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전봉석 2020. 10. 6. 05:51

 

 

그가 이같이 그 사방을 측량하니 그 사방 담 안 마당의 길이가 오백 척이며 너비가 오백 척이라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

에스겔 42:20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시편 135:6

 

 

오늘은 거룩한 방으로 이끄신다. 거룩은 ‘분리’라는 뜻을 간직하는 의미이다. 세속적인 것과의 분리다. 이는 곧 우리 자신이며, 각각의 삶으로 인격과 성품, 말과 행실을 구별한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롬 3:10). 들어 앉아 나의 날은 분리된 삶 같다. 종종 누구와 통화를 하고, 누가 다녀가고는 하지만 그 만남도 구분된 듯하다. 전에 그처럼 자주 만나고 몰려다니던 무리와는 구획이 나뉘었다. 더는 대화가 통하지 않고 관심도 다르다. 사는 모양이 달라진지는 오래다. 어제는 시편 32편 본문을 가지고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면서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1).” 내가 얼마나 구분 없이 함부로 살았던가, 돌아보면 이와 같은 말씀이 은혜 중에 은혜이다. 죄는 끔찍하다. 그 값은 육신의 죽음이면서 영원한 죽음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그렇게 나는 죄인이었고 그런 나를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셨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3-24).”

 

믿음은 그래서 거룩을 지키는 칸막이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이를 믿음으로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로 살 수가 없다. 가을이 되고 누가 그립고, 누가 사무쳐 보고 싶다가도 저들이 여전히 ‘거기에’ 머무는 것을 보고 나는 이제 멈칫 한다. 그러면서 내가 얼마나 죄인이고, 그와 같은 죄 사함을 받은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은혜의 무게는 나의 죄의 무게이다. 그러할 때 기도는 나온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시 32:6).” 곧 기도는 막연한 소원이 아니다. 자신에게 더하신 것을 깨달음으로 죄인인 것을 자복하고 구원의 손길을 바라는 마음으로, 매순간이 직고다. 그러나 그릇된 기도는 화로 돌아온다.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총명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총명이고 총명으로 기도하고 주를 경외한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 10:29).”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나니와 삽비라 부부처럼, 저들은 하지 않는 게 나을 뻔하였고(행 5:1-11), 돈으로 그 성령을 값 주고 사려던 마술사 시몬도 그 끔찍한 기도의 모형이다(8:18-22). 우리의 기도는 그 바람이 성령을 모욕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심지어 성령에게 대항하는 겨우도 있다. 솔로몬이 죽고 여로보암이 왕이 되었을 때, 저는 자신 뿐 아니라 백성들까지 주의 전에 올라가 예배드리는 길을 막았다(왕상 12:26-33). 저의 그릇된 기도는 저뿐만 아니라 남까지도 죽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나 자신에게 느껴지는 역겨움을 회개한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이 없을 때, 성령을 거스르는 일에 마음이 기울기도 하였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모처럼 친구와 통화하며 누구의 소식을 듣고, 저들의 사는 이야기를 듣다 길게 한숨을 쉬게 된 일은, 사는 데 따른 아픔이 있고 남모를 사연이 있어 그것으로도 회개할 줄 모른다. 회개가 없다면 끔찍하다. 시편 32편은 그래서 회개가 죄를 덮고 우리로 의롭다 하심을 더하신다는 것을 일을 상기시킨다. 성경 어디를 펴도 같은 내용이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4).”

 

주께 돌이킬 때 예전에 즐기던 것은 배설물일 뿐이다.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겔 18:21).” 그런데 아무리 뭐라 일러줘도 그저 당장의 현실에 급급하여 그와 같은 어려움의 의도를 깨닫지 못한다. 주의 총명이 가려진 것이다. ‘다 그렇지 뭐!’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만다. 아, 그러니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2).” 회개는 나를 비운다. 그 속에 간사함을 견딜 수 없다. 안 믿는 자는 차치하고 믿는 성도가 회개하지 않으면 스스로 고달플 따름이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3).” 전에는 대수롭지 않던 나의 죄가 이제 더는 아무렇지 않을 수 없다. 주의 거룩하심 앞에 서면 설수록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딤전 4:2).” 될까봐 두렵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는 안 믿는 이들이 알 수 없는 고통도 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롬 9:1).”

 

다들 괜찮은 것 같고, 그럼에도 잘들 사는 것 같으나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시 38:7-8).” 이와 같이 신음하며 호소하는 영혼을 주께서는 선히 여기신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51:17).”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총명을 가진 성도는 스스로의 죄를 자복하고 불쌍히 여김을 구한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회개는 그 어떤 것보다 값진 선물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쓰나 그 영혼은 회생케 하신다. 시편 32편을 다시 보면,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4).” 다른 곳에서도 이를 복이라고 하였다.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을 피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94:12-13).” 그러니까 주께 징벌을 받은 게 복이었다. 이로써 교훈을 얻었으니, 평안을 더하심을 이제는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므로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119:71).”

 

곧 주의 참 사랑, 그 하나님의 은혜는 단단한 껍질 속에 있는 값진 보석 같다. 그렇게 우리의 회개는 우리의 단단한 죄의 껍질을 깨는 은혜였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를 알면 알수록 그리 할 수 있도록 함께 하시는 주의 성령의 도우심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므로 더는 죄를 숨기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32:5).” 주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돌이켜야 하는 자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였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어떠한 기적도 완악한 마음을 녹일 수 없다. “모세와 아론이 이 모든 기적을 바로 앞에서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나라에서 보내지 아니하였더라(출 11:10).”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죄에서 구원할 수 없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그러므로 ‘우리는 주를 만날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주어지는 외로움 또는 당면한 어려움이 주를 바랄 수 있는 기회일 따름이다. 좋을 땐 어쩜 그리도 뻔뻔하게 주를 찾지 않는지!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시 32:6).” 영영 그 기회를 잃을 수도 있다.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렘 8:20).” 그러니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2:17).” 그때는 아무리 회개하고 자복한들 ‘무덤에서의 회개는 의미를 잃었다.’ 살아서 우리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주의 구원을 찬송한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시 32:7).” 곧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8).” 하시는 주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구분된 골방에서의 거룩한 사모함이다. 그렇게 ‘회개할 수 있을 때 회개하는 게 지혜이다.’ 시편의 충고는 이어지고 있었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9).”

 

우리의 완고한 고집과 아집은 우리로 그 삶이 고달프게 할 뿐이다. 어제도 그 친구와의 대화에서 여전히 그러고 있는 저의 기진한 상태에 대해 안타까웠다. 오늘 날, 코로나 사태로 인해 저는 이제 교회와도 멀어졌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행 28:27-28).” 두렵고 가슴 저린 말씀이다. 그렇듯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저는 말씀의 충고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시 32:10).” 차마 저와 다른 세계를 상상하며 주의 인자하심 가운데 사는 오늘의 나를 보여줄 수 있다면. 그러나 이상하게 들으려 하지 않아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다만 말씀은 나로 주 앞에 세운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11).” 회개는 주께 마음을 두고 정직한 삶을 소망하게 한다. 거룩의 방은 주의 은혜의 보좌 곁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이처럼 거룩은 구분이다. 뭔가 다른 것이다. 오늘 아침, 시편의 말씀도 우리의 찬송이 정당함을 알게 한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시 135:1).” 곧 “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2-3).” 아무나 이와 같은 노래에 귀 기울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