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너희는 제비 뽑아 땅을 나누어 기업을 삼을 때에 한 구역을 거룩한 땅으로 삼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지니 그 장은 이만 오천 척 이요 광은 일만 척이라 그 구역 안 전부가 거룩하리라
에스겔 45:1
여호와께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지라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시편 138:8
오늘 에스겔서에서 세 가지 의미를 붙든다. 하나는 ‘맡기신 것’에 대하여, 가령 그 땅의 크고 작고, 위치한 곳의 유불리를 떠나, 이는 잠시 나누어 주신 것이고 맡기신 것임을. “너희는 제비 뽑아 땅을 나누어 기업을 삼을 때에 한 구역을 거룩한 땅으로 삼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지니 그 장은 이만 오천 척 이요 광은 일만 척이라 그 구역 안 전부가 거룩하리라(겔 45:1).” 그리고 하나는 ‘통치자’의 본분에 대하여, “왕은 본분대로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정한 절기에 드릴지니 이스라엘 족속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 속죄제와 소제와 번제와 감사제물을 갖출지니라(17).” 모든 관계에서 ‘나’는 어떠하든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지배하는 위치에 선다. 선생으로, 목사로, 또는 사물을 소유하고 사용하는 입장에서 그 본분이 있음을 알게 한다. 나머지 하나는 정결에 대한 것으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정월 초하룻날에 흠없는 수송아지 하나를 취하여 성소를 정결케 하되(18).” 이는 곧 예배를 위함이다. 그저 존재의 의미가 아니라 그 주체, 주인의 쓰임에 합당한 자로서의 위치와 용도에서 깨끗하고 정결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 이후 감기 환자가 현격하게 줄었다고 한다. 이는 평소 손 씻기와 마스크 착용, 서로 간의 거리두기가 유효한 것이다.
종일 설교원고를 다듬었다. 한 주간 내내 하는 일이다. 맡기신 것으로 내가 딛고 사는 땅이다. 크고 작고, 유불리와 상관없는 책임의 문제다. 오늘 본문에서의 첫 번째 묵상과 연관 있다. 다음은 정결에 관하여 한 주간 어떤 책을 보느냐, 누구와 어떤 대화를 주로 나누느냐, 무엇에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 말씀의 너비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가 달라지는 것 같다. 정결의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의 일이다. 다음은 통치, 곧 역할에 관한 것인데 이는 책임과 의무의 입장에서 나의 신분이 정결을 바탕으로 주신 땅, 맡기신 날의 책무를 다하는 것이 되겠다. 하여튼 설교원고를 다듬으며 원론적인 죄와 회개의 문제에서 실제적인 의미로 파악할 수 있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스스로가 치를 떨었다. 누구는 그렇다는 게 아니라 전부, 모두가 그렇다는 것에서 두려움마저 들었다. 그러할 때 죄의 문제는 회개로밖에 접근할 수 없다.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용서를 비는 것, 곧 회개로 이뤄질 일인데 이게 그러니까 아무나 그러한가? 생각보다 우리의 기도는 가증하고 참담하다. 새삼 느끼고 인정하게 되었다.
바라고 구하는 게 세상 사람들의 기원과 다를 게 무언가? 원하는 것을 비는 게 기도가 아니었다. ‘너희는 먼저’ 하고 그 우선순위를 분명히 가르치신 이유를 알겠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그러니까 ‘먼저’가 분명하지 않으면 모든 게 흐트러지기 십상이다. 하루 일상도 나는 정해진 시간에 따라 움직이려고 하는데 이는 그래서이다. 오늘이 공휴일이면 ‘뭐하지?’ 하는 막연함을 없앤다. 하던 걸 하면 되고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 언제부턴가 이와 같이 규칙적인 생활이 주는 유익을 잃고 싶지 않다. ‘당신은 내일 뭐해?’ 하고 아내가 물을 때, ‘나는 늘 정상근무야!’ 하고 답하고는 피식, 웃었다. 내게 맡기신 땅, 그 구역은 크기나 유불리에 의해 좋고 나쁜 게 아니다. 옆 사무실 누가 ‘내일도 나오세요?’ 하고 물을 때, ‘저는 늘, 나옵니다.’ 하고 답하였다. 공휴일인데 어쩌고 말하자, 집에 있으면 자꾸 늘어져서요! 하고도 말했다. 말 그대로, 뭐하지? 할 때 유불리에 따라 움직이고 하루의 정도에 따라 행하려 드는 경향이 우리 안에는 있다. 이는 통치의 문제로 내 것이라 여기면 안 된다.
온유한 자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의미를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온유하다는 의미를 묵묵히 주어진 일에 그 책무를 다하는 자세로 이해한다. 기업은 맡기심이다. 물론 내가 이루어가는 일인데, 땅을 그리 받았다는 것은 오늘 나의 행동반경을 의미한다. 이처럼 운신할 수 있는 몸의 건강과 지능과 해야 할 일과 맡은 바 그 모든 책무를 의미한다. 곧 이와 같은 통치의 개념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의 문제다. 그러할 때 기도는 요구나 원하는 것을 구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그의 의중을 ‘먼저’ 바라는 것, 이를 알게 하심으로 나머지 나의 소원은 모두 그 안에 포함된다. 그래서 몇몇 생각할 사례를 들었는데, 나는 늘 히스기야의 기도와 그 응답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저는 죽을병에 걸려 살고자 했고, 살려달라는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의를 토대로 구하였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왕하 20:3).” 그렇게 하여 15년의 삶이 더 연장되기는 하였으나… 나는 저의 덤으로 주어진 생이 복되다고 할 수 없다. 후에 저의 처신도 그러했고 저가 그때 낳은 므낫세의 행적도 그러하다. 또는 아나니와 삽비라의 가증한 기도(기원)에 대해서도 소름이 돋는다(행 5:1-11). 마술사 시몬은 돈으로 성령의 역사를 사려(기원) 했다(8:18-22).
저들의 기도, 기원이 잘못된 것임을 확실히 하고 싶었다. 즉 기도해야 한다고 해서 우리의 기도가 모두 기도다운 것은 아니다. 여전히 죄에 뿌리를 두고 사는 이생에서는 성령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가 아니면 나의 모든 기도는 다 헛되고 가증하며, 더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기도는 단지 입으로만 읊조리고 마음으로만 원하는 것(기원)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나 생활반경을 이루는(참여)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추악한 기도의 사례로 나는 여로보암 왕의 것을 꼽았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예배하러 갔다가 자신을 버릴까하여, 그 길목에 인위적으로 산당을 지었다(왕상 12:26-33).’ 그러니 다를 보면 그 나름은 선한 의도가 있지 않았겠나? 히스기야도 좀 더 주의 일을 능률적으로 하고자 했던 것일 테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교회를 좇아 선한 일에 참여하려는 데 있어, 비록 아까운 마음에 자기 것들을 조금 챙기기는 했으나 나름 잘하려고 했던 것일 테고, 마술사 시몬도 성령의 역사로 본래 자신의 재능을 더해 더 나은 쓰임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것일 테고, 그렇게 여로보암도 그 마음에 어쨌든 굳이 유다 땅 예루살렘 성전에까지 갈 게 아니라 보다 능률적으로 가까운 데 산당을 두어 거기에서 예배하면 될 것이라 여겼을 테고….
그러니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가증한가?! 다들 저마다의 선을 이루기 위한 것이겠으나 과연 그럴까? 그 속은 정말 멀쩡할까? 여기서 ‘먼저’가 분명하지 않으면 나머지 것들을 우리는 통제할 능력이 없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다시 말해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이미 죽었던 나를 살려 살게 하시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의 생이다. 가령 모처럼 아이와 통화를 했다. 요즘은 어떤지, 공부는 잘되고 있는지, 아이의 근황은 저가 매일 적어 올리는 블러그 묵상글을 보고 대충 파악은 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나는 아이에게 분명히 하였다. 오늘 우리에게 있는 땅의 위치나 크기의 유불리를 떠나 이는 모두 맡기신 이의 선하심에 의한 것이다. 그럼 정결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기준으로 선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여자 친구를 사귈 때도, 공부를 하며 목표를 세울 때도, 어디에서 무얼 하든지 우리의 ‘먼저’가 분명하지 않으면 나머지가 뒤섞여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금세 잃게 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단순한 삶을 권하고, 이는 규칙적인 생활에서 통치가 가능하다. 통제되지 않는 하루는 쑥대밭이 되기 십상이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시 32:6).” 그렇게 시편 본문의 말씀을 설교원고로 작성하는 일은 나의 일상이 되었다. 나에게 두신 땅이고 기업이다.
한 번에 저절로 되는 규칙은 없다. 내가 이처럼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을 고수하려 애쓰는 것은 나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기 때문이다. 아니면 언제 또 아무렇게나 흩어져 멋대로 굴지, 나는 나를 장담할 수 없다. 아니, 뻔하다. 내가 아는 나는 늘 죄인이다. 원론적인 의미가 아닌 실제로 나의 모든 생각과 기도와 묵상과 선한 말까지도 다 죄이다. 주님, 하고 나는 기도하면 늘 먼저 드는 표현이 그래서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달라'고 구한다. '긍휼을 바라고 주의 은총을 원한다.'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하루, 일과, 생애가 온통 죄로 범벅이 될 게 분명하다. 오죽하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도 경고하셨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즉 내가 기도해서 더 나은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주께서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 이로써 오늘도 나의 하루는 허용되는 것이다. 결국 나의 잘못을 뉘우치는 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
나는 요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간다’는 것에 자주 묵상을 기울인다. 그러할 때, 오늘 시편의 기도처럼,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하셨나이다(시 138:3).” 그렇게 '나로 기도하게 하시는 것은 주님이 날 위해 기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늘 잊지 않게 하시는 일이다.' 고로 “저희가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