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을 정하여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다니엘 1:8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시편 142:5
‘뜻을 정하여’ 사는 길은 올곧다. 오직 주의 긍휼하심 앞에 담대히 나아간다. 곧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누구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이 앞에 뜻을 정하고 사는 일이란 좌고우면하지 않고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그리하여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단 1:8).” 오늘 말씀은 새삼 마음을 다지게 한다. 어떠한 처지에 놓였다 해도, 아니 그래서 더욱 뜻을 분명하게 정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 바탕에는 확신이 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시 142:5).” 그러할 때 하나님의 뜻은 더욱 선명하여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말씀이 기준이다. 곧 뜻을 정한다 함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일이다. 그러할 때 자약하다. ‘어떤 큰일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평안하여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처신한다.’
요즘 나의 독서는 고전에 빠졌다. 특히 존 번연을 목표로 예닐곱 권의 책을 읽고 있다. 이번에 새로 <악인 씨의 삶과 죽음>과 <내게로 오라>을 샀다. 존 웨슬리가 그리스도인이 경건한 기독교 도서를 읽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어렵다는 말에 동의한다. 물론 말씀이 중심이고 성경이 전부이지만 성경대로 말씀 붙들고 산 사람들의 족적이 나의 가는 길에 나침반이 되어준다. 특히 점점 더 고전을 선호하게 되는 까닭은 저들이 거의 말씀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요즘 글들은 왠지 군더더기가 많다. 자기변호와 사상이 거슬린다. 논쟁을 위한 논쟁 같다. 그러다 보니 성경을 자주 인용하고, 아니 성경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사례로 든 것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책 읽기를 통해 은혜의 표적을 더듬는다.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시 86:17).” 그런데 우리 안에 ‘악인 씨’와 같은 속성이 얼마나 은밀하게 내재되어 있던가? 나는 그러한 나를 분명히 실감한다. 저들의 이런저런 표면적인 문제뿐 아니라 내재된 문제까지도 나 역시 다르지 않다. 내 안에 늘 죄의 속성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가증한 나뭇가지 같다. “오직 너는 자기 무덤에서 내쫓겼으니 가증한 나무 가지 같고 칼에 찔려 돌구덩이에 떨어진 주검들에 둘러싸였으니 밟힌 시체와 같도다(사 14:19).”
마치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8).” 그런데 이것이 혼재되어 어느 가지가 어떤 뿌리에서 나온 것인지, 서로 뒤엉켜 진리인지 비진리인지, 자기 열정인지 주를 향한 열망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물론 반드시 드러날 것이다.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1).” 나는 이를 두려워한다. 내 나름 모든 것을 끊고 더는 세상 즐거움을 바라기보다, 예전의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 전에 즐겨 읽던 독서를 멀리하며 내 안에 이는 알 수 없는 즐거움, 주의 충만하심을 붙들었다고 여겼는데 어디서 이를 또 잃을까봐서 말이다. 가령 그것이 육신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 때문은 아닐까? 또는 어떤 모진 인생의 질고 앞에 굴복할까봐서이다. 나는 나의 연약함을 잘 안다. 금세 마음이 흔들리고 견고하지 못함을 잘 안다. 다니엘처럼 그렇게 뜻을 정하여, 그러한 상황에서도 올곧게 주의 뜻을 바랄 자신이 없다. 행여 그리하여 결정적인 순간에 주를 모른다, 외면할까봐 두렵다. 내가 붙들고 의지하였던 이 길에서 이탈할까봐 무섭다. 그 생각은 때로 극단적으로 흘러 나의 병적인 염려는 끝 간 데 없다. 마치 자신하며 자신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장담하여도, “그의 기골이 청년 같이 강장하나 그 기세가 그와 함께 흙에 누우리라(욥 20:11).” 그런 게 사람이다.
주의 은총이 아니면 살 길이 없다. 나는 여기에 굴복한다. 더는 토를 달지 않고 나름의 주장을 더하지도 않는다. 지혜자는 단언하였다.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잠 1:25-26).” 이 얼마나 두려운 소식인가? 우리는 너무 은혜에 젖어 산다. 은혜를 싸구려로 만들었다. 정작 은혜가 뭔지도 모를 정도로 흔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나는 종종 오늘의 은혜를 묵상하다보면 나의 지난날에 치를 떤다.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거짓되고 죄악된 나를 내 안의 나는 자꾸 고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이처럼 경건한 이들의 삶을 따라가며 저들이 그러한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올곧게 그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에 집중한다. 그래서 오늘 우리 사회의 여러 모양은 두렵기만 하다. 가령 어떤 인기 있는 오락 프로그램에서 무당으로 설정하고 과하게 분장하여 우스갯소리로 웃음을 더하면서 ‘누구의 고민’을 점괘로 풀어가는 식의 놀이에 치를 떤다. 정치인들의 자기 정당화에 환멸하고, 더욱이 나의 절친했던 사람들의 여전한 저기 저편에서의 생활을 위태롭게 여긴다. 마치 독사의 구멍에 손을 넣고, 악어의 입을 벌려 머리를 드미는 식의 무모함 같다. 어디 아파트가 또 올랐고, 새로 짓는 신도시가 어디인데 누가 어떻게 투자를 했고, 하는 데 온통 정신이 팔린 시절이라.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무모한 용기가 있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보여주는 용기처럼 말이다. 또한 욥의 담담함처럼,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닥치든지 내가 당하리라(욥 13:13).” 저가 그처럼 용감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한 의지다. 주를 아는 온전한 믿음이 있었다. 아니면 어떻게 주가 자신을 죽이실 것을 안다면서도 주를 신뢰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15).” 곧 이어 나오겠으나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뜻을 정함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멋모르고 멧돼지 사냥을 나서는 사람들이 아니다. 분명한 확신의 증거가 있다. 성경이 있고 이 말씀으로 목숨을 걸고 살아갔던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이 잡히느니라(잠 9:7).” 누구더러 뭐라 할 거 없다. 어떤 친구와는 더 이상 말을 섞기 어렵고, 선생의 이런저런 조언은 더 이상 소음과 같아서, 거기다 대고 아무리 뭐라 이르며 성경을 말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듣지 않으려 하지 않는 데야 별 수 없다.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약 5:20).” 그래서 나는 주가 연결하는 데로 간다. 보내시는 자를 위하고 곁에 두시는 자를 돌본다. 내가 나서서 누굴 쫓고 이끌어 건사할 능력은 없다.
종종 누가 생각나고 이런 경우가 여러 명이어서 저들을 생각하다보면 내가 먼저 질식할 지경이다. 얘는 잘 지내는지, 여전히 그러한지. 이 친구는 좀 어떤지, 연락이라도 해봐야 하는 것인지. 가을이 되면서 그리움은 어떤 염려처럼 누구를 생각나게 한다. 그러다 주의 이름을 되뇌며 주께 아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말씀에 두려워할 줄 아는 나의 마음을 소중히 여긴다. “내가 네게 보응하는 날에 네 마음이 견디겠느냐 네 손이 힘이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내가 이루리라(겔 22:14).” 이를 무서워할 줄 알고 지옥을 끔찍하게 여길 수 있는 두려움을 사랑한다. 어릴 적부터 유난히 나는 지옥이 무서웠다. 어른이 되고 다들 사는 게 지옥이라 하지만 지금이 그렇게 어렵지 않은 것은 모든 게 끝이 날 것이어서이다. 지금 이 땅의 모든 고통도 슬픔도 어려움도 낙심도 끝이 있다. 끝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희망인가? 끝이 있어 아름답다는 역설적인 표현도 있듯이 오늘의 그 어떤 지옥 같은 날도 실제 지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그 고통의 수십 배는 더 고통스러운 것을 영원히, 끝도 없이 참고 또 견디며 고통 중에 일그러져 영원해야 한다는 게 상상만으로도 치를 떨게 한다. 그러니 나는 ‘악한 씨’가 아닌가? 할 때 저들과 다를 바 없다는 데서 두려운 것이다.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눅 16:24).” 더욱이 지옥에서 천국을 볼 수 있고 서로를 알아봄으로 한쪽은 더 괴롭고 한쪽은 더 충만한 은혜 가운데 거하는 것이었으니.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28).” 뒤늦은 부자의 소원이 가련할밖에. 그렇게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전 9:3).”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나는 지옥 같은 세상을 보면서 더욱 주를 의뢰하고 바란다. 존 번연도 그러했던 게 아닐까? 국교회의 반대와 무당파의 탄압에도 설교하고 말씀 전하는 일에 여념이 없던 그가 반평생 감옥에 갇혀 살았으면서도 60여 권의 책을 썼다는 내용에서 나는 저의 절실함을 느낄 수 있었다. 종종 아무도 읽지 않는 이러한 글을 왜 쓰나? 하는 회의도 들고 실제 누가 묻기도 할 때, 이는 나의 간절함이었다. ‘뜻을 정하여’ 최소한 나의 하루 중에 이 시간만큼은, 이렇듯 글로 쓰며 묵상하는 일에서 만큼은 떨어져 나오지 않으려는! 대수롭지 않게 왕이 건네는 산해진미를 먹을 수도 있었으나 다니엘의 ‘뜻을 정하여’는 오늘의 나의 마음과도 결을 같이 한다.
그렇게 오늘 시편의 말씀을 읊조리는 것이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시 142: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