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다니엘 3:17-18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시편 144:3-4
말씀은 그의 도로 교훈하신다.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시 25:8).” 그리하여 우리로 온유하게 하시고 정의로 가르치신다.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9).” 말씀은 항상 옳다. 이사야의 성경을 인용하여 마태는 진술하고 있다.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마 12:18).” 저는 예수시며 곧 우리들이어야 한다.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19).” 온유하고 조용하며 나서지 않고 가만히,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20).” 우리로 그리할 수 있게 하신 이가 그러하여서 우리는 이를 끝까지 붙들고 서야 한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
오늘 본문은 풀무불 가운데 던져지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일화다. 왕이 신상을 만들었다. 흡족하게 낙성식을 거행하고 각종 신호와 함께 그 신 앞에 절하게 하였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서슬 퍼런 폭정이 죽음을 예고했다.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 하였더라(단 3:6).” 그러니 모두들 악기 소리에 맞춰 신상에게 절하였다. 그러나 사드락과 그의 친구들을 그러지 않았다. 왕은 노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고 왔다. 그리고 한 번 회유한다.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15).” 타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 일에 대하여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하고 단호히 맞섰다. 그리고 늘 회자되는 유명한 고백이 나온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7-8).”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 이처럼 당당히 맞서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게 사람의 의지로 가능할까? 저 다급하고 처절한 상황에서 초연하게 주를 의뢰하고 의연하게 맞설 수 있을까? 왕은 풀부를 칠 배나 더 뜨겁게 하였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불 가운데에 던지기 위해 곁에 섰던 자들이 불에 타죽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불 속에 또 한 이가 계셨다. 왕이 놀라 말한다.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25).” 이에 놀라 왕은 저들을 부른다.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에서 나온지라(26).” 저들은 불에 그을리지도 않았고 불 탄 냄새도 없었다.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을 찬송한다. 그리고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고 절하지 아니한 그의 종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왕이 선포하기를 “모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로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더라(29).” 이와 같은 일이 다 벌어진다. 그리고 왕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였다.
참 신나고 멋진 일이지만, 아무나 그럴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특히 나 같은 위인은 아무리 좋게 여겨도 하등에 쓸모가 없다. 오늘 시편의 말씀을 그리 읽게 된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시 144:3-4).” 참다못해 아들에게 언성을 높였다. 밤새 공부를 하고 들어오니까, 나는 자꾸 볼 때마다 안쓰러웠던가보다. 어쩌니 힘들어서… 하는 소리에 녀석도 발끈해서 짜증을 냈다. 그러자 내 안에 평소 누르고 있던 마음이 튀어나왔다. 야단을 치듯 뭐라 큰 소리를 하다 그만두었다. 다들 그런다는데, 공부하느라 예민해져서 그렇다고들 하는데, 나는 참 그런 것에 옳다는 생각이 안 든다. 뭐라 계속하기에는 말하나마나 한 시기라, 같이 교회로 내려가 어색하게 각자 일을 보다 바람을 쐬러 나왔다. 주유도 하고 좀 어디 다녀왔으면 하고 나선 것인데 여의치 않아 도로 올라갔다. 그러면서 평소 즐겨먹는 커피우유나 바나나우유를 몇 개 사들고서 말이다. 자꾸 입을 다물게 하시는 것 같다. 내 마음 같지 않아서 뭐라 하면 다들 각자의 생각이 있는 것이라, 아들은 물론 아내도 딸애도 달가워하지를 않는다. 이러한 대수롭지 않은 상황에서도 나의 운신은 폭이 좁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하물며 저들의 저 난세에 어쩜 저리도 의연하고 꿋꿋할 수 있었을까? 서술된 부분이 없어 추측할 뿐이지만 저들도 두려움에 떨지 않았을까? 갈등하고 회의하지 않았을까? 그것도 아직 어린나이였을 텐데…. 나는 너무 보잘것없어 민망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이런 나를 주가 돌보시고 이해하신다.
나의 운신의 폭이 좁아지면 좁아질수록 나는 말씀 앞으로 쫓겨오는 기분이다. 숨을 데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말씀이 나를 위로하시고 훈계하신다. 결국은 이 모든 게 다 주가 지으신 것이라. 모두가 드러날 것이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13).” 그러할 때 내가 굳게 잡을 것은 오직 하나다. 어쩌면 바람 좀 쐴 겸 낚시라도 다녀왔을 터인데 동네를 잠시 돌며 운전하다 도로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우면서, 꼼짝 못하게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14).” 다른 길 없다. 그렇게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15).” 주가 나를 동정하시고 연약함을 아실 것이다. 또한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16).” 다른 무엇으로 위로를 찾을까?
확연히 달라진 자신을 본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10:22).” 마치 소금에 절여 염장을 하는 배추처럼 나의 맛은 더해져 어느덧 버무려지는 것을 상상한다. 내 의지로의 일이 아니다. 내가 결단하고 판단해서 될 일도 아니다. 남에게는 물론 자식들조차도 뭐라 하고 나무란다고 될 것도 아니고, 그러는 중에 나의 감정도 고스란히 드러나 추하고 혐오스럽다. 그러니 어쩐다? 긍휼하심을 따라 살 뿐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잠시 우울하였던 마음이 가라앉고 의식적이었든 무의식적이었든 나는 아들이 먹을 간식을 사다 냉장고에 넣고 슬그머니 책상에 두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저녁에 같이 돌아오면서는 미안하다고 한 마디 건넸다. 저 아이도 지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서로 불편할 텐데, 둘이 앉아 저녁을 먹고 둘이 앉아 가정예배를 드렸다.
하루하루의 나의 삶이 풀무불 속 같다. 곁에서 보다 질식하고 타죽을 것 같은데, 정작 그 안은 고요하고 분명히 함께 하시는 이가 계시었다. 얼마쯤은 감정이 격해져 서로 싸우다 튕겨져 나갈 법도 하였는데 주께서는 조용히 나의 마음을 수습하셨다. 받아들임이란 내 의지의 것이 아니다. 개인의 덕이나 수양에 의한 수련의 정도도 아니다. 전혀 그 정도 위인이 못 되는데, 주께서 함께 하시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불에 그슬린 곳도 탄 냄새도 없이 아들은 저녁을 차리고 나는 설거지를 하고, 둘이 같이 가정예배를 드림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는 것에 놀라웠다. 들끓던 풀부불과 같은 마음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온하여졌다. 주의 영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어떤 대단한 역사도, 요란한 현상도, 기이하고 신비적인 행사도 아니다. 물론 그렇게 역사하실 때도 있겠으나 나의 날들은 일상에서다. 있는 듯 없는 듯 늘 같은 날의 연속인 것 같으나 그 가운데 주의 성이 늘 함께 하시는 거였다. 가령 아브라함의 걸음은 요란하지 않았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갈 3:5-6).” 오늘 본문의 세 사람도 그와 같았던 게 아닐까? 급박하고 비현실적인 일 앞에서 묵묵히 저들은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의로 여기셨다.’ 내게 주시는 교훈이나 지도하심이 크다.
안달 부려 봐야 소용없고, 아내 말마따나 내가 애달파한다고 될 일도 안 될 일도 아니다. 그렇다면 길은 하나다. ‘하나님을 믿으매’ 그리 여김으로 도와주실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그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시고 긍휼이 많으시다. 다른 길 있겠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때론 나의 마음이 멋대로 극성이고, 극렬하여 당장이라도 모든 걸 불살라버릴 것처럼 풀무불 같다가도, ‘기기에까지도’ 주의 영이 함께 하신다면 평온하였고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어 오히려 안 믿는 자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그렇게 나는 이제 전혀 다른 나로 살아가는 중이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21-22).” 종종 나는 나의 추하고 혐오스러운 모습 뒤에서야 하나님의 선하심을 마주하게 된다. 마치 나무 그늘에 숨어서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자신을 숨길 수 없었던 처음 사람 아담처럼. 이제는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23).” 그렇게 '나 바울은', 곧 우리는 모두 ‘바울’이어야 한다.
그러니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시 144:3-4).” 그렇게 나를 돌이키심으로,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9).” 그리하여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