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1:23-24 / 그의 놀라운 사랑
20201004 주일
시편 31:19-24
그의 놀라운 사랑
들어가는 말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주의 자녀들이라고 해서 고난이 없지가 않다. 슬픔과 환난은 동일하고 오히려 안 믿는 자들보다 더욱 억울하고 무겁게 여겨질 때도 있다. 주의 자녀이면 주께서 보장하시는 남다른 평안이 있을 터, 오늘 시편은 이를 일깨우신다. 저들과 다를 바 없이 환난을 당하나,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다윗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크신 사랑’으로 이제 오늘 우리들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1. 우리도 환난을 당한다(1-6).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저는 그런 환난의 때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시기 바라였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시 31:1).” 예수님은 우리가 고통당하는 것이 기정사실인 것을 밝히셨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다시 말해 우리는 예수 잘 믿고, 잘되고, 고통 없이 살자는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하고 믿음의 사람들은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환난은 위기가 아니다. 고난이 왔을 때,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시 31:2).” 하고 주를 바라는 의지가 생긴다! 그러니까 세상을 전전긍긍하느라 삶을 허비하지 않고, 오히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것으로 우리는 기뻐할 줄을 안다(롬 5:3-4). 오늘 시편은 찬송하기를,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시 31:3).” 하고 무엇을 붙드는지를 바로 알게 한다. 곧 ‘주의 이름’이었다. “다니엘이 말하여 이르되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능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단 2:20).” 믿음은 이를 알게 하고, 이를 앎으로 믿음은 더욱 굳건하여진다.
어떻게?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시 31:5).” 저가 우리를 속량하셨음을, 다윗은 이를 우리가 알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37:5-6).” 하며 재차 강조하였고, 그의 아들 솔로몬도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 16:3).” 하고 확신하였다. 이것이 우리의 남다른 특징이다. 베드로 사도도 이를 알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9).” 그렇게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시 31:6).”
2. 우리 주님은 우리를 아신다(7-11).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 나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시 31:7-8).” 흔히 자살을 생각할 정도일 때 단 한 사람만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도 그 순간을 이겨낼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강조하셨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이 더 잘 아고 계셨다. 하여 사랑함으로 사랑을 입는 법을 알게 하신다. 가령,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시 31:9).”
이와 같은 마음을 주께 아룀은 주가 나를 사랑하심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곧 그의 사랑의 위대하심을 일깨우셨다. 오늘 시편도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시 31:10).” 하는 허망한 현실 앞에서, “내가 모든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11).” 하고 속엣 얘기를 주께 고할 수 있는 것이다. 원래 정승 집에 개가 죽어도 문상을 오던 사람들이 정작 정승이 죽으면 발길을 끊는 게 세상이다. 그러니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고(118:9),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3. 우리의 외로움은 주께 소망을 두는 장소이다(12-16).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죽은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깨진 그릇과 같으니이다(시 31:12).” 살면서 외로움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왜?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사 42:5-7).” 곧 우리에게 두시는 사명 때문에도 우리를 붙드신다. 이는 실제 혹한 훈련 같다. 사람은 그렇게 선하지 않다.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었으므로 사방이 두려움으로 감싸였나이다 그들이 나를 치려고 함께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시 31:13).” 그러니 어쩔까?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14).” 우리는 ‘그러하여도’ 또는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주님을 의지한다(단 3:18).
심지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어떻게? 감옥에 갇혀 곧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바울과 실라는 기도와 찬송을 하였다(행 16:25).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앞날이 주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시 31:15).” 모두들 앞날을 염려하며 살지만,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결국 그 어떤 것도 우리로 ‘그의 놀라운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시인은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시 31:16).” 이와 같은 믿음을 주신 이가 또한 이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실 것이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4. 우리의 죄로 우리는 주의 은혜를 안다(17-19).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를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악인들을 부끄럽게 하사 스올에서 잠잠하게 하소서(시 31:17).” 어둠이 깊으면 빛이 더 밝고, 죄가 깊으면 은혜가 선명하다.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알면 알수록 주의 은혜가 크다. 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 이를 앎으로 우리는 주께 아뢴다.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이 말 못하는 자 되게 하소서(시 31:18).” 저들은 결코 우리를 이길 수 없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롬 7:13).” 이게 무슨 소린가? 우리의 ‘죄로 심히 죄가 되게 하는 것’은 정작 우리의 선이다! 세상이 주관하는 윤리와 도덕, 가치와 기준의 선으로 우리 안에는 늘 ‘내가 뭐 어때서?’ 하는 자기 선이 있다. 그만큼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사는 사람은 없다. 자신들의 선이 자신의 죄를 두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서도 오늘 우리에게는 ‘환난과 인내’가 요구되는 것이다.
온전히 주 앞에 서는 자는 자신의 죄를 안다.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는 통회와 자복의 심령이 온유하여 간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9:12).” 사람은 본디 자신의 정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죄는 깊다. 그만큼 우리가 아는 주의 노여움은 아는 것보다 두렵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90:11).” 그러므로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31:19).” 곧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만큼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은혜는 크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14).”
5. 그의 사랑은 우리의 견고한 성이다(20-22).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시 31:21).” 어떻게?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는 일이란 다툼뿐이다. 경쟁도 정쟁도 전쟁도 모두 다툼이다. 우리로 이와 같이 쓸모없는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려고,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20).” 자, 여기서 ‘주의 은밀한 곳’은 어딜까?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사 50:8).” 바로 여기, 오늘, 지금, 이 자리, 곧 주의 앞에 나오는 시간이고, 마음이고, 의지이고, 관심이다. 이렇게 행함은 우리의 선이 주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일이다. 그렇게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7-8).”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시 31:21).” 찬송이란, 이를 앎으로 “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22).” 더는 가망이 없을 것 같은 때, 죄 중에 죄악 가운데서 주는 ‘그의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품에 안으시는 것을 확신하는 일이다. 거기가 어디든, 말로 할 수 없이 끔찍하고, 한심하고, 추악한 곳이라 해도 “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신 30:4).” 이것이 ‘그의 놀라운 사랑’이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즉 우리의 어떤 죄보다 그의 놀라운 사랑은 더욱 더 크시다.
나오는 말
1. 여호와를 사랑하라(23)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시 31:23).”
2. 바람으로 강하고 담대하라(24).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24).”
저는 우리를 도우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아무리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이 붉을지라도, 혹은 게달의 장막처럼 검을지라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우리가 통회하고 자복하는 죄의 깊이보다, 넓이보다, 높이보다, 두께보다 ‘그의 놀라운 사랑’ 곧 주의 은혜가 더욱 더 넓고, 깊고, 높으시다. 우리가 상한 심령으로 나올 때,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주를 사랑하자. 강하고 담대하자. 우리가 아무리 “죄인 중에 내가 괴수” 같을지라도, 죄를 괴로워하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로서의 우리들은 ‘그의 놀라운 사랑’ 곧 그리스도의 넘치는 사랑 안에서 영원무궁하도록 우리는 주의 자녀들이다(롬 3:23-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