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에스겔 20:44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시편 113:5-9
기껏 구하여 “내가 그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였더니 그들이 모든 높은 산과 모든 무성한 나무를 보고 거기서 제사를 드리고 격노케 하는 제물을 올리며 거기서 또 분향하고 전제를 부어 드린지라(겔 20:28).” 본디 사람은 악하여 선을 추구하지 못한다.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방백들의 모양을 따른다. 그런 우리들을 향해,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려거든 가서 각각 그 우상을 섬기고 이 후에도 그리하려무나 마는 다시는 너희 예물과 너희 우상들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지니라(39).”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외면이다. 저가 숨으시면 우리에게는 근심뿐이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시 30:7).” 은혜를 더해주셔도 이를 받지 못할 때 근심은 금세 우리를 엄습한다. 그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오늘 본문에서 귀하게 다가온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그 땅에 있어서 내 거룩한 산 곧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서 다 나를 섬기리니 거기서 내가 그들을 기쁘게 받을지라 거기서 너희 예물과 너희 천신하는 첫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을 요구하리라(겔 20:40).”
우리로 주의 성산에 머물게 하심이 귀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44).” 만일 나의 소행에 따라 주께서 갚으시고 이를 취하신다면 나는 죽어도 주의 긍휼하심을 바랄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저의 인자하심만이 살 길인 것을, 오늘 아침도 시편을 묵상하며 되새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시 113:5-9).” 그러한 주의 은혜를 구하고 바라게 하는 마음, 이 기도는 성령으로 성령께서 탄식하심으로 대신 간구하시는 것이다. 나의 연약함을 잘 아시는 주께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소식인지. 매번 주일 예배가 끝나고 나면 내 안에 이는 어떤 공허함이 때로는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을 느낀다. 바르게 전한 것인지, 오지 못한 아이는 어쩌나, 왜 그 말씀을 더 자세히 말하지 못했을까? 그 친구에게도 권할 걸 그랬나? 하는 여러 아쉬움과 부족함은 속상함이 되어 나를 쥐고 흔드는 것 같다.
마치 격한 일을 하고 난 뒤 급 피로감에 몸이 까부라지듯 주일 오후에는 이상하게 맥이 풀린다. 나의 이 연약함, 악하고 추한 여전한 몰골을 성령은 잘 아시고 나를 도우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6).” 바울도 일찍이 이러한 번뇌에 사로잡히고는 하였을까? 그래서 저와 같은 말씀을 기술하며 주의 은혜를 더욱 간절히 붙들었던 것은 아닐까? 기도는 이처럼 말씀과 약속을 붙들고 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 아니면 저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간구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하다못해 당산나무 아래에 고개를 조아리던 사람들의 기도와 다를 게 무언가? 내가 잘 되고 자식들이 잘 되어 이 땅에서 소원하는 것을 바라고 구하는 일이야 오히려 타종교인과 저들의 기도가 더 의무적이고 성실하며 간절하지 아니하던가? 그러니 우리의 간구는 뭔가 다르다. 영으로 하는 것으로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성령으로 해야 하시는 것이다. 오늘 말씀도 이를 일깨우신다. “내가 가로되 오호라 주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는 비유로 말하는 자가 아니냐 하나이다 하니라(겔 20:49).” 말씀은 비유다. 비유는 그 확장의 세계가 시공간을 초월한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그 땅에 있어서 내 거룩한 산 곧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서 다 나를 섬기리니 거기서 내가 그들을 기쁘게 받을지라 거기서 너희 예물과 너희 천신하는 첫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을 요구하리라(40).”
주의 약속이 오늘도 나의 삶에서 이루어질 것을 붙들고 하는 게 기도다. 그러므로 말씀을 거절하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게 된다.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수욕을 받으며 경황 중에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나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렘 8:9).” 말씀을 버린 지혜는 사악하여 주위 방백들의 모양을 잘 알아보고 이를 답습하며 따라 간다. 그래서 “너희가 스스로 이르기를 우리가 이방인 곧 열국 족속 같이 되어서 목석을 숭배하리라 하거니와 너희 마음에 품은 것을 결코 이루지 못하리라(겔 20:32).” 가끔은 참 놀랍다. 죄를 바라고 이루는 데는 걸음이 잰걸음인데, 선을 바라고 따르는 데는 왜 그처럼 느리고 더디기만 한지, 악은 늘 내 발 끝에서 머문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마치 발끝을 떠나지 않는 그림자와 같다. 빛을 등지면 어둠은 앞서고, 빛을 마주하면 어둠은 뒤로 물러나는 원리와 같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기도의 방향에는 빛이 있음을 알게 된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빌 1:9-11).”
곧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 이를 바라나 내가 이루려할 때 어김없이 벽에 부딪치고, 그래서 더욱 기도를 배울 필요가 느껴진다. 왜냐하면 분별하여 그리스도의 날까지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바란다면. 나는 나의 연약함으로 더욱 절실하여 주의 은총 아래 거하기를 기도한다. 이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며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표본으로 삼는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저는 엄연하고 지존하신 분이시다.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는 것이 항상 우리 기도의 첫머리다. 사는 이유와 목적이 여기에 있음을 아뢰는 것이다. 그러할 때 주의 “나라이 임하옵시며” 오늘 이 한 날의 일상이 보잘것없으나 주의 나라가 임하시는 것이어야 하는데, 이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는 결과론적인 삶이 되는 것이다. 그 뜻을 때로는 알 수 없으나 하늘에서 이루신 것을 알면 나의 이 땅에서도 이루실 것을 믿는, ‘이루어지이다.’ 함이다. 그러할 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더는 바라고 취하느라 세상 것들과 다를 바 없이 추구하며 살지 않게 하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아, 이 대목에서 번번이 나는 무너지며 주의 긍휼하심 앞에 부복한다. 내 안에 응어리진 상처가 번번이 어떤 형태로든 드러나면서 보복을 취하려 드는 것에 나는 늘 속수무책이다. 그럴 때면 내가 어찌 용서와 사함을 받았는가를 돌이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고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9-13).”
이렇듯 날마다 읊조리는 주기도문이 나의 기도로 온전하여지게 하는데, 성령이 이를 주도하시는 거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나 응답에 대해서는 그 어떤 논쟁도 과하다. 일련의 사태를 보면 그게 종교적인 문제든, 사회적인 문제든, 정치적인 문제든, 사람들은 참 논쟁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삼삼오오 모이면 갑론을박 저마다의 주장을 펴는 일에서 한 발 물러서면 모두가 다 다를 바 없는 죄악 됨을 저들은 과연 인정할까? 신기하지? 주의 일에 사탄의 일도 덩달아서 그림자처럼 붙는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 그런 거 보면 이 땅에서 그림자 없는 존재는 없듯이, 그렇다고 그림자가 싫어 빛을 외면하며 살 수도 없는 일이어서 어둠 속에 갇힐 수도 없고, 그 죄악 됨은 결국 빛이 되는 수밖에 없다! 어쩌면 처음 사람 아담을 꾀었던 뱀의 입에 결론이 있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이내 우리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하나님 같이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알 줄 안다. 곧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곳이 아닐까? 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비록 찰나적이기는 하나 순간적으로 그때마다 영광을 온전히 맛보아 아는? 이처럼 종종 말씀 앞에 있어 말씀과 약속을 붙들며 주를 바랄 때, 내 안에 있는 어떤 빛 그 빛에 동화되어 아주 잠깐씩 환해지는 빛 같다.
이내 “여호와는 모든 나라 위에 높으시며 그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도다(시 113:4).” 그러므로 오늘도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은,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1-2).” 그리하여 이 한 날에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