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이같이 내가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위대함과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나를 알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에스겔 38:23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편 131:1
지난날은 모든 게 꿈결 같다. 고작 며칠 강원도를 다녀온 것이지만 수십 년 만에 반가웠던 울산바위와 설악산 기슭의 공기가 반가웠다. 숙소에 맴돌듯 창가만 바라보는 시간이 더 많았으나 세 시간 걸려 새벽길과 밤길을 운전하여 가고 오는 길이 까마득하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얼굴을 보고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준비하여 같이 먹고 하는 일이 그것으로 감사하였고 그것으로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평소대로 일으켜 앉혀 말씀 앞에 세우시는 것이었으니, 나는 오늘 아침 시편의 말씀이 참으로 좋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주를 바라고 의지하며 더욱 주만 기리는 마음이어서 이는 마치 아이가 의식적으로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을 때 느끼는 평온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2).” 젖 뗀 아이면 뭣 모르고 안겨 있는 게 아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요일 3:1).” 이를 알고 모르고, 누구는 느끼고 누구는 느끼지도 못하는, 세상에게는 도무지 알게 할 수 없는 평온이며 은총이었다. 나의 몇 날은 그러하였고 그러하듯이 어느 훗날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며 주 앞에 회상할 것이다. 때론 안타까워서 몸부림치고, 때론 힘에 겨워 호소하다, 때론 서러워 혼자만이 돌아앉아 있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해도… 그러함에도 모두는 꿈결 같다. 자고 일어나니 벌써 까마득한 옛날 같다. 나와 같은 죄인을 이끌어 가시는 주의 은총이라. 얼마나 반목하고 서러움을 위장하여 살았던가. 나에게 설악산은 그러하고 강원도는 도망쳐 숨고는 하던 지명이다. 혼자 불쑥 찾아들곤 하였던 속초 대포항의 풍경이며 그 냄새가 지금도 역력하다. 느닷없이 치받고 일어나는 외로움에 무턱대로 차를 몰고 왔었던 정동진역의 석별과 내설악의 고요와 태백의 단아함과 한계령의 몸부림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나의 날은 그러했음에 오늘의 은혜라.
마치 엄마의 품에 안긴 젖 뗀 아이처럼 더는 몸부림도 고요도 단아도 석별도 그리워하지 않는다. 한 번은 죽으려고 설악산 안에 어느 호텔을 얻고 혼자 있기 어려워, 같은 강원도지만 꾸불꾸불 산자락 저 끝에 있는 양구의 친구를 불러 밤새 술을 마신 기억도 있다. 다 지난 일이나 회상은 늘 부풀려져 좋았던 기억으로 나를 그저 토닥거릴 따름인데, 이것이 마치 어머니의 손길 같은 마음의 다독거리심이겠다. 나 같이 몰염치한 인간을 그처럼 품어주시었던 시절이 고스란히 담긴 강원도의 정기는 숙소에 앉아 저만치 운무로 가렸다 보여주기를 반복하는 울산바위의 얼굴만 같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7-8).” 이와 같은 주의 은혜를 맛보아 알 자가 몇이나 될까? 숙소에나 머물다 어디 좀 둘러볼까, 하고 차를 몰고 나섰다가 덜컥, 두려움이 엄습하여 도망치듯 도로 숙소로 차를 돌려 돌아오던 나의 시간은 서러움보다 감사이다. 그렇게 엄마 품에 자기 의지로 팔에 힘을 꼭 주고 안긴 젖 뗀 아이의 심정이 그러한 게 아닐까? 그리고 저는 다시금 다짐하는 것이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그럴 수 있다는 장담이 아니라 그러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들린다. 더는 쫓기듯 강원도로 내달리며 살고 싶지 않다.
한 번은 태백 예수원에 며칠 묵었던 적이 있다. 생각 같으면 발길을 그리로 한 번 다녀가 봤으면 하였으나, 그때는 나의 영혼이 그렇듯 절박하게 고요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장 처음 강원도로 도망치듯 달려왔던 것은 고3 초반에 가출을 하고 무작정 떠나온 게 낙성대였다. 그때도 이삼일 배회를 하였던가? 하염없이 모래사장에 앉아 뚫어져라 수평선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는 신기하게도 어느 노인이 무얼 주우러 새벽 산책을 나왔다가 혼자 물끄러미 동해 저 끝만 바라보고 있는 게 이상했던지 자신의 판잣집으로 나를 이끌어 라면을 끓여주었던 기억도 난다. 그때 이미 늙었으니 저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테지만, 그때 그 노인의 눈에는 좀 이상했는지, 무슨 말이든 자꾸 하여 나를 다독거리려 했다. 낌새가 좋지 않았던가, 아마도 내가 자살을 꿈꾸고 있었다고 느꼈던가보다. 오전나절 잠깐 저의 손바닥만 한 처소에서 잠을 자고 점심나절 고집을 부리듯 집을 나설 때, 굳이 버스정류장까지 따라 나와 내 손에 몇 천원을 쥐어주었던 기억도 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숱한 기억의 땅, 강원도에 대하여는 나의 고향이면서 엄마의 품처럼 친근하지만은 않다. “하나님은 그의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아니하시며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이겠느냐(욥 4:18-19).”
그러한 나를 오늘에 이르러는 이처럼 모질게 혼자 두시다가도 그처럼 지난날에 함께 하셨던 은밀하고 내밀한 손길을 기억나게 하시었다. 그리하여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이를 알게 하시기까지 그처럼 묵묵히 나의 엉뚱한 길 위에서도 계시고, 요동치는 마음 한복판에도 계시었다. 때로는 고요하고 차분하게, 때로는 격분하며 온갖 조바심으로 정신이 다 혼미할 정도로. 그곳이 어떠하였던 나의 고향 강원도는 막연하지만 주의 품을 연상케 하였다. 주가 주신 기쁨이라. 나의 방황의 지난날들까지도 주께서는 선으로 바꾸시었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 121:4).” 또한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이를 해치지 못하게 하리로다(사 27:3).” 그리하여 오늘의 나이다. 어느 훗날 천국에서도 그러할 것임을 안다.
오늘의 인생을 돌아보며 송구하고 부끄러움뿐이겠으나 주께 받은 은혜로 충만하였다는 것을 그때에도 나를 품에 안으시는 손길 가운데서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를 멸망시키지 않고 연단하였음이라.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히 12:5-6).” 그때마다 주의 긍휼하심으로 참아주지 않으셨다면 나는 과연 어떠했을까?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7-8).” 그때 노인의 짐작이 맞은 거였을 수도, 또는 예수원 어느 수녀의 염려처럼 슬그머니 산 속에 남았을 수도, 그리 되지 않도록 하신 이가 대신 나로 인하여 징계를 받으셨음이다! 나의 강원도는 그러하고, 이번 추석에는 뜻하지 않은 걸음이었으나 멀찍이 울산바위를 보며 혼자서 여러 회상에 젖고는 하였던 게, 이제는 은혜뿐이다. 감사밖에는 달리 더 남은 게 없을 인생이다. 그렇게 주의 사랑하심과 긍휼하심은 쉼이 없으시었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시 19:5-6).”
“이같이 내가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위대함과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나를 알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겔 38:23).” 말씀이 이루어질 줄을 내가 이제는 아나이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전 15:54).” 그래서 참 좋고 감사하고 귀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오늘 시편의 말씀이 내 것이라. 그러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사모하는 그것이다. 이는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2).” 그러므로 나여,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