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

전봉석 2020. 9. 7. 05:43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자들이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괘를 보며 사람들에게 그 말이 확실히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하거니와 그들은 여호와가 보낸 자가 아니라

에스겔 13:6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들의 고통을 돌보시며 그들을 위하여 그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크신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그들을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

시편 106:44-46

 

 

그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일을 코로나19’로 인해, 여러 놀라운 경험을 하고는 한다. 가령 더욱 주를 바라게 되는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에서부터 밀집하여 모이던 것을 즐기던 것에서 떨어져 혼자 있는 시간이 늘고, 주께서 더하시는 날들에 대한 색다른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맛보게 된다. 누구는 좀이 쑤셔 죽으려 하고, 누구는 그것으로 주님과의 교제가 새롭다. 주일 아침, 묵상을 하다 문득 을 떠올리게 되었다. 멀리 떨어져 있고, 여러 환경 때문에 교회에까지 못 오는 아이에 대해 가까운 교회로 가라고만 할 줄 알았지, 뭘 더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다 코로나가 터졌고, 다니는 집 앞 교회에서의 비대면 온라인예배도 녹화로 진행되어, 아이는 혼자 예배드리는 것을 서툴러하였다. 그런 게 마음이 쓰였던 것이다. 아픈 아이는 억지로라도 오게 할 수 있었지만, 그때 주님이 주신 마음은 우리도 해보자, 하는 거였다. 그저 안주하여 나는 어제 주일도 가정예배로 드릴 생각이었다. 아픈 아이는 못 오는 두어 주일 동안 예배 전에 잠깐 통화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는데 것도 그게 전부여서 마음이 어려웠었다. 신기한 것은 컴맹에 가까운 나에게 그런 마음을 주시면 뭘 하겠나 싶은데, 더 일찍 교회로 나가 어떻게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호스트로서 가입을 하고 시간을 예약하고, 누구를 초대하고, 주어진 초대번호와 암호를 숙지하는데 한 시간 이상 버벅거려야 했다.

 

보면 하나님 앞에서는 마음이 중요하다. 하려고 하면 할 길을 열어주신다. 더욱이 아이 또한 뚱딴지 같이 아침에 그리 설치를 끝내고 초대하는 것이라 어리둥절하였다. 가족들은 나른한 늦은 아침 식사를 어디 나가서 먹기로 했다가 취소가 되었다. 덕분에 거의 반년 만에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말씀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코로나 사태가 가져온 색다른 경험과 놀라운 효과였다. 물론 우리의 일상은 예배다. 그러나 어떤 구속력이 떨어지면 자기의지로 이를 인식하며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가끔 그렇게 화상으로 서로 만나 성경공부도 가능하겠다고 서로 이야기했다. 내가 원래 그런 걸 능숙하게 잘하는 사람이면 이렇게 호들갑을 떨지도 않을 것이다. 스마트 폰도 여러 다양한 기능에 비해 있는 것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인데, 주께서 그리 다 하게 하셨다. 솔직히 뭘 어떻게 해서 그게 다 됐는지 모르겠다. 거짓이 난무하고, 아이들은 방치되어, 무엇이 진리이고 비진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때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자들이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괘를 보며 사람들에게 그 말이 확실히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하거니와 그들은 여호와가 보낸 자가 아니라(13:6).” 더럭, 두려움이 먼저 인다. 특히 왜 우리나라는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휩쓸려 정치화되고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가? 어쩌면 120년이 넘는 애굽 생활로 노예로 종노릇하며 살던 것들에 익숙하여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다. 오늘 말씀은 이를 안타깝게 들추어 깨닫게 해주신다.

 

광야에서의 생활은 스스로들 불순종으로 자초한 일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거역과 원망은 수동적인 자세로 인해 군중심리로 이끌려 다녀야 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저들을 꾸짖으시고 돌이키시고 다시 주의 뜻을 깨달아 알게 하셨으니,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들의 고통을 돌보시며 그들을 위하여 그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크신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그들을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106:44-46).” 오늘도 나는 주의 긍휼하심 앞에서 놀란다. 같이 식사를 할 수 없어 커피와 빵을 아이에게 주고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돌려보냈다. 우리의 참여와 노력이 오늘의 이 난관을 극복하며 주의 온전하심과 자비하심을 바로 깨달아 알게 하실 것이다. 멀리서 화상으로 예배드린 아이가 감사하다고 하는데, 나야말로 되레 고맙고 또 감사하였다. 누구에게는 말씀이 더욱 고픈 시절이고 누구에게는 더더욱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시절이다. 이때의 경고라. “회칠한 담을 내가 이렇게 허물어서 땅에 넘어뜨리고 그 기초를 드러낼 것이라 담이 무너진즉 너희가 그 가운데에서 망하리니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13:14).” 우리의 허울은 벗겨져야 한다. 헛되고 헛된 것은 신앙이 좋고 나쁘다고 해서 이와 같은 어려움이 비껴가지는 않는다. 어차피 광야는 광야이다. 그러할 때 주의 뜻 안에서 주를 바라며 주를 더욱 의지할 수 있는 것이 복이었다. 나는 어제 주일 날, 엉겁결에 화상으로 같이들 예배를 드리면서 누구를 생각하였고 또한 누구를 돌아보았다. 이래저래 못 오는 친구를 생각하였고, 매주 토요일 성경공부를 오던 친구도 생각하였다. 그렇게나마 같이 말씀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예배의 시간이 이루지기를 소망하고 기도하였다.

 

그러다 문득 또 드는 생각이, 이와 같은 의로움은 모든 다수의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것으로 우리의 것이 된다.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15:15).” 그러한 생각도 마음도 그리고 실천도 모두 주시는 이의 손길에 따른 것이다. 은혜이기 때문이다. 주시는 이의 마음이었고, 능력도 안 되는 사람이니 할 수 있는 정도의 것으로 충분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17-19).” 감히 나 같은 게 다 알 수 없는 일이겠으나 무엇인지, 어떤 마음이고 현상인지를 알겠다. 그리 두시는 내 안의 마음도 그러하였고, 그것으로 하려고 할 때 엉터리 같지만 어찌어찌 더듬거리며 누구의 해설을 읽으며 간신히 간신히 하나씩 하다 보니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그만큼 능력이 안 되고 실력이 없어서 이처럼 더 큰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 능숙하게 잘하는 사람이면 그저 대수롭지 않을 텐데, 나는 여기에서도 성경의 원리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잘해야 잘하는 게 아니었다. 주님의 마음이었고, 이를 선도하시면 묵묵히 그리 따를 때 길을 여신다.

 

아내는 뜬금없이 우리끼리라도 가정에서 말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자고 하였다. 그 말에 이번 주, 아니 정부에서 해도 된다고 할 때 그리하려고 했던 마음이 문득 아픈 아이를 생각하였고, 멀리 있는 아이를 생각하였다. 그런 식이다. 아내는 오늘부터 한 명이 와도 공부방을 열겠다고 하였다. 이런저런 우려와 걱정이 우리를 주저하게 하고 멈칫거리다 주저앉히기 일쑤지만 그러한 마음을 주시는 이가 또한 하게도 하시고 할 수 있게도 하신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에게 허락하신 날 동안 주를 의지하며 주 앞에 바로 설 수 있게 하시는 것도 실은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인함이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도 주만 바랄 수 있었겠구나!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3:8-9).”내가 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다. 정말이지 갑자기 훅, 하고 그런 마음이 들었고, 해보자 하고 덤볐더니 어찌어찌 그리 되어서 올해는 거의 처음으로 아이도 같이 주일예배로 드릴 수 있었다. 총체적 어려움으로 난관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를 통해 또한 주께서 선을 이루어 가신다. 설교 중에 나는 이 비극적이고 슬픈 현실에서도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들어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였다.

 

이는 주께만 있다. “내게 대한 어떤 자의 말에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 하느니라(45:24-25).” 그러한데도 우리의 교만은 어떠한가? 안이하고 나태함은 또 어떠한가? 우리는 고통 중에 주를 바라기보다 욕심을 내고 살 궁리를 하며 하나님께 거역하는 것에 익숙하였다.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106:14-15).” 곧 오늘 우리 영혼이 쇠약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47).” 나는 주께서 이처럼 아둔하고 모자란 사람을 들어서도 도대체 어찌 주의 뜻을 이루어가실까, 사뭇 궁금하기도 하였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4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