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전봉석 2020. 9. 2. 05:5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이 담을 헐라 하시기로 내가 그 담을 허니 한 문이 있더라

에스겔 8:8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시편 101:1

 

 

온통 가증한 것들뿐이다. 주께서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101:8).” 하시는 말씀 앞에 가만히 앉는다. 인자야, 하고 손을 이끌어 오늘의 이 모든 현상을 보게 하신다. 담으로 가려지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려 아름다운 줄 알았는데, 회칠한 담이었다. “회칠한 담을 내가 이렇게 허물어서 땅에 넘어뜨리고 그 기초를 드러낼 것이라 담이 무너진즉 너희가 그 가운데에서 망하리니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13:14).” 일련의 사회 현상 중 어느 것도 버릴 게 없다. 모든 게 주의 음성을 낸다. 사람들의 가증함이 극에 달했다. 오늘 에스겔서를 읽으며 나는 마음이 어려웠다. 양 갈래의 길이 보인다. 하나는 스스로 의로움이다. 다른 하나는 의롭다 하시는 이의 의로움으로 의로움의 길이다. 실제로 나는 의롭지 못하다. 모든 인간은 악하다. 실체를 보면 혐오스러울 뿐이다. 저마다의 의로움으로 말질이고 남을 비난한다. 전염병보다 무서운 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실상인 듯하다. “내가 들어가 보니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방 벽에 그렸고(8:10).” 그리고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그것을 보았느냐 너는 또 이보다 더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15).” , 이것들을 보니 그럼 나는 어떤가? 고통 중에 처하면 우리는 모두 자책한다. 자신이 지은 어떠한 죗값이라고 여기며 더 깊은 수렁에 빠지기 십상이다.

 

누구에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줄줄이 일이 생겼다. (자신이 하던 일이 모두 중단되었고, 신랑은 고질적인 디스크가 도저 왕래가 어려울 정도라, 집에 있으면서 온갖 잔소리가 이어진다. 유난히 자기가 사는 아파트에 확진자가 늘어 불안을 호소하고, 이런 와중에 친정엄마는 엉치뼈가 금이 가 응급실에 실려 갔다. 큰언니인 아이엄마도 그런 친정엄마를 건사하랴, 정신 없는 다 큰 아들을 뒷바라지하랴,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데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늙은 아버지는 혼자 남겨진 집에서 툭하면 전화를 해서 욕지거리다. 하루 종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저들 자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내가 다 숨통이 조이는 것 같다.) 그럴 때, ‘이게 다 내가 처녀 적에 지은 무슨 죄 때문이야!’ 한다거나, ‘대대로 안 믿는 우리 조상들 때문에 오늘 이처럼 곤혹을 치르는 것이야!’ 하는 말이 툭툭, 튀어나온다. 그렇듯 우리는 어떤 고난을 마주하면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는 것에서 도를 넘어 밑도 끝도 없이 조상적의 죄까지 들추어 괴로워하며 죄책감에 짓눌린다. '그런 거 아니다. 그러는 거 아니다.' 하고 말해주어도, 아니면 지금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시는 일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하면서, 나름은 열심히 교회에 봉사하고 주를 믿으며 신실하게 산다고 사는 신앙을 자기 의로 드러낸다. 아이엄마도 언젠가 말하길, '사랑하죠! 저도 누구보다 그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왜요? 내가 이혼을 당하고 악착같이 산다고 사는 이 일이 그렇게 죄가 되나요?' 하면서 아이의 아픈 것과 처한 상황을 한탄하며, 이를 모두 죗값으로 돌렸었다. 그럼 순간 회개와 용서의 기도는 사라지고,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들고 일어난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요?’

 

종종 고통 중에 있는 누구의 지청구를 듣고 있는 일은 힘에 겹다. 그러는 내게 어제는 하나님이 성경 한 구절을 마주하게 하셨다. “나는 결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내가 죽기 전에는 나의 온전함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내 공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28:5-6).” 욥은 저의 세 친구가 끊임없이 정죄하고 판단하는 소리에 이내 자신의 믿음을 붙든다. 문맥적으로 보면 참 오만하기 짝이 없다. 자신은 순수하고 그 순결함으로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실제 저는 자신의 성결함을 진술하기도 하였다. 자신은 눈으로라도 범죄하지 않았다.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31:1).” 자신은 저들이 가는 길에 가지 않았다. “만일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거나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랐거나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다면(7).” 또한 얼마나 나름 선을 행하며 어려운 이들을 돌았던가?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과부를 인도하였노라(18).” 자신은 부유하였으나 한 번도 욕심을 낸 적이 없었다. “만일 내가 내 소망을 금에다 두고 순금에게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다면(24).” 이런 내용을 읽다보면 저의 의, 그가 붙든 의롭다함이 가관인 듯하다. 이보다 더 고약하게 자긍하는 자가 또 있겠나싶다. 그런데 실은 바울도 그런 소릴 하였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

 

결국 우리의 뉘우침은 자칫 스스로를 판단하며 지난 죄를 끌어올려 자신의 온전하지 못함을 정죄하게 한다. 스스로 고발하는 형국이다. 누구는 말끝마다 내가 그렇지, . 내가 하는 게 다 그렇지 뭐!’ 하며 자신을 깎아내린다. 고통은 상습적으로 우리를 자책하게 한다. 그런데 우리의 의로움에 대한 성경의 올바른 의미를 모르는 소리다. 오히려 우리의 죗값으로 죽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하심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일이다. 우리가 의로운 것은 단지 주장의 영역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하다. 욥도 사실 자신의 실체를 잘 안다.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9:2).” 누군들 의인이겠나?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20).” 이것이 실상이다. 저 또한 자책으로 끌려가면 정신없었다.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내가 젊었을 때에 지은 죄를 내가 받게 하시오며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점검하시나이다(13:26-27).” 그뿐인가? “나는 썩은 물건의 낡아짐 같으며 좀 먹은 의복 같으니이다(28).” 열등감과 패배감은 끝장이다. 다윗도 같은 모습을 보였다. 죄악이 나를 이끌어 고통을 감내하게 할 때면 우리는 누구도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51:8).” 율법은 이와 같이 우리를 호시탐탐 정죄하고 고소 고발한다. 그렇게 우리의 신앙을 마비시킨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51:6).” 저들이 내가 아니었겠나? 속수무책으로 죄의식에 시달리고 죄책감에 짓눌려 숨을 쉴 수가 없을 지경이 된다. ,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51:3).”

 

이는 우리가 자꾸 오늘의 고난을 보응으로 받기 때문이다. 보응은 지난 죄에 대한 대가를 묻는 것이다.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욥의 세 친구들처럼, 특히 빌닷은 욥의 자녀들이 모두 몰살하여 죽었을 때 저들이 저들의 죄 때문에 죽었다고 정죄하였다. 일련의 사회 사건이나 전염병으로 인한 난데없는 고충이나 해도 해도 끝이 없을 것 같은 고통의 정중앙에서 누가 굳이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기 안에서 계속 이와 같은 정죄와 자책과 책무가 숨통을 조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절대 성경의 참 의미가 아니다. 보응의 의미로 우리에게 고통을 가하시는 것이라면 우리의 믿음은 모두 헛된 게 된다. 아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십자가도 모두 허사가 된다. 물론 하나님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징계처럼 그의 백성을 그때마다 꾸짖고 징계하신다. 또는 스스로의 결과로 자신의 부도덕함과 부주의, 방종으로 인해 당하는 고통도 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이 그대로 반영되는 것일 때도 있다. 하지만 이를 하나님의 보응으로 보거나 그리 강조하여 죄의식을 더하며 회개할 것을 강요하는 일은 사탄의 짓이다. 저가 우리를 끊임없이 정죄하며 공략한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3:2-3).” 우리의 더러운 옷을 들추어서,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를 보이며 이를 정죄하자, 하나님은 그러는 사탄은 책망하셨다.

 

오늘의 어떤 고통도 보응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의롭다.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요, 원칙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4).” 욥이 그처럼 자신을 의롭다고 한 것은 자신의 의를 자랑함이 아니라, 그리 여겨주시는 주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저는 철저히 붙들고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1:21).” 저와 같은 고백이 사람이 사람의 의지로 가능하겠나? 사나 죽으나 이제 내가 주의 것이란 말이 괜한 소리이겠나?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 과장한 신앙고백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시는 까닭은 내가 그만큼 율법적으로 누구보다 완벽하여 저들로 성인으로 추대를 받고 모두가 인정하는 의인이라서가 아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기 때문이다. 저가 나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그 값을 다 지불하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의 안타까운 이런저런 사연을 들으며 속상하였고, 이를 어찌 좀 만회하려 그처럼 죽어라 하고 애쓰는 저의 노력이 더더욱 속상하였다. 그러는데도 어려움이 겹쳐서 오고, 불행은 더 큰 불행을 몰고 오고 있었으니 저의 사로잡힌 죄의식과 죄책감은 가히 짐작이 가지만, 그런 거 아니다! 그럼에도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하는 말을 덧붙이면서.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101:1).” 오늘 시편의 기도를 음미한다. 나는 그야말로 죄인이고 할 말이 없는 죄악된 종이오나,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2).” 온전히 주를 바라며,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