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전봉석 2020. 10. 20. 06:08

 

 

이에 나 다니엘이 지쳐서 여러 날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내가 그 환상으로 말미암아 놀랐고 그 뜻을 깨닫는 사람도 없었느니라

다니엘 8:27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시편 149:4

 

 

주의 종으로 그 사명을 감당하는 데 있어 나다른 고충이 따른다. 어떠하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부분이겠으나 특히 목사로 세우심을 받는 데 있어서는 어쩔 수 없는 고통도 있다. 나는 저의 ‘학습된 무기력’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놓아둘 일이 아닌 것을 알겠다. 하고 싶은 게 없고 뭘 해야겠다는 의지도 없는데,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하는 말에 그럴 거라는 짐작은 하고 있었다. 오늘 다니엘은 환상을 본다. 주께서 행하실 일에 대하여 알 길이 없다. 그러자 마리아에게 보내셨던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어 설명을 더하고 용기를 돋우신다. 그 일 후에 저는 아팠다. “이에 나 다니엘이 지쳐서 여러 날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내가 그 환상으로 말미암아 놀랐고 그 뜻을 깨닫는 사람도 없었느니라(단 8:27).” 내가 ‘신대원’을 하기 전후 곁에서 나를 지켜보던 교회의 담임 목사는 말하였다. 특별한 부르심에는 남다른 고통이 따르더라, 하며 자신의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나의 그때는 마치 새벽 미명의 시간 같았다. 신대원을 전후하여 1, 2년 사이에 나의 심신은 가장 추웠고, 가장 감격스러웠다. 여전히 오래된 습관과 결별하지 못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뭉개며 지낼 때 나는 극심한 우울감에 몸부림쳤고, 주를 바라며 새 생명을 얻기를 바라는 만큼 죽고 싶은 마음에도 시달렸다.

 

그럼에도 신기하게 새벽예배를 기를 쓰고 나갔고, 갈 때마다 울었으며, 낮에는 또 옛 생활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아쉬워하다 저녁에는 어떤 강력한 힘에 이끌려 가정예배를 드리기도 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싶다. 그때 아이들은 고2, 중2였고 한참 예민하고 거칠던 시절인데 나의 생활이 마치 염장에 절여지는 배추 같아서 그렇게 자주 울고 또는 억지를 부르는 것에 헷갈려하였다. 이런 생각을 더듬게 된 것은 아침에 와서 같이 말씀을 나누는 나의 젊은 동기 예비 목사의 경우 때문이었다. 이제 서른 중후반으로 한참 열망이 넘치고 목사고시를 앞두고 있는 때에 그 사역에 대한 비전이 꿈틀거려야 할 시기인데, 너무 맨송맨송한 것이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서도, 목사고시를 준비하면서도, 개척교회를 이루고 예배를 같이 시작한 지 일 년이 다 넘어가는데도, 그냥 무덤덤하니 뭘 더 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이다. 학습된 무기력은 마치 마음을 덮은 양탄자 같다. 번거롭고 어렵다 싶은 일은 슬그머니 카펫 밑으로 밀어 넣는다. 당장 문제될 게 없으니 됐다는 심정이다. 안 건드리면 아프지 않은 종기 같기도 하다. 굳이 짜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그게 그럼 괜찮은 게 아니어서, 카펫 밑에 밀어 두었던 것으로 인해 먼지가 일거나 악취가 나거나 어느새 불룩하여서 자꾸 오가며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또는 종기 때문에 자세가 어정쩡하다. 그러다 툭, 건드리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불같은 화가 인다. 그냥 덮어둔다고 상책이 아닌 것이다.

 

그러느라 나는 나의 경우를 허심탄회하게 고백하였다. 흉터는 있으나 더는 아프지 않은 것은 그때 나는 죽을 각오로 글을 썼다. 나의 폐부를 다 드러냈다. 그러다 자판을 몇 번 부수기도 하였다. 화가 났고, 지나간 어린 시절이 억울하기도 하여서 죽을 것 같았다. 억하심정으로 더욱 더 세상을 갈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의 그러한 이율배반적인 삶의 행태는 하나님께 버림당할 이유가 되지 못했다! 나는 엄연히 <하나님 아버지의 것>으로 <그리스도에게 주시기로 하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내가 주께로 오게 된 것은 나의 결단이나 어떤 의지나 돌이킴, 깨달음의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해가 뜨기 전에 더욱 짙고 차가운 어둠처럼 나의 영혼은 죽고 싶다는 자살충동에 시달리고는 하였다. 저가 어떠하든, 내가 어떠하든, 우리는 우리 의지와 별개로 이미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주시기로 하신 자들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자는’ 그가 어떤 처지에서 얼마나 추악하게 살았든지, ‘다 내게로 올 것이요!’ 하고 예수님은 장담하신다. 그렇게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쫓지 아니리라.’고 약속하신다. 그것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39).” 그러므로 내게 있어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단순한 논리로 나의 신대원 시절을 전후해서 이처럼 나의 인생은 확연히 갈린다.

 

이는 죄를 직면해야 하고, 직고해야 한다. 자신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회피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이는 조건이 아니라 필수다. 어쩌면 무난할 수 있다. 평안을 원하고 서로가 편안하길 바란다고 하는 저의 말에 나는 카펫에 빗대어 아무렇지 않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것은 고스란히 자녀에게로 전가된다. 은연중에 그 카펫 위에서 같이 생활하기 때문이다! 좋게 말하면 순하고 느슨하나 우유부단함은 그 어떤 무관심보다 악하다. 우리는 결코 그대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 땅에 안주하다 평안히 잘 돌아오라고 주께서 허락하신 세상이 아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 4:28-29).” 왜 나름 목회자로 사명을 가지고 살면서도, 왜 성도로 믿음을 가지고 살면서도 그 삶이 척박하고 좀체 나아지는 게 없이 늘 그 모양일까? 성경은 엄연히 그 사실을 일깨운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30).” 즉 우리 안에 종의 아들을 내쫓으라. 내 안에는 여전히 세상에 종노릇하는 아들이 있고, 자유함을 가진 아들이 있다. 종의 아들이 자유자의 아들을 박해한다.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31).”

 

나는 저에게 금요일에 만날 때는 될 수 있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오기를 바랐다. 그러는 동안 자신을 직면하고 그 실체의 심각성을 조금이나마 깨닫기를 바라서였다. 비록 오랫동안 머물며 기웃거리고 익숙해진 것이라서 힘들겠으나, 그것으로 그릇행하여 엇나가기 일쑤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절대적인 약속의 자녀인 것을 알아야 한다. 나의 의지나 노력, 어떤 선행의 결과로 주어진 지위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아브라함을 예로 들며 바울은 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19-20).” 즉 도저히 불가능한 것 같은 나의 기질과 성격과 고착된 자아를 하나님은 반드시 꺾으신다. 실은 여태 왜 굳이 저가 성경공부로 나에게 오게 하셨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다소 느긋하고 맹탕인 것 같아 몇 번은 '어떤 교재'를 가지고 해야 할까? 하는 고민도 했었다. 그러다 어제 더는 미루지 않고 그와 같은 문제점을 콕, 찍어 지적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편한 걸 원한다지만 이는 '극심한 피로감'으로 오는, 내켜하지 않는 무기력증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생각, 이는 더 일찍이 어디서 거절당한 상처로부터 기인한다. 그것도 반복적이었고 늘 있던 일이라, 그러한 거절을 당하지 않기 위해 기대를 버렸다. 그럼 저에게 도전도 없다. 뭘 하려고 하는 의지가 결여된 것이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겉으로 보기에는 순한 사람 같으나 실제는 그 안에 아주 단단한 카펫 아니, 심지어 콘크리트 같은 바닥의 완고한 표면이 두르고 있다. 골치 아픈 일은 다 그 밑으로 슬쩍 밀어 넣고마는 것이다. 그것으로 자신도 속고 지낼 정도다. 아무 일 없는데요! 정말 괜찮아요! 하지만 실은 저의 우유부단함이 자기애의 일종이라는 것을 저만 모른다. 그것으로 가까운 사람이 먼저 힘들고,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일이 자꾸 지연된다. 자기 고집이 누구보다 강한 것은 이처럼 여러 형태의 변이된 형질로 나타난다. 본래 드러나지 않는 고집이 겉으로 고집불통인 사람보다 더욱 완고한 법이다. 과연 저가 자신을 들여다보며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나님께 아뢰며 직면하고 직고할 수 있을까? 저로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실 것이다. 마치 나에게 그리하셨던 것처럼, 나는 늘 '내가 뭐 어때서?' 하는 심정으로 견뎠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추한 짓을 하면서도 같이 어울리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얼마든지 평온한 듯 내숭을 떨 수 있었다. 이는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내 안에는 견고한 카펫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나에게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나를 꺾어놓으셨다. 이는 주의 무조건적인 약속이다. 아무리 내 죄가 짙고 어둡고 추하다 해도,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주의 권능으로 해결하신 일이다. ‘~을 해야’ 또는 ‘~한 노력이 있어야’ 하나님이 행하시는 약속이 아니다. 즉 죽었던 나를 살리신 것이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죽은 것이 무슨 자격을 갖추고 쓸모 있는 존재로 준비돼야 한단 소린가?!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 나는 그러하였고, 그때 이미 죽은 것이나 다를 게 없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3-5).” 그러므로 주의 은혜는 세상 그 무엇보다, 죽음보다 강하시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6-7).” 이처럼 나를 살리신 목적이 엄연한 것이다. 우리로 어쩌다 주의 길을 가게 하신 게 아니다. 더욱이 목사가 되려고, 목사고시를 앞두고 있으면서도 교회를 이루는 데 있어서도 또는 앞으로 주의 쓰신 바 그 쓰임에 대한 열망이 그냥 무기력할 뿐 별로 큰 기대가 없다는 것에서 나는 심각성을 느꼈다.

 

이와 같은 절대적인 약속은 조건적인 약속으로도 구별된다. 절대적인 약속은 ‘~할 것이며, ~을 하게 할 것이다.’로 정의된다.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렘 31:31).”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다. 이것은 우리의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어떤 자격 요건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34:24).” 그러므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히 8:8).” 이와 같은 은혜는 자연스럽게 조건적인 약속으로 이어진다. ‘~을 하라, 그리하면 ~’ 하시는 말씀으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 19:21).” 이러한 요구는 마땅히 자격이 되어야 가능하다. 아무나 그리할 수도 없고, 아무에게나 약속하시는 내용도 아니다. 즉 절대적인 약속을 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은사다. 물론 이는 지킬 수도 있고 지키지 않을 수도 있다. 따를 수도 있고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의 조화는 다채로워서 먼저는 회개하게 하신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고,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행 5:29-31).” 또한 믿음을 요구한다.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습 3:12).” 이를 위하여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롬 15:12).” 다음은 새 마음을 주신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그리하여 거룩한 순종이 가능하게 된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27).” 이를 살펴보면서 나는 저를 생각하였고, 나에게 그리 행하시는 바 주의 선하시고 긍휼하심을 묵상하게 되었다. 궁극적으로는 이게 다 나를 먼저 절대적인 약속의 존재로 삼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께로 주어진 바를 입증하신다.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요 16:15).”

 

곧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19:1-2).” 믿음을 주신 후에 믿게 하시는 것이고, 회개의 영을 더하신 후에 회개할 수 있게 하시고, 내 안에 새 마음을 이루신 후에 새 마음을 요구하시며, 거룩한 순종을 심어놓으신 후에 순종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오늘 다니엘이 앓았던 이유를 이해하고 있다. “이에 나 다니엘이 지쳐서 여러 날 앓다가” 어쩌면 주의 일을 행하는 자의 숙명이다. 우리는 “그 환상으로 말미암아 놀랐고, 그 뜻을 깨닫는 사람도 없”다는 것에 더욱 더 막중한 책임을 느낀다. 그렇게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 149:4).” 그러므로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5).” 곧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