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

전봉석 2020. 9. 26. 05:55

 

 

내가 바로로 하여금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게 하였으나 이제는 그가 그 모든 무리와 더불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곧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이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스겔 32:32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시편 125:1

 

 

한 사람이 그 생을 다하는 날은 주의 쓰임에 합한 것이다. 바로도 바로에 맞는 생을 살았고 후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곧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이리로다.” 하는 말씀 앞에서 숙연해진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10:29).” 이 모두를 주관하시는 이가 계시다.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12:27).” 하물며 사람이랴. 저들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4:11).” 이 모두를 지으시고 다스리신 이가 하시는 말씀이다. 모든 것이 귀하나 그 귀함을 귀하게 쓰지 못할 때 더럽히는 것은 주의 이름이라. 바로의 궁극적인 목적은 주의 이름이 온 천하에 드러나게 하는 악역이었다. 악함도 선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묵상하게 된다. 우리는 주의 성전으로 지어져가는 성도들이다. 그때에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125:1).” 저들과 다른 점은 주를 의지하는 자로 산다.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않음 같다.

 

여러 차례 설교원고를 다듬으면서 그때마다 새로운 것에 놀란다. 시편 30편으로 전하였다가 성전 낙성가라는 데서, 성전을 짓지 못한 다윗이 완공을 염두에 두고 시를 지었을까? 솔로몬이 후에 다윗의 시를 부른 것일까? 궁금증이 생기면서 시작되었다. 좀 단순한 접근이지만 30편을 낙성가라면 29편을 착공가로 보면 어떨까? 더욱이 여호와의 소리로 거듭 반복되는 시에서 나는 삼위의 기도 소리를 연상하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시편 120편부터 열다섯 편의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를 묵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어찌 설명하기 어려운데, 나는 종종 사소한 것들이 서로 맞물려 주의 인도하심을 확신하게 하는 것을 본다. 어떤 책을 우연히 읽는데 같은 날 말씀묵상으로 펼친 본문이 그와 연관되는 내용일 때나, 누구의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데 요즘 나의 몸 상태가 어떻다거나 하는 식으로 하나하나 어느 것도 예외적인 게 없이 연관되어 있음을 느낀다. 모두는 주를 바라게 한다. 특히 새벽에 일어나 이처럼 말씀 앞에 앉을 때가 가장 선명하다. 말씀이 말씀으로 이끄시는 것을, 세미한 그 음성을 듣게 하심을 느낀다. 나는 아침에 성경공부로 오는 전도사에게도 그리 자주 강조하였다. 일부러, 억지로라도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내라고이를 위해 다른 것을 서둘거나 미루기도 하라고그 값어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여서 더욱이 주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사는 사명을 받은 자들로서 우리의 특권이 귀하다고 자신하였다.

 

아침저녁 날이 쌀쌀해지면서 아침에 늘 조금 더 자고 싶은 계절이 왔다. 나는 이제 진동으로 알람이 울리면 먼저 몸을 부르르 떨며 일어나 앉힌다. 뭉개면 잠깐이 수십 분이 , 하고 흘러버린다는 것을 잘 안다. 더욱이 요즘은 아침에 이처럼 묵상 글을 쓰면서 담아두고 싶은 전날의 이야기가 말씀에서 새롭게 조명되고는 한다. 가령 어제도 아침 7시에 맞춰 전도사가 왔다. 저의 설교원고로 말씀을 나누는 날이었다. <쉼이 있는 멍에>라는 제목의 말씀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멍에가 주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쉼을 찾기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11:28-30).” 가벼이 듣기에는 너무 무거운 말씀이다. 멍에를 없이 하심이 아니고 자신의 것을 메게 하신다? 나는 순간 아버지 등에 업힌 아이를 연상할 수 있었다. 길을 나서고 걷기는 하나, 아이의 걸음은 아버지 위에 업혀 고단하지 않다. 걷지 않는데도 걷는 아이의 걸음이어서, 멍에를 멨으나 그 멍에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무게로 이해되었다. 흔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하실 때 이를 팔자소관으로 받아 주어진 현실의 파국을 꾹, 참고 순종하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으로 말씀을 나누고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좋았다. 말씀을 삶으로 살고 사는 이야기가 말씀으로 읽히고 들리는 대목은 더욱이 목회자로 부르심을 입은 자의 특권임은 분명하다. 싫든 좋은 우리는 말씀을 가지고 산다. 그 역할은 엄중하지만 가벼운 까닭은 주가 우리의 연약함도 다 맡아주신다는 것이다. 나는 그리 확신하였다.

 

요즘은 자주 느끼는 게 여기까지, 할 수 있을 때 하자는 식으로 자세를 곧추세우고는 한다. 즉 새벽에 이처럼 일어나 앉아 말씀 앞에 나를 놓아두고 글로 쓸 수 있을 때 쓰자. 한 손으로 타이핑을 하느라, 아픈 어깨가 이틀이 멀다 하고 통증을 호소한다. 어제도 거의 종일 설교원고를 다듬고 고쳤더니 영락없이 파스를 덕지덕지 붙여야 했다. 특히 요 며칠 심장 근처에서 경련이 자주 일어나 두려운 마음이 가시지를 않았다. 손을 가져다 대도 파닥파닥 뛰는 게 느껴질 정도로 요동칠 때면 별의 별 생각이 다 들고는 했다. 그러면서 나는 더 주를 바라게 되는데 할 수 있는 날, 하루 더 허락하신 이 날에 하자는 식으로 받아들인다. 누구는 간단한 근육경련이라 하고 누구는 심근경색의 조짐이라 하고, 또 누구는 신장염이나 혈액 공급이 원활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하는, 인터넷 검색을 놓고 혼자 쫄았다. 그렇다고 또 병원엘 가 봐야 이것저것 검사만 잔뜩 하고 내게 돌아오는 답은 대체로 어쩔 수 없다는 소리다. 그러니 몸이나 마음이나 심지어 일상의 살림살이를 놓고 신경을 쓰다보면 한도 끝도 없어서 주께 바라는 게 온통 그런 것이 된다. 종종 드는 생각이 <죽음을 위한 준비>에 관한 것이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1:16-17).” 이 모든 게 주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데서 나는 늘 안도한다. 그럴 수 있는 오늘의 이 믿음이 귀하고 감사하다. 본디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나는 이 말씀을 그리 읽는다.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경우는 엄연한 주의 자녀라. 성도가 아니면 이런 말씀이 귀에 들어오겠나?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6:34).” 이보다 인생을 더 지혜롭게 설명해주는 말씀이 또 있을까?

 

문제는 문제에 사로잡히는 게 문제다. 건강도 그렇고, 어떤 일에 대해서도 너무 그렇게 끌려 다닐 거 없다. 하나님은 사람이 되어 꼴 위에 누우셨고, 사람들의 조롱과 마귀의 시험도 받으셨다. 그렇게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7-8).” 그렇게 죽으러 오신 예수님의 사명을 묵상할 때면 우리가 살아서 사는 날 동안 그 몫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성도의 길인 것을 되새기게 된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1:24).”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특별한 우리들로서 이와 같은 말씀을 수차례 머금고 되새기며 주의 쓰심에 합당한 자로 살기를 바라는 것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게 아니겠나? 나는 종종 저에게 그러므로 뭉그적거리지 말고, 할 수 있는 게 아닌 해야 할 일을 하자고 당부한다. 목사 고시를 앞두고 또 여러 갈등과 회의는 수시로 우리를 공격하듯, ‘이래도 계속 할래?’ 하는 식으로 묻는 것이니, 살아생전 예수님께는 그 누구도 고마워하지 않았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53:3).” 종종 저들이 감사해한 것은 자신들의 병을 고쳐주고, 먹을 것을 주고, 괄시와 천대 받는 것을 위로할 때였다. 그들 필요를 채워주실 때뿐이었다. 호산나, 호산나 하던 이들이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더욱 사랑하셨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2:52).”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로 드리셨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9:14).” 우리로도 그리할 수 있게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종종 나는 나로 사는 게 너무 힘들다. 그런데 이를 주께 내어놓을 때 주의 멍에는 쉼을 주었다. 이렇게 앉아 말씀을 묵상하며 글을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다. 할 수 있을 때 하자. 요즘 나의 가벼운 결심이다. 오늘의 시간은 주의 성전으로 지어져가는 시간이고, 그와 같이 주의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125:1).” 이는 곧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2).” 그러므로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