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너 이름이 더럽고 어지러움이 많은 자여 가까운 자나 먼 자나 다 너를 조롱하리라
에스겔 22:5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시편 115:11
이 모든 일련의 상황이 주의 가르치심이다. 믿는 자의 여정은 내남없이 같다. 이를 알면 알수록 주께 마음을 모은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 그러나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입술만 가깝고 행함으로 다하려 할 때 아이러니하게도 저의 열심이 주의 뜻을 온전치 못하게 하는 것을 본다. 그러니까 자신의 수고로 자신의 의를 삼으려는 것인데, 입으로는 주께 감사하나 삶의 현장에서 자신은 자신의 행위를 중시한다. 그래서 예수님도 바로 배워야 할 것을 강조하신 것 같다.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 6:45).” 주의 가르침은 일상의 다양함에 있고 이를 먼저 말씀하신 성경에 있다. 요즘은 어디를 펴도 다 같은 말씀 같아서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가르친다. 그런데 이를 바로 알지 못하고 스스로 무엇을 도모하려 할 때, “너 이름이 더럽고 어지러움이 많은 자여 가까운 자나 먼 자나 다 너를 조롱하리라(겔 22:5).”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우리의 수고를 꾸짖어 경고하는듯하다. 그러나 말씀은 뚜렷하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시 115:11).” 우리의 길은 복잡하지 않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처럼 명료한 길을 두고 왜 그처럼 길을 헤매는가하면 가증된 세상 것에 눈을 돌리기 때문이다.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를 모르는 저들의 안위와 성공을 부러워한다. 저들처럼 사는 게 부러움이고 꿈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엄연히 ‘하나님께 이끌려 주 앞에 나온 사람들이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6:44).” 보내시지 않으면 올 자가 없다. 오는 그를 주께서는 끝까지 같이 하신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전 1:8).” 이 모두는 주의 책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럴 때 참 놀라운 변화는 내가 얼마나 형편없고 한심하고 죄악 된 모습인가를 통회하는 것이다. 전엔 그래도 어딜 가든 ‘내가 뭐?’ 하는 나름의 자랑이 있었는데, 이제 나는 의원이 필요한 환자이고, 죄인인 것을 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놀라운 것은 이게 다 나를 일컬어 하시는 말씀으로 들린다. 주 앞에 서지 못하면 내 믿음을 나는 신뢰하지 못한다. 말씀 앞에 앉지 않으면 내가 가진 신앙이라는 게 한낱 허상인 것만 같다. 자신을 보는 분별력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 만큼 세상이 또 허망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다들 죽어라 하고 가치부여를 하고 의미를 찾아 쥐고 놓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구원을 줄 수 없고, 구원이 없이는 영생도 없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막 10:17).” 저는 자신의 선입견으로 예수를 부른다. 또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여긴다. 영생을 이 땅의 어떤 가치처럼 자신이 추구할 수 있는 것으로 안다. 그만큼 상식과 지식은 구원을 훼방한다. 세상에 대해 우호적인 자세를 견지하도록 한다. 살만한 세상을 꿈꾸고 그리 가꾸어 가려 노력한다. 상대적으로 그 안에는 세상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있다. 사는 데 따른 두려움, 남들보다 못할까봐 도태될까, 하는 두려움. 이는 역설적이게도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게 한다. 그 지위와 명예를 소중히 여긴다. 주의 사명을 그렇게 혼용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에게 일갈하신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 세상 것과 하나님의 것이 하나가 될 수는 없다. 세상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은 죄악 된 세상에 머무실 수 없다. 다시 말해 육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하나일 수 없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 신학자나 보수주의 신학자나 저들이 추구하는 바가 모두 하나님을 빙자하지만 자신의 유익을 구한다. 실제 저들은 율법이 얼마나 가혹하고 처참한지를 외면하면서 이와 같은 도리에 열광한다. 성경을 끌어다 자신들의 주장에 인용한다. 저마다 주의 이름으로 세상을 논한다. 특히 요즘 교회가 사회의 이슈가 되면서 토론의 단상에 목사들이 불려나가곤 하는데, 이쪽이나 저쪽이나 그 관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느낄 뿐이다. 서로의 합일이 어렵다.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그러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세상을 갈구하는 마음이 그러하다. 행함을 강조할 때 믿음은 희석되고 믿음이 강조될 때 행함은 무력하다. 저들을 가리켜 성경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고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늘 보면 한쪽은 은혜인데 한쪽은 저주다. 한쪽은 축복이라 하는데 한쪽은 형벌이라 한다. 좌중에 설득력 있는 논파가 가장 악질일 때가 많다. 많은 사람이 저의 말에 공감하는데 저의 주장은 성경을 교묘하게 비껴간다. 말씀 같으면서 듣다보면 말씀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몇몇 한국교회에 대한 토론방송을 보다 채널을 돌렸다.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 18:4).”
두려워할 줄 아는 게 복이고, 이 두려움은 자중하게 한다. 진중한 태도를 갖게 한다. 말이 넘치는 시절이다. 교회는 정책이 어긋났다고 하고 정책은 교회의 이기적인 태도를 부각시킨다. 목사가 사회를 탓하면 사회는 교회를 능멸한다. 악순환이다. 그러면서도 서로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할 말이 많은 계절이다. 다른 수 없다. 말씀으로만 말씀에 서서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4-25).” 주를 힘입는 것. 이는 무서운 지옥이 있다는 것과 상대적으로 우리가 들어갈 천국을 바라게 하시고, 죽음을 바로 앎으로 삶을 진지하게 거닐 게 한다. 죽음은 언제나 채비가 안 된 우리의 발목을 잡는 법이고, 느닷없고 난데없어 더는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한다. 무덤에는 회개도 없다. 누가 말하길 ‘7년 전부터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7년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앞서 그것을 바로 인식하고 살라는 소리다. 곧 악한 날을 가까이 두고 사는 것이 지혜이고, 우매한 자는 ‘에이, 설마’ 하면서 악한 날을 멀찍이 두고 산다. 그래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전 7:4).” 남 얘기가 아닌 것이다. 그 무엇보다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 낫다. “종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나으니라(9:17).”
우매하다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알고 사는 일이다. 그 뚜렷한 증상은 지혜가 결핍하여 죽음을 바로보지 못한다. “우매자는 길에 행할 때에도 지혜가 결핍하여 각 사람에게 자기의 우매한 것을 말하느니라(10:3).” 그러니 늘 높은 지위, 어떤 권세, 그 손에 쥔 것을 천년만년 가지고 갈 수 있을 줄 안다. “우매자가 크게 높은 지위를 얻고 부자가 낮은 지위에 앉는도다(6).” 그러니 말은 많고, 아는 게 많아 자신이 아는 전부를 아주 잘 아는 것으로 안다. “우매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신후사를 알게 할 자가 누구이냐 우매자들의 수고는 제각기 곤하게 할 뿐이라 저희는 성읍에 들어갈 줄도 알지 못함이니라(14-15).” 그러니 어찌하면 좋을까? 나는 우매하지 않다 말할 수 없어 두렵다. 그러한 마음이 성경 앞에 앉힌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이라, 이제 나는 나의 마음조차 잡으려하지 않는다. 자식들에 대한 애달픈 마음이나 앞서 내지르는 염려와 근심에 대해서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놓아둔다. 다만 주 앞에서 주의 인자하심만을 바라며,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을 한다. 꾸역꾸역 이렇듯 새벽에 일어나 앉아 이처럼 말씀을 끌어다 그 앞에 나를 앉히는 것처럼!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시 115:9).”
왜?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9).” 저를 의지함은 저가 나의 도움이요 방패이시다. 그러므로 “대소 무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13).” 고로 “여호와께서 너희 곧 너희와 또 너희 자손을 더욱 번창케 하시기를 원하노라(14).” 이에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17).” 그러나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