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아침마다 일 년 되고 흠 없는 어린 양 하나로 번제를 갖추어 나 여호와께 드리고
에스겔 46:13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시편 139:6
아주 가끔은 어떤 불안이 엄습하여 나의 목을 조이는 것 같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니고, 한 10분 남짓 견디면 될 일인데 심한 공포는 순간 이를 못 견디게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심히 다급하여 주를 찾는다. 휴일이라 오후께 모처럼 마트에 갔다. 가기 전부터 여러 번 망설이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아내의 성화에 그리 하였다.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하였고 주차장에 진입을 했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장도 보았다. 사람들은 많은 편이었는데 그런대로 견딜만은 하였다. 서둘러 계산을 끝내고 나오려는데 출구에 차들이 꽉 차 밀려 있었다. 새로 도입한 주차정산 시스템으로 출차가 그만큼씩 지연되는데다 한꺼번에 밀린 탓이었다. 순간 식은땀이 나고 두려운 공포가 몰려왔다. 도로 주차를 하고 나는 도망치듯 밖으로 빠져나왔다. 하필 그곳은 2층 주차장으로, 터널을 통과하듯 그 안에서 저처럼 기다려야 한다는 게 훅, 공포감으로 끼친 것이다. 얼마쯤 기다려도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저녁 시간이라 사람들이 몰리고 차들이 분비기 시작하였다. 나는 밖을 서성거리며, 그러고 있는 자신이 짜증스럽기도 하고 답답하였다. 마침 딸애가 서울에서 오는 길이라고 했다. 어쩔까, 어쩔까, 한참을 그러다 차 키를 아내에게 주고 나는 택시를 타고 도망치듯 집으로 왔다. 택시를 타는 일도 여의치 않아 한참을 망설이다 어쩔 수 없었다. 차 안에서의 불안은 말할 것도 없다. 눈을 꼭 감고 있으려니 연거푸 먹은 진정제 때문인지, 과속운전으로 인한 것인지, 속은 울렁거리고 식은땀은 연신 흘렀다. 열어둔 창으로 매서운 바람이 들어와 한기를 느끼면서도 말이다. 순간 눈을 떴을 때 집 앞이었고, 집에 도착들어서자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금세 쓰러져 기진하였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9-10).” 돌아보면 참 아무 것도 아닌데, 그저 몇 분 잘 견디고 그러면 될 일일 텐데. 밀려드는 미안함과 한심함은 모두 내 몫이다. 나는 할 말이 없었고 그런 나를 아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고 아내와 딸은 쯧쯧, 혀를 차며 안타까워하는 얼굴이었다. '나 혼자 새벽 날개 치며 바다 끝에 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때에도 주가 곁에 계셨다. 이런 지식이 내게는 기이하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6).” 오늘 에스겔서의 말씀은 날마다 주를 바람으로 드려져야 하는 삶을 묵상하게 한다. “아침마다 일 년 되고 흠 없는 어린 양 하나로 번제를 갖추어 나 여호와께 드리고(겔 46:13).” 이는 어떤 날 특정하여 주를 바람이 아니라, 매일 매순간 드려져야 하는 일이다. 아니면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 시편의 말씀이 이를 뒷받침하시는 것 같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8).” 그러니 “아침마다 일 년 되고 흠 없는 어린 양 하나로 번제를 갖추어 나 여호와께 드리고 또 아침마다 그것과 함께 드릴 소제를 갖추되 곧 밀가루 에바 육분지 일과 기름 힌 삼분지 일을 섞을 것이니 이는 영원한 규례를 삼아 항상 나 여호와께 드릴 소제라(겔 46:13-14).”
이것이 곧 살아있는 것이다.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8).” 은혜의 보좌에 앉으신 이 앞으로 날마다 나아가는 길이다.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4:2-3).” 거기에 무지개가 있다. 은혜 언약의 표징이다. 절대 나를 버리지 않겠고, 멸하지 않으실 것임을 예표한다.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겔 1:28).” 날마다 펼쳐지는 내 마음 속의 무지개가 놀랍다. 이런 일을 겪을 때면 모두에게 어이없고 미안한 일이지만, 그러니 나의 나 된 것에 대하여 어쩔 것인가? 그것으로 주를 바람이다. 더욱 더 주 앞에 드려지는, 가양각색의 날들이다. 무지개처럼 내 삶에 어느 순간 펼쳐지는 영속적인 은혜의 언약이 숨겨져 있다. 이는 주가 보시고 주께서 기억하심이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창 9:16).” 한 사람의 인생은 그처럼 무지개처럼 다채로운 날들이다. 늘 같은 일상의 반복인 듯 하지만 구름 사이로 번지는 형체는 각각의 형형색색이다. 어쩔 땐 희미하고 어쩔 땐 선명하며, 어쩔 때 파랗고 어쩔 땐 빨갛다. 뿌연 날도 있고 그 뚜렷함에 눈이 부신 날도 있다. 이를 시인은 주의 능하신 행적이라 표현하였다.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의 곧 주의 의만 진술하겠나이다(시 71:16).”
일련의 상황과 내 안의 감정을 어찌 다 드러낼 수는 없지만, 그래서 누구는 그저 병적인 일로 치부하여 아픈 거야, 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유일한 길은 은혜이다. 은혜로 받는지 우연으로 받는지, 그때는 그랬고 나는 죽을 것 같은 공포에 쓸려 아수라장 같은 지옥을 경험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주의 은혜는 어김없이 나의 손을 붙들고 계셨다는 것. 내 안에 거듭 주를 찾는 마음이 다급하여 다급할수록 예수의 기도는 향기를 더하였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계 8:3-4).” 비록 나의 기도는 미천하여,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하는 말밖에 아뢸 게 없었지만 성자께서 기도를 통하여 분향하시는 시간이었다(출 3:1-7). 곧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눅 1:10-11).” 그럴 때마다 느끼는 자괴감이나 나쁜 생각들은 모두 사라지고 주의 향단에 나는 올려진다. 무지개는 그렇듯 구름 사이에 있다. 죄가 흩어지며 빛을 받아 빛을 내는 색깔이 다채롭다. 추하고 더러운 마음과 생각이 어느새 형형색색 무지개 빛깔로 빛난다. 그 색깔은 기도에 따라 선명하거나 옅으나, 나는 비로소 은혜를 깨닫는다.
주의 예복에 여러 장신구가 달리신듯하다. “그들의 지을 옷은 이러하니 곧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띠라 그들이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아론으로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할지며 그들의 쓸 것은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이니라(출 29:4-5).” 저는 나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5).” 주의 엄위하신 공의가 허리띠로 둘렸다.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셨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건물 밖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을 때도 주는 나와 함께 계셨다. 비온 뒤 빛나는 무지개의 선명함은 주의 은혜를 구하는 마음으로 비례한다. 이 아침 구름 저편의 찬란한 무지개를 보는 듯하다. 어제 저녁의 일이 까마득한 일 같다. 언제쯤에도 오늘 이 이야기는 아련하나 선명하게 주의 은혜를 찬양하며 보여줄 것이다. 주께서 공의로 띠 띠우시고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신, 나의 날들은 그렇게 여러 색깔 무지개로 거듭하였고, 안이할 때쯤 그렇게 흐릿하던 구름과 구름 사이에서 나를 붙들어 세워 무지개를 올려다보게 하신다. 이 은혜의 언약은 연속적이다. 주의 살아계심이 내 곁에서 내 안에서 여전하심을 과시하는 빛깔들이 찬란하다. 무지개가 그렇듯 구름고 구름 사이에 있듯이 때로는 어떤 어려움이 또는 공포가 나를 엄습할 때, 나의 마음이 비로소 그리스도의 마음 안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 빛은 희미한데 영롱하고, 흐릿한데 어김없다. 비 온 뒤 더욱 선명하여서 주의 약속을 기억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오늘 아침, 이처럼 어제의 소소한 사태를 통해 주의 은혜의 보좌, 영광의 자리에서 영원한 약속을 표징을 묵상하게 하신다. 그 앞에 드려지는 제단이었다. “이와 같이 아침마다 그 어린 양과 밀가루와 기름을 갖추어 항상 드리는 번제를 삼을지니라(겔 46:15).” 그렇게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시 139:1).” 오늘 아침도 나는 이 기이한 말씀으로 제단을 쌓고, 그 앞에서 드려지는 나의 입술로 고백을 올린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2-4).” 그러므로 지금은 종종 희미하나 어느 먼 훗날 구름이 다 걷히고 난 뒤에는 청명한 하늘에서 더욱 선명한 무지개 빛깔의 주님의 형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