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보라 가는 베 옷을 입고 허리에 먹 그릇을 찬 사람이 복명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내가 준행하였나이다 하더라
에스겔 9:11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시편 102:28
안이하고 막연하게 굴 때가 아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때이다. 우리 사람이 뭐라고!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 9:21).” 어디 감히, 스스로 존귀하다 하나 주께서 그리 삼으신 까닭이지,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20).” 종종 우리의 착각은 한이 없는 듯하다. 그리 여겨주시니 마치 그전부터 자신이 스스로 존귀한 줄 안다. 그러할 때 고통 앞에서 우리는 순종을 배운다. 배부를 땐 누구나 헛소리를 하게 돼 있다. 남이 하는 소리에 휘둘리지 마라.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으로 지나치게 자신이 의미부여하지 마라. 또한 습관적으로 빠져드는 죄의식을 선하다고 여기지 마라. ‘내가 받은 은혜가 네게 족하다.’ 주가 주시는 말씀이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누가 나를 좋게 여겨주어 더 큰 일을 하실 텐데, 하는 소리 앞에서 나는 오히려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 모두의 오해는 끔찍하다. 다른 복음은 없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4).” 헛소리에 귀 기울이느니, 차라리 나지 아니한 만 못하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 26:24).” 그런 인생도 있다는 말씀 앞에 오금이 저린다. 자유의지를 운운하고 자기 선택을 앞세우는 자의 말로를 나는 이제 두려운 마음으로 본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갈 1:6).” 저마다의 완고함이 어찌나 강하고 담대한지, 이는 무모함이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7).” 누가 죽음을 연구하고, 잘 죽는 방법을 고안하고 있다는 책을 냈다. 누구는 이에 동조하여 구도자의 삶을 자청하였다. 순례자의 길을 걸으며 굳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삶의 의미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8).” 나는 선생이 출판하는 책의 목록을 살피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아직도 거기에 머물고 있는가, 한때 나도 참 그 길 위를 낭만적으로 그려보곤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9).”
결코 우리의 의는 없다. 우리로 의롭다 하시는 이의 의이다. 내 안에 두는 의미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인생이다. 저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더욱 간절하여 부르짖음으로 확신도 한다. 그런데 나는 어느 목사의 장담이 두렵다. 뭔가 대단한 착각에 사로잡힌 인생이다. 이 의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혼자 짊어지신 것으로 홀로 저의 의이시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죄에 따른 것일 뿐, 그럼에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의다. 나의 공로는커녕 나 때문에 값을 지불하신 의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그가 나의 양심에서 죄를 치워버리셨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9:14).” 그런데 스스로 얻은 의처럼 여기니,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10:5).” 이를 거절하는가? 스스로 제사를 드리려함인데,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6).” 그 어떤 우리의 의로운 수고로 수만 명의 갑절을 구한다 한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13:12).”
이를 알면 알수록 나는 내세울 게 없다. 이는 다만 얻은 것이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 5:17).” 하나님이 홀로 행하신 바이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 61:10).” 그러니 황송하고 송구할 따름인데.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롬 15:5-6).” 두렵고 떨리는 마음은커녕 스스로 의를 자부하는 데 따른 일련의 사태를 보면 나는 기겁을 하겠다.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15).” 성경은 나를 붙들어 세우신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18-19).” 나는 함께 성경을 나누며 말씀을 보는 전도사에게 부디 우리는, 특히 더 말씀으로만 온전히 붙들려 살자고 신신당부하였다.
과잉의 세대다. 모자람이 없다. 유튜브 어디를 검색해도 온갖 복음이 다 전하여진다. 묵상하여 하나님과의 내밀한 관계가 형성되는 차원을 떠났다. 관중이 되었다. 열광하든지 방관하든지, 말씀이 무차별적으로 버려지는 시대다. 비 오는 날 버려진 전단지들이 길바닥에 들러붙은 것처럼, 저들의 증거는 흉측스럽다. 연단에 올라 선동한다. 이를 선포라 생각한다. 열광하든지 방관하든지, 관중이 되었다. 우리가 저주로부터 구원하는 의는 그런 게 아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자신의 의로 돌리려는 자의 엄포는 무섭다. 많은 무리가 휩쓸린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내놓겠다니! 그 목숨의 값이 얼마나 하다고? 당최 존엄한 죽음 어쩌고 하며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꼴값이다. 어쩌자고 선생은 이런 책을 출판하는 것일까? 책장 저만치 밀어두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1).”
자,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징계의 날을 보게 한다. “보라 가는 베 옷을 입고 허리에 먹 그릇을 찬 사람이 복명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내가 준행하였나이다 하더라(겔 9:11).” 죽은 자들과 죽을 자들이 즐비하게 둘러서서 환호하고 함성을 지른다.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6).” 나는 저들의 곡성이 들리는 듯하다. ‘성전 앞에 있는’ 자들로부터의 죽음이다! 에스겔은 부르짖어 고한다. “그들이 칠 때에 내가 홀로 있었는지라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아하 주 여호와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분노를 쏟으시오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두 멸하려 하시나이까(8).” 그러나 돌아오는 말씀이 무섭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그들의 행위대로 그들의 머리에 갚으리라 하시더라(10).” 이 일은 다 준행되기까지 그치지 않으실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시편의 말씀을 되뇌며 절규한다.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시 102:1).” 스스로 뭐나 되는 줄 아는 사람 따위의 존엄에 대하여! 어떤 미친 프로그램처럼 ‘개는 훌륭하다’고 역설한다. 개보다 못한 사람이 널렸다는 소리로 들린다. 개는 아무리 훌륭해도 개다.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2).”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은 사람뿐이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12).” 여기서 끝장나는 것 같으나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13).” 주의 의로 덧입은 자의 확신은 고요하다. 이 모든 게 은혜라. “주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의 티끌도 은혜를 받나이다(14).” 나는 주 앞에 부복하고 오늘의 말씀을 되뇐다.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25-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