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를 송축하라

전봉석 2020. 10. 5. 05:54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에 이르러 그 문 벽을 측량하니 이쪽 두께도 여섯 척이요 저쪽 두께도 여섯 척이라 두께가 그와 같으며

에스겔 41:1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편 134:1

 

 

성전을 보이실 때 ‘그가 나를 데리고’ 하는 어절이 41장부터 44장까지 말문을 열고 있어, 주의 이끄심을 본다. 오늘은 성전의 골방들과 지성소를 보이시고(1-11), 서쪽 건물과 성전의 넓이를 알리시고(12-20), 나무 제단과 성전의 문들을 소개하고 있다(21-26). 지성소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고, 각기 붙여 지은 골방들은 삼면을 둘러싸고, 천사들이 새겨진 나무로 덧붙여졌다. 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데 특별히 지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다. 그 거룩한 지성소에는 에스겔도 들어갈 수 없었다. 이처럼 엄위하던 곳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휘장이 위에서부터 찢어짐으로 우리는 자유롭게 들어가게 되었다. 에스겔도 들어갈 수 없던 곳을 이제 우리는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그 주님을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시게 하라! 곧 “내 손이 그와 함께 하여 견고하게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시 89:21).” 이러한 말씀 앞에 앉았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91:15).” 주께서 ‘나를 데리고’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사 43:5).” 그처럼 이뤄 가시는 세계에서,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렘 1:8).” 나를 이끄시는 것이다. 혹시라도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9).” 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어떠하다 해도,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5:20).” 하시는 말씀을 주의 지성소 곁의 골방들을 묵상하며 듣게 된다. 각기 믿음의 사람들이 둘러싸듯 모여 주의 경이로움을 찬양하는 것을 상상한다.

 

특히 모세의 증거를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신 4:31).” 하신 말씀을 상기시킨다. 그는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32).” 오늘에 이르러 나의 나 된 것에 대하여 그 은혜의 풍성하심 앞에 무릎 꿇게 한다.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느냐(33).” 가령 어제는 설교 중에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을 말씀을 통하여 아들과 딸에게 전하였다.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해서, 그러나 우리의 부족했던 날들을 들어, 오늘까지 어떻게 함께 하시고 우리로 이처럼 귀히 여기시는지를.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34).”

 

우리의 그릇되고 죄악 되었던 날들보다 주의 은혜가 더욱 크시다. 나의 죄 된 그 어떤 송구함이나 부끄러움보다 주의 사랑이 더욱 더 너그러우시었다. 다윗도 고백하기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 40:5).” 누구도 주의 사랑과 견줄 수 없고 셀 수도 없는 죄악을 지고도 이처럼 주의 성소에 담대히 나아올 수 있으니 이보다 더 놀라운 사건이 있을까? 그렇게 내가 일어날 때마다 이제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139:17-18).” 곧 이와 같은 말씀은 내게 기이하고 풍성하다. 그럴 수 있는 다른 신은 없다.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옛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들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사 64:4).” 아이들 앞에서 내가 주를 바라고 의지할 수 있는 게 복되었다. 가족들에게 주의 사랑하심과 함께 하심을 고백하고 증거 할 수 있는 게 귀하였다. 이제 내 생에서 다른 것으로 증거 할 게 없다.

 

오직 성경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과연 말씀에 귀를 기울일까? 바로 전달이 되기는 할까?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지만, 나의 번민과 여러 근심과는 무방하게 주의 말씀은 살아 있고, 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것을 이제는 확신한다. 그렇다면 나의 남은 과제는 말씀을 더욱 바르게 알고 온 마음을 다해 준비하며, 가장 솔직하게 증거 하는 것이겠다. 이는 내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은 안으로 삼켜 주께 아뢰고, 주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이 되겠으니, 가령 그렇게 애써 수고하고 공부하는 일에 대하여, 어디 좋은 직업과 직장을 얻어 더더욱 치열한 경쟁과 정쟁에 붙들려 사는 일에 대하여, 그러느라 혹시 말씀을 소홀히 여기는 것과 가까운 사람들을 등한시 여기는 일에 대하여, 나는 이제 나의 말로 훈계하고 교훈하기보다 주의 말씀으로 전하고 주님께 아뢰어야 한다는 것을 알겠다. 아무리 자식이고, 가족들이라 해도 내가 저들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나이 들수록 알겠다.  그 키를 한 뼘도 더 자라게 할 수 없고, 저들의 의지와 노력에 대하여 왈가왈부 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주님은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로 삼으신 이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이와 같은 말씀이 나로 하여금 자식에게 또는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 대하여 안달하지 못하게 한다. 조바심으로 말을 들레지 않게 하신다. 할 말이 많으나 내 소리로 할 때 감정이 앞서고, 내 생각이 주도할 때 저들에게 오히려 상처가 된다. 그러나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감히 그러한 심정으로 아이를 대하고, 한 영혼을 위하고, 누구의 일을 마음에 담아 살 수만 있다면.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주의 자녀로 산다는 일이 그러하였다. 더욱 주를 바라고 그의 의에 간절하게 한다.

 

그러니 아무리 세상이 어쩐다 하여,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결국 저가 쏘는 것은 고작 죽음이었다. 이를 무기로 위협하고 오늘도 우리를 억압하려 든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함을 이미 얻은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 그러므로 이와 같이 말씀으로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고, 나의 공연한 훈계나 교훈을 삼갈 수 있다면 얼마나 의연하고 온유할 수 있을까? 하고 드는 생각에서 새삼 감사하였다. 설교 중에 하는 말이라, 말씀으로 주께서 주의 영으로 감동하여 주실 것을 바람이었으니, 나 같은 죄인이 복이 참 많다. 그래서 그런가, 오늘 아침에도 같이 말씀을 나누는 전도사가 추석명절 끝물이라 몸살기운이 있어 못 온다고 하였으나 이처럼 평소대로 움직일 수 있게 하시는 것이 놀라웠다. 오늘 아침에도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를 따라 나에게 두시는 날의 의미를 되새기며 묵상한다.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34:1).” 이처럼 주 앞에 담대히 나아와 그의 성전에 서는 것이 복되다. 뿐만 아니라,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2).” 그것이 나의 남은 날의 기적이다. 그렇게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