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저희는 나의 걸음을 밀치려 하나이다

전봉석 2020. 10. 11. 06:04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에스겔 47:1

 

여호와여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나를 보전하사 강포한 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저희는 나의 걸음을 밀치려 하나이다

시편 140:4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온다. 이 물은 점점 차올라 에스겔의 무릎 높이까지 흐르다 사람이 건너지 못할 만큼 가득하게 된다(3-5). 우리의 은혜는 소멸되지 않고 다시 살아야 한다.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계 22:1-2).” 이는 반드시 성전 문지방 밑에서 흘렀다(겔 47:1). 성전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은혜의 보좌가 계신 곳이다. 그 은혜의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5-7).” 그러니 오늘도 여전히 나를 대적하여 넘어뜨려는 무리 가운데서 나를 지키신다. “여호와여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나를 보전하사 강포한 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저희는 나의 걸음을 밀치려 하나이다(시 140:4).”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그런데 나의 여전한 죄성으로 나는 번번이 또 넘어지기 일쑤다. 성령으로 말하고, 성령으로 살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사다.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39).” 아침에 이처럼 말씀을 묵상하며 깊은 생수에 적셔지는가 하다가도 한나절이 되기 전에 내 안에 고질적인 분노와 억눌린 감정은 서러움으로 또는 짜증과 긴 침묵으로 나를 침잠하게 한다. 그러니 내가 나를 어찌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모두 교만하고 헛될 따름이다. 나는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분간하지 못하는 청맹과니다. 눈 뜬 장님으로 사는 것이다. 내가 나를 어찌하면 좋을까?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 5:17).” 이처럼 사망이 나의 속에서 왕 노릇할 때 ‘더욱 은혜와 선물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로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잠겨야 한다. 얼마다 지나야 내 배에서도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까? 내 배 안에는 온갖 악독이 가득할 뿐이다. 서러움과 응어리진 마음으로 득시글거린다. 순간 욱, 하고 올라올 때면 주체할 수 없는 저주의 말과 생각이 넘쳐나는 것이다. 가만 보면 다들 화가 가득하다.

 

주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면 우리의 소원은 헛되다. “가련하고 빈핍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사 41:17).” 가련하고 빈핍하다. 오늘의 우리 영혼이 그러하다. 누구에 대한 소리가 아니라 나 자신이 그렇다. 우리 사회가 그렇고, 다들 서로를 탓하며 원망한다. 그러할 때에, “내가 자산에 강을 열며 골짜기 가운데 샘이 나게 하며 광야로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으로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 내가 광야에는 백향목과 싯딤나무와 화석류와 들 감람나무를 심고 사막에는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을 함께 두리니 무리가 그것을 보고 여호와의 손이 지은 바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가 창조한 바인줄 알며 헤아리며 깨달으리라(18-20).” 어제는 이 말씀을 여러 번 되뇌었고, 붓으로 쓰며 그 의미를 묵상하였다. 나의 불가능한 것에서 곧 마른 땅으로 샘의 근원이 되게 하실 것을 믿는다. 쓸모없이 버려질 존재인데 나를 흔들어 주의 성전에 기거하게 하시고, 말씀으로 잠기게 하심으로 내 안에서 주의 성령이 흘러넘치기를. “저희가 주의 집의 살찐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시리이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시 36:8-9).”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게 하리이다.’ 하는 내용을 한참동안 묵상하고 돌아보면 주의 날을 사모하게 된다. 나는 나로서는 가망이 없다는 것을 죄로 인해 알고, 이를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이다. 내 죄가 깊다. 생각보다 무겁고 끔찍하다. 마치 죄 씻음으로 모든 죄가 없어진 사람처럼 살지만 단 한 시도 회개가 멈추면 죄는 여전히 나를 짓누른다. 토요일 하루는 그렇게 애를 태웠다. 아침에는 말씀으로 은혜의 강물인가 하였는데 점심에는 자기연민의 늪이 되었고, 오후께는 공연한 서러움과 안하무인격인 침묵 가운데로 빠져들었다. 딸애는 친구를 만나러 가고, 아들은 토익 시험을 보러나간 사이 괜히 뚱하여 아내에게 짜증을 부렸다. 그러다 곧 시들하여 우울감에 빠져들었다. 하루 중에도 이처럼 죄가 나를 엎치락뒤치락 하여, 나는 저를 감당할 기력이 없다. 나의 능력 밖의 일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 1:3-4).” 마치 내 안을 다 열어보고 남긴 기록 같다.

 

<힘써 싸우라.> 싸워야 할 이유가 분명하다. 가만히 들어온 사람이 늘 있다. 저는 나의 유아기적인 어린아이이고 예전에 억눌렸던 자아이다. 또는 오늘에도 괜한 열등감에 시달리는 나 자신이다.  이를 '옛적부터 죄의 판결을 받은 악'이라 교정하고 있다. 저는 '경건치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도색거리로 바꾼다.' 어느 교회, 누구 성도에게 말하는 일반론적인 진단이 아니라 실제의 나의 하루다. 날마다 빈번하게 드러나는 형태의 내 현재의 삶이다. 그러니 더욱 힘써 싸워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금세 타성에 젖고 내성이 쌓여 그저 그러려니 하다 또 그런다. 죄란 그처럼 끔찍하고 여전하여 나를 지배하려든다. 물론 죄의 삯은 다 갚으신 바 되어 사함을 받았는데, 그 본성에 여전히 있는 죄성은 우리를 억압한다. 또는 더 교묘해진다. 이러한 나를 진단하시고 주 여호와께서는 치료하신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겔 47:8).” 주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썩은 바다를 소성하게 하듯 죽은 나를 살리신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9).” 아니면 다른 길은 없다. 죽지 못해 사는 삶은 그 자체로 이미 지옥 같다. “그러므로 너희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34:9).”

 

다른 치료 방법은 없다. <말씀을 들으라.> 듣는다는 것은 그저 귀로 듣고 마는 정도가 아니라, 햇살이 듣듯 물드는 것이어서 식물이 소성하고 사물은 빛을 바랜다. 어느새 배어 사물은 옅어져서 아예 그 속성의 색깔이 더는 드러나지 않게 된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잠 10:22).” 내 안에 이는 온갖 근심은 말씀 밖의 일이다. 나의 본성이며 여전히 용암이 끓듯 내 안에 이글거리는 죄성이다. 그것으로는 성소를 기쁘시게 할 수 없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시 46:4).” 한 시내, 곧 한줄기 물이 흘러넘치는데 말씀으로 터를 내고 말씀으로 물꼬를 열어 말씀으로 가득하게 채워져야 한다. 요즘 더욱 부쩍 그 길밖에는 없다는 생각을 한다. 나로서는 도저히 가망이 없다. 세상을 봐도 가망이 없다. 내가 아는 누구, 잘 산다고 여겼던 이도 다를 게 없다. 나는 아픈 아이의 말을 받아내고 저가 쓰는 글을 읽다 오히려 부끄러워진다. 내 안에 저만큼의 간절함과 성실함이나 있을까? 어떤 불안이 엄습한다. 아,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주가 주시는 생수가 아니면 내가 아무리 퍼마신다 해도 나의 영혼의 목마름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점점 더 빈핍하고 척박하다.

 

오늘 아침 말씀을 다시 음미한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겔 47:8).” 그렇게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7).” 아무런 변화도 어떤 가망도 느낄 수 없는데, 그러는 동안에도 주님의 은혜의 생수는 말씀으로부터 이어져나와 나의 영혼을 소성하고 계신다.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3).” 곧 있자니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4).” 언제 또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무릎이 잠겨 온 영혼을 잠기게 하신다(5).” 저는 나의 샘이라. 생명의 강이라. 그것이 내 추악한 배를 적시어 다 쓸어내고 다시 생수의 같이 나의 배에서 흘러나오게 하신다. 그러는 동안 “여호와여 악인에게서 나를 건지시며 강포한 자에게서 나를 보전하소서(시 140:1).” 결국 “여호와여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나를 보전하사 강포한 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저희는 나의 걸음을 밀치려 하나이다(4).” 아니면 나는 침잠하여 숨을 허덕거리다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을 터. “여호와여 악인의 소원을 허락지 마시며 그 악한 꾀를 이루지 못하게 하소서 저희가 자고할까 하나이다(셀라)(8).”

 

그리하여 “진실로 의인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가 주의 앞에 거하리이다(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