시간이다. 그밖에도 몇 인 이상 불필요한 ‘모임을 피하고, 지역 간의 이동을 자제하라’는 것은 그만큼 끼리끼리 모이던 자기끼리의 돌봄과 사랑에서 소외되었던 이웃을 돌아보고, 마음을 들뜨고 좀이 쑤셔 어디 나돌아 다니던 것을 멈추고 자신이 속한 이웃과 지역에서 그동안 소홀히 외면하고 지내던 것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시간이다. 물론 저의 글과는 동떨어진 내용이었으나 그 공감은 같다.
하나님은 균형의 하나님이시다. 이를 오늘 본문에서 바퀴로 묘사하며 전개되었다. 앞서 나는 이러한 환상과 난해한 의미의 글을 무리하게 읽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데는 주저한다. 다만 이 아침, 바퀴의 이미지와 이것이 균형이 서로의 반동으로 굴러갈 수 있다는 데 주목하였다. 이에 그 뜻을 주석이나 어떤 이의 해석에서 찾아볼까 하다 주가 주시는 마음으로 읽었다. “그 생물들이 갈 때에 바퀴들도 그 곁에서 가고 그 생물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 바퀴들도 들려서 영이 어떤 쪽으로 가면 생물들도 영이 가려 하는 곳으로 가고 바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니라(겔 1:19-20).” 즉 하나님은 공정하고 정의로우시며 균형에서 틀어짐이 없으시다. 이는 “그들이 가면 이들도 가고 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는 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더라(21).” 주의 영, 그리스도인들 몰래 하나님의 일을 막무가내로 진행하시거나 속수무책으로 우리를 난감하게 하지 않으신다. 이처럼 당혹스럽고 두렵고 불안한 사회 정세와 서로간의 반목과 대립의 양상에서도 나는 더 많은 이들이 또는 목회자가 저처럼 그 의미를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역사하심에 대해 누리고 느끼고 이를 바르게 전하고자 한다는 데 확신한다. 모두가 선동적이고 모두가 정치적이며 모두의 속내가 돈 때문인 건 아니다! 이 말은 누가 내게 말하길, ‘솔직히 교회가 예배를 포기하지 못하는 까닭은 헌금 때문이 아닌가?’ 하고 쏘아댔을 때 나는 굳이 저에게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외눈박이 시대이다. 저마다의 방향으로만 본다. 그런 이에게 뭐라 한들 논쟁은 끝이 없고 어느덧 같은 목소리로 앙앙거리게 돼 있다. 그러느니, “그들이 가면 이들도 가고 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는 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더라(21).” 나는 오늘 말씀을 균형 있는 하나님의 섭리, 곧 그리스도인으로의 참여와 관심은 광기어린 자기주장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외눈박이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를 굴리는 바퀴 테두리에는 온통 번쩍이는 눈들이 가득하다. “그 둘레는 높고 무서우며 그 네 둘레로 돌아가면서 눈이 가득하며(18).” 그래서 우리는 곧게 행한다. “영이 어떤 쪽으로 가면 그 생물들도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12).” 돌이키지 아니한다. “그들이 갈 때에는 사방으로 향한 대로 돌이키지 아니하고 가며(17).” 우리의 묵묵함과 무던함은 세상에서의 설왕설래하는 사람들의 오만가지 주장에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고 하는 것이 아니다. ‘눈이 가득하였다’는 것은 사람들의 시선이 교회를 향할 때 이를 무턱대고 곧이곧대로 받거나 안 믿는 자들의 시선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는 덴 확실하다. 하나님이 그 온 사방의 눈들을 통해 우리를 주목하고 계신다는 의미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5:3).” 이를 너무 풀어 말하면 마치 삼라만상에 다 주의 영이 깃들고 온 우주의 기운이 하나로 하나님을 뜻한다는 다신론적인 주장이나 모호하고 막연한 다원주의적인 또는 자연숭배적인 관점으로 접근하기 십상이다.
나는 아주 단순한 사람이라, 좋은 대학에 들어간 아이들의 통계를 봤더니 열에 일곱 여덟은 탁 트인 공간, 그러니까 거실이나 도서관 같은 데서 공부했다고 한다. 이는 보는 눈을 의식할 때 사람은 모름지기 무의식적으로라도 더 집중하고 더 주의하게 된다는 소리다. 가령 나도 요즘은 아들과 같이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서, 물론 전에도 혼자 하던 책 읽기나 글쓰기를 하지만 그것이 좀 더 농밀해졌다. 싫든 좋든 아들의 눈을 의식하는 것이다. 혼자 있으면 늘어지기도 하고 그때마다 다른 짓도 하던 것이 이제는 보다 바른(?) 자세로 독서와 쓰기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이렇듯 나의 이해는 단순명료할 뿐이다. 사람은 그리 대단하여 저 혼자 뭘 이룩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실제 혼자 틀어박혀 저만의 시간으로 공부했던 친구들보다 누군가가 같이 있고 저들이 아무래도 의식되는 그러한 공간에서 공부했던 친구들이 그처럼 좋은 결과로 나타난다는 데서 나는 그리 이해하였다. 오늘 시편의 말씀을 그렇게 읽었다.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시 94:11).” 나 혼자 두시면 안 될 것 같을 때 아들의 공부시간과 나의 시간, 그 공간을 같이 하게 하신 것이다. 또는 누구를 보내시고, 어떤 이의 일로 덩달아 마음을 쓰게 하시기도 한다. 여호와의 눈은 그처럼 온 땅을 감찰하신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대하 16:9).” 그리하여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12).”
나는 어느 목사의 글을 저가 어느 교단인지, 무슨 주의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 하는 보도 내용을 읽다 그냥 치웠다. 사람들의 말하기 좋아하는 습성은 마치 별식과 같아서 굳이 몰라도 되는 것에 오히려 더 열을 올리는 법이다. 것도 이 글을 대통령이 공유하고 공감했다 해서 세간의 집중이 된 것인데, 하물며 그렇다면 하나님이 내 글을 공유하시고 내 말에 귀를 기울이시며 이를 지지하고 응원하신다면? 생각만으로 나 혼자 있을 때의 허튼 생각이나 하는 짓이, 마치 모두 카메라에 잡히는 것 같아 쭈뼛할 때도 있다. 요즘 무슨 ‘리얼 관찰 카메라’가 인기 있는 것처럼, 같이 나의 하루를 앞서간 믿음의 성도들이 둘러앉아 하나님의 진행으로 보고 계신다고 생각하면…. 혼자 이처럼 일찍 일어나 말씀을 묵상하고 이를 글로 쓰고 있는 나의 모습은 어떠할까? 뿐만 아니라 세상 어느 방송에서도 시도할 수 없는, 저들은 나의 생각까지도 감찰하시고 다 알고 공유한다! 부끄럽고 몸 둘 바를 몰라 숨어버리고 싶지만, 성도의 삶이란 그처럼 숨을 수 없고, 숨길 수도 없는 공간에서 모두에게 공유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말은 곧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는 소리다. 곧 ‘내가 산 것은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그러므로 바울의 설명이 이해가 된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7-9).” 나는 일련의 사태가 버겁다. 코로나 확산세가 무섭다. 병적으로 불안이 떠나지를 않는다. 그러나 이것으로 주를 더욱 은밀하게 또한 내밀하게 바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주밖에 의지할 이 없다. 나의 고통을 알아줄 이 없다. 주의 부활은 나의 부활이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롬 6:10).” 이는 곧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7:4).” 그런데도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골 2:20).”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기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고 자신의 이해로 오늘의 상황을 판단하고 그에 따른 주장과 온갖 말들을 서로 듣고 옮기고, 이는 마치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저의 자아를 형성하고 그것으로 신념이 되고 기질이 되어 몇 해 전만 해도 안 그러던 교회였는데, 그 사람이 그렇게 변하는 까닭은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들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그에 따른 의미로 나는 오늘 시편의 말씀을 뼈아프게 듣는다.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을 피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시 94:12-13).” 물론 아프다, 괴롭고 슬프다. 믿는다고 병에 안 걸리고, 기도한다고 코로나에 걸리지 않는다는 설교는 모두 헛되다. 솔로몬의 지적과 같다.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2-3).”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기도를 하는 자나 안 하는 자나, 의를 행하고 선을 구하는 자나 그렇지 못한 자나… 하나님께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나의 한 가지 고백, “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시 94: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