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너희가 그 행동과 소행을 볼 때에 그들에 의해 위로를 받고 내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모든 일이 이유 없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스겔 14:23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시편 107:19-20
구원은 개별적이고 일방적이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14:14).” 누구도 누구를 대신할 수 없어, “너희가 그 행동과 소행을 볼 때에 그들에 의해 위로를 받고 내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모든 일이 이유 없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3).” 주가 하신 일을 저만이 알 수 있다. 구원은 죄책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칭의로 구원 받은 것이지 행위로 이뤄진 게 아니다. 곧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나는 화목하게 되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의롭다 하심이지 의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9).” 여전히 죄악 중에 살아야 하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은 중보기도를 하신다. 저의 중보기도는 처음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중 구원을 이루려 하심이다. 이 구분이 명확해야 하는 까닭은 믿음으로 누구나 구원에 이르지만 누구나 그 중보기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저는 이미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의 경우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말씀을 두고 오래 머문다. “인자야 가령 어떤 나라가 불법을 행하여 내게 범죄하므로 내가 손을 그 위에 펴서 그 의지하는 양식을 끊어 기근을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나라에서 끊는다 하자(겔 14:13).” 그러할 때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14).” 저들을 봐서 누구의 생명을 덤으로 건질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닌 것이다. “가령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 다니게 하여 그 땅을 황폐하게 하여 사람이 그 짐승 때문에 능히 다니지 못하게 한다 하자! 비록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만 건지겠고 그 땅은 황폐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5-16).” 나의 공의는 오직 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어서, 그 공의도 그리스도의 의지 나의 의가 아니다. 이 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공의다. 하나님도 이를 강제하실 수 없다. 정리해보면 나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여 의에 이르고, 이를 위해 십자가의 보혈로 하나님의 독생자는 죽으셨다. 이 의로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시는 것이어서, 저가 다시 부활하사 자녀로 삼으신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신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19-20).”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의미가 새삼 다가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는 장래의 형벌이 의미가 없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는 해방되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그러나 여전히 죄악 된 몸을 입고 죄악 된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는 수시로 죄에 물든다. 더럽힘을 당하고 괴롭힘에서 놓여나지 못한다. 그러할 때 하나님은 이제 형벌, 보응의 의미가 아닌 사랑의 훈계, 채찍, 징계로 우리를 붙들어 세우신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이는 엄연하여서 아무도, 그 무엇도 우리를 그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 8:35-36).” 다만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은 우리를 위해 하늘우편 보좌에서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함께 말씀을 나누고 묵상하며 그 안에 담긴 주의 놀라우신 사랑 앞에서 우리는 황송할 따름이다. 오늘 시인의 찬양이 그것이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시 107:15).” 곧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21).”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는 것은, 왜 주의 사랑은 나 같은 죄인을 그처럼 귀히 여기시고 모자람이 없이 돌보시는 것일까?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28-29).” 나는 이처럼 말씀을 따라가면서 말씀으로 말씀이 되어 내 안에 거하심이 송구하고 황송하다. 기어이 저는 우리를 천국의 항구로 인도하신다.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30).” 주를 따라 나는 이제 자식을 위해,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 한 영혼을 위해 주님의 마음으로 기도할 뿐이다. 기도는 주를 바람이고 주를 바람은 내 안에 이는 감사로 인함이며 감사는 날마다 더해져도 모자람이 없는 찬송이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31).” 우리 의롭자 하심을 받은 주의 자녀들에게는 이를 알고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부어주셨다.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43).”
다른 누구에게 내가 한 자도 더할 수 없는 진리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고통은 유익하여서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하면 주께서 말씀을 보내어 우리를 치유하신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19-20).” 이제 이 고통은 우리를 멸망시킬 수 없고 좌절하여 그릇된 길로 가게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우리는 이제 주의 인자하심과 사랑하심을 더 깊이 깨닫고 돌이켜 오직 주만을 바라는,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믿음의 분량에까지 자라가는 것이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8).” 이러한 말씀 앞에서 나의 영혼이 기뻐한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9).” 이 모두는 저절로 그리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나를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계심이었다. 더는 지옥에 떨어지는 형벌은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지만 사는 날이 지옥 같을 수는 있다. 주의 자녀인데 죄에 종노릇하느라, 사는 게 지옥 같다. 남들처럼 안 믿는 저들과 같이 추구하고 바라고 세상을 의지하려고 드니 그 생이 고달플 따름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일갈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갈 3:11).” 우리 힘으로 자녀도 구원할 수 없다.
“가령 내가 그 땅에 전염병을 내려 죽임으로 내 분노를 그 위에 쏟아 사람과 짐승을 거기에서 끊는다 하자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14:19-20).” 저가 아무리 노아고 다니엘이고 욥이라 해도, 당대 의인이라 하심을 받은 대단한 사람들이라 해도, 구원은 하나님께 있나니,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욘 2:9).” 이를 알면 알수록 주 앞에 겸손, 오직 주 앞에 의뢰할 뿐 달리 방도가 없음을 안도하게도 된다. 만일 내가 조금이라도 무엇을 이루어, 그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입는 것이라면 나로서는 나를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런즉 …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려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겔 14:6).” 그 크신 주의 은혜를 알면 알수록 나는 내세울 게 없고 오직 주의 중보기도에 의존하며 주를 더욱 바랄 따름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07:1).” 저는 우리를 속량하사, 모으셨다. 그때에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5).” 주리고 타는 목마름으로 주 앞에 나아오는 것,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6-7).” 주는 인자하심으로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9).” 내 안에 두시는 오늘의 이 사모함을 나는 감지덕지 귀히 여긴다.
곧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