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이르라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통곡하며 이르기를 슬프다 이 날이여 하라 그 날이 가깝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깝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여러 나라들의 때이리로다
에스겔 30:2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시편 123:1
‘누구는 역경 중에 꿀을 빨고 누구는 독을 빤다.’ 같은 환난 가운데서도 누구는 주의 축복을 입고 누구는 저주를 덮는다. 돈을 벌고 못 벌고, 장사가 잘 되고 못 되고 하는 따위의 말이 아니다. 그것이 독일지 꿀일지, 우리는 모두 자만하여 어깨너머의 일을 마치 잘 아는 사람처럼 떠벌이고는 한다. 이는 주의 섭리다. 주어지는 현상으로는 알 수 없다. 욥이나 다윗, 요나가 당한 역경의 순간을 두고 꿀인지 독인지를 논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래서 성경은 일갈하시길,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전 7:3).” 당장의 이문을 남기고 그것을 꿀이라고 하면 저에게는 독일 수 있다. 그래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4).” 더욱 자중하고, 우매자의 노랫소리보다 지혜자의 책망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겠다.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5).” 야고보의 권면도 그런 의미로 읽힌다.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약 1:10).” 손에 쥐고 있는 것으로 시시덕거릴 게 아니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11).” 인생은 어느 것도 예외가 없다. 누구는 코로나 사태로 쪽박을 찼다. 그런데 누구는 대박이 나서 배달 팀을 따로 꾸릴 정도이다. 그것으로 서로는 꿀을 빤다고 하고 독이 됐다고 하면 안 된다. 어느 것이 꿀물일지, 독물일지 마셔봐야 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런 것 같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12).” 거기서 얼마나 주의 사랑을 받고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까지 하는가. 누가 전화를 하여 기도를 부탁하는데, 모교 대학에 교수임용자리가 나서 ‘마지막으로’ 도전해보려 한다고 했다. 여러 조건이 그동안의 경우와 달라서 될 확률이 높다고 하며 기도를 부탁하니까, 나는 늘 저를 보며 그것이 꿀일지 독일지 궁금할 때가 많다. 앞서 장사가 잘 돼 코로나로 대박을 쳤다는 누구는 그래서 일손이 딸려서 주말에는 자신이 직접 배달을 다니기도 하는데, 일요일 오후에는 더 바쁘다는 소릴 버젓이 한다. 그러니 잘 됐다 해야 할지, 안 됐다 해야 할지. 이번 교수임용을 놓고, 돼도 거리가 너무 멀어 혼자 떨어져 주말부부로 살아야 하는데 그걸 되길 바라야 하는지, 안 되길 바라야 하는지. 둘 다 집사인데, 저들 기도-바람의 기준은 무얼까?
나는 말로다 할 수 없는 말을 입에 머금고만 있었다. 저마다 평탄한 길을 원하고 형통한 삶을 꿀이라 여기는데, 실제는 꿀이 독인 경우가 허다하여, 그것으로 더욱 주를 바라기 어려워 외면하다 슬그머니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숱하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그러니 징계를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뭘 꼭 굳이 교수가 되려고 하는지. 돈이 그렇게 많은데 뭘 더 그렇게 벌려고 주일까지 빼먹으며 저러는지. 그러느라 시간은 쫓기고 삶은 빠듯하여 늘 보면 시간이 없다, 그럴 겨를이 없다 하며 실은 애굽의 등살에 배겨날 수가 없다. “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이르라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통곡하며 이르기를 슬프다 이 날이여 하라 그 날이 가깝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깝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여러 나라들의 때이리로다(겔 30:2).” 애굽의 멸망은 자명할 것이고, 그때에 통곡과 슬픔이 임할 것은 불을 본 듯 빤하다. 그러할 때 우리의 놀라운 지혜는 하나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시 123:1).” 가령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인생에 있어서 역경의 시절이 가장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말하는 경우가 공통이다. “내가 머리를 높이 들면 주께서 젊은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며 내게 주의 놀라움을 다시 나타내시나이다(욥 10:16).” 이를 깨닫고 주를 온전히 바랄 수 있는 것이 최고였던 것이다.
곧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는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내 환난을 내 눈이 보기 때문이니이다(15).” 교만은 늘 머리를 들고, 이를 낮추어 주께서는 수시로 우리 머리에 손을 얹으시는 것이고, 누구 하나 예외는 없다. 저마다 자기 생각을 우선으로 알기 일쑤다. 그렇게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그러니 누구에게는 꿀이고 누구에게는 독이 될 것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33).” 그런 가운데 주의 섭리를 누가 바로 알까?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34).” 나는 목사가 되고 누가 나에게 기도를 부탁할 때, 저의 소원을 같이 구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주의 섭리를 바로 알기란 쉽지가 않아 저에게도 말을 못한다. 그러니 돼도 주의 뜻이고 안 돼도 주의 뜻이니까 너는 하는 만큼 하고 주께 맡기자, 하고 말하였다. 그래도 이 친구는 주를 모시고 사는 삶이라 그 말을 알아들었다. 누구는 그렇게 말하면 너무 빤한 소릴 한다고 여겨 풋, 웃고 만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35).” 뭐라 해도 소용없는 말에 대하여는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36).” 묵묵히 주의 섭리를 따를 뿐이다.
그런 거 보면 주께서 나에게 각별한 마음과 이와 같은 시간을 놓아두셨다. 누구와 통화를 하거나 어떤 소식을 전해 들으면 나는 이것을 삭히느라 연신 주의 이름을 부른다. 전날에는 아이와 아이엄마가 다녀가고, 잠깐이지만 저이의 사정을 두고 주께 여러 번 아뢰게 되었다. 어제는 누구 이야기를 듣고 주의 뜻을 바라였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16:20).” 위하여 구하고 바랄 수 있는 역할이어서 사역자로 사는 일은 각별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고전 16:23-24).” 마음이 그리 오래 머물고 저이를 위해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자리였으니, 때로는 이 마음이 내 마음인지 누구의 마음인지 알 길이 없다. 종종 누구와 말하려 하면 뭘 그렇게 남의 일에 신경을 써! 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소릴 들을 때면 내 안에서도 내 앞가림도 못하고 사는 주제인데 누가 누구를 염려하나 싶어지고는 한다. 그래서도 주의 마음을 구하고 주의 사랑으로 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니면 내가 뭔데? 무슨 수로 저들을 위하여 기도할까? 아내가 공부방으로 오는 아이에 대해 말할 때, 저의 안타까운 사정과 핍절된 가정은 주의 이름으로밖에 구할 길이 없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하고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갈 6:17-18).” 구할 따름이다.
이처럼 빌어주고 함께 구하는 것이 사명이어서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사는 일이다.’ 주의 마음이 아니면 내가 ‘저런 애’ 때문에 왜 신경을 쓰고, ‘저런 사연’을 듣고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안타까워하겠나? 나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을. 그러니 이미 주님의 마음이라. 그 흔적을 지니고 사는 삶이다. 그래서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엡 1:16).” 또한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빌 1:4).” 마치 나에게 주어진 숙명처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골 1:3).” 저의 소식으로 웃고 울고 같이 한숨 지으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었으니,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살전 1:2).” 내 안에 두시는 생각으로 때로는 시달린다. 괜한 일에 마음이 쓰여 혼자 감정이입이 도가 넘지만,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딤전 6:20).” 그래도 권해야 한다.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21).” 충고하고 또 꾸짖고 가르쳐야 하는 일이다. 물론 열에 아홉은 듣기 싫어 할 말을 다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기 일쑤지만 그래서 남은 말을 주 앞에 토한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시 62:8).”
안 그러면 살 수가 없을 것처럼 시달리는 마음이라, 대체 내가 왜 ‘저런’ 것으로 괴로워하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주의 이름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딤후 4:22).” 누구를 위해 빌고 또 빌라고 저를 내 곁에 두시는가. 주가 내게 사명을 맡기셨다. 그리하여 나는 더욱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시 123:1).” 하는 오늘 시편의 기도가 크게 다가온다. 단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이는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2).” 그처럼 간절하다. 저를 위한 게 아니라 저로 인한 나의 시달림이고 볶이는 일이어서 그러하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3).” 그러할 때 오늘 이와 같은 시련은 꿀이었다. 그 가운데서 주의 은혜를 누구보다 더욱 친밀하게 누리고 사는 것이었으니,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 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고후 13:7).”
저들을 위한 나의 기도는 도로 나를 향해 주어지는 기도였다.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살후 1:11-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