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네 안에는 신들의 영이 있으므로 네가 명철과 총명과 비상한 지혜가 있다 하도다
다니엘 5:14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시편 146:3-4
죄의 힘은 강력하다. 부친 느부갓네살이 경고의 말씀에도 경거망동을 삼가지 않더니, 그의 아들 벨사살 왕이 그 뒤를 따랐다. 저가 그의 귀족 천 명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한 금, 은그릇으로 술자리를 벌였다. 그뿐인가? 흥을 돋우기 위해 그 금, 은그릇뿐 아니라 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신들을 앞에 놓고 흥겨움에 빠져 있었다. 그때 저의 앞에 손가락들이 나타나 왕궁 촛대 맞은편 벽에 글을 쓴다. 벨사살 왕은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보고, 여태 즐기던 얼굴빛이 창백해지고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칠 정도로 두려움에 떨었다. 결국 왕이 크게 소리 질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불러 그 글자들을 해석하게 하였다. 이를 해석하면 자신의 나라에서 셋째 통치자로 삼겠다고 으르면서 말이다. 그러나 저의 지혜자들은 하나도 그 글자를 읽지 못하고 해석을 하지 못했다. 벨사살은 더욱 번민하여 그의 얼굴빛이 변하였고, 귀족들도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그때 저의 왕비가 저의 부친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벨드사살이라 이름하는 이 다니엘을 추천하였다. “이제 다니엘을 부르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그 해석을 알려 드리리이다(12).” 이에 다니엘이 부름을 받고 왕 앞에 나왔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네 안에는 신들의 영이 있으므로 네가 명철과 총명과 비상한 지혜가 있다 하도다(14).” 하고 저에게 그 모든 일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푼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려 주면 네게 자주색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네 목에 걸어 주어 너를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리라(16).” 하고 회유한다. 그러나 “다니엘이 왕에게” 말한다. “왕의 예물은 왕이 친히 가지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뢰리이다(17).” 하고 먼저 저 글자들의 정황을 설명한다. 즉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다. 그런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완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의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의 영광을 빼앗기고, 사람 중에서 쫓겨나서 그의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살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의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자리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에 이르렀나이다(18-21).” 하고 그간의 일을 상기시켰다.
이는 그런데도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아직도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자신을 하늘의 주재보다 높이며 그의 성전 그릇을 왕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구리, 쇠와 나무, 돌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22-23).” 그래서 손가락들이 나타나 무슨 글자를 썼는가를 알려주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즉 “그 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26-28).” 그런데 벨사살은 그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회개하고 돌이키기는커녕 뜻풀이를 잘한 다니엘에게 위세를 떨며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그들이 다니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 주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니라(29).” 그러니 뭐하나?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다(30). 그리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다. 저의 나이 육십이 세였다.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은 참 알 수 없는 존재이고, 그 죄는 생각보다 끔찍하고 아둔하며 잔인하다. 그러므로 이 아침에 말씀 앞에 앉아 이처럼 주 앞에 올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의지적인 일이다. 우리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 향한다는 것과 주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이 아니면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는 것이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억지로 되지 않는다. 주의 권능의 날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처럼 주 앞에 앉을 수 있는 일 자체가 주의 권능이다. 모든 감정의 간절함이 듣는다. 그렇게 주의 생수의 강물이 흘러,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겔 47:9).” 그러므로 이를 듣는 자는 오라!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결국 목마름을 느껴야 한다. 간절함의 다른 이름은 절박함이다. 내가 내 아이를 어쩔 수 있겠으며 누가 누구를 어찌할 수 있겠나? 나 자신조차 내가 나를 어쩌지 못하는 게 사람이고, 그 안의 죄성이어서, 내가 전에 얼마나 주를 멀리하고 살았었는지! 그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처절한 일이었는지! 그러는 중에도 주의 은혜가 늘 함께 하셨기에 오늘의 나로 여기에 있을 수 있게 하시는 은총의 은총인 것을…. 그러니 오늘의 이 목마름은 그저 단순하게 어떤 소원을 두고 비는 정도가 아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심정으로 나를 의롭다하실 이가 오직 주의 긍휼하심밖에는 없다는 것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결코 입으로만 사랑을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겔 33:31).” 그리 형식적으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그러려니 하고 바라는 간절함은 없다.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하는 식의 것으로는 주를 온전히 바랄 수 없다. 참으로 주밖에 다를 방도가 없는….
“그 날에 큰 나팔을 불리니 앗수르 땅에서 멸망하는 자들과 애굽 땅으로 쫓겨난 자들이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예배하리라(사 27:13).” 쫓겨났다 돌아오는 사람처럼, 3천명이 절규하고(행 2:41), 다소의 사울처럼 주께 나오고(9:1-19), 빌립보 감옥의 간수처럼,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16:30).” 그와 같은 처절함이 이끄심이다. 나병환자 넷이 성문 어귀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하는 심정으로(왕하 7:3). 그러한 우리에게 주님은 손을 내미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에 울며 간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렘 31:9).” 이에 말씀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오며 유다 자손도 함께 돌아오되 그들이 울면서 그 길을 가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할 것이며, 그들이 그 얼굴을 시온으로 향하여 그 길을 물으며 말하기를 너희는 오라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언약으로 여호와와 연합하라 하리라(50:4-5).”
그렇게 우리는 진노를 피해 주 앞에 온다. 멸망할 세계를 보았다. 사람들의 악랄함과 무방하지 않게 내 안에 거짓이 가득함을 절감하였다. “여호와여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건지소서 내가 주께 피하여 숨었나이다(시 143:9).” 이렇게 이른 아침, 주 앞에 앉아 주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더하신 것이 은혜이다. 누구는 애써 수고하여 얻은 박사학위를 주체하지 못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모래성을 쌓았다 허물었다 하기를 거듭하였다. 그러다보니 어디 먼 원불교학교에도 지원을 하여, 거기는 좀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며 기대를 거는 저에게 그만두라 일렀다. 어쨌든 재단이 그러함은 저들의 근간이 하나님을 망령되이 하는 우상숭배의 장일 텐데, 교수임용이 그리 중요한가? 아닌 건 아닌 거고, 죽었다 깨어나도 아닌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주께 맡긴다는 것을 내 뜻을 두고 서로 합의하는 문제가 아니다. 목사가 되고 목회를 하면서부터 나는 비로소 내가 하는 게 아닌 것임을 절감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 속에 부르짖음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마 14:30).” 두려워할 줄 모르는 데야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나? 보면 한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은 채 주께 하나를 더 구한다.
오늘 시편은 이에 따른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게 한다.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시 146:2).” 살면서 어찌 사람들의 도움 없이 살 수 있겠나만,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3-4).” 이를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이다. 그러므로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