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전봉석 2020. 10. 23. 05:58

 

 

그가 장막 궁전을 바다와 영화롭고 거룩한 산 사이에 세울 것이나 그의 종말이 이르리니 도와 줄 자가 없으리라

다니엘 11:45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시편 2:11-12

 

 

다니엘서는 하나님의 통치를 함축한다. 오늘 11장의 말씀도 북방에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서 사방을 손에 넣는다. 역사적으로 저는 알렉산더 대왕이다. 거침이 없이 세계를 정복하였고 다스렸으며 장구함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종말이 오고 도울 자가 없다. “그가 장막 궁전을 바다와 영화롭고 거룩한 산 사이에 세울 것이나 그의 종말이 이르리니 도와 줄 자가 없으리라(45).” 역사적으로 커다란 족적을 남겼을지 모르나 영구하지 못하고, 대대손손 그 영화가 계속될 것 같으나 이내 종말은 온다. 그러할 때 오늘 시편의 말씀은 한 길밖에 없음을 분명히 한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시 2:11-12).” 내 안의 두려움, 주를 경외하는 마음은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 일’이다. 여타 돌아가는 역사나 오늘날 일련의 사태들을 지켜보면서도 여실히 드러나는 것은 오직 한 길,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거기에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있다.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구제가 어렵다. 매순간 나의 날들과 그 순간들을 보면 공연한 긴장의 연속이다.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이 느끼는 강도가 서로 다르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실제의 삶으로 적용되기가 또한 묘연하기만 하다. 나의 의지로는 감당이 안 된다. 성경에 이르신 것 같이 다른 길은 모두 막혔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그러니 아무리 다른 신을 찾고 방도를 구하고 나름의 명상과 평안을 추구한들 남은 한 길은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20).” 전에는 온갖 동물들의 사체가 즐비하고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며 잔인하고 끔찍한 현상이 그칠 날이 없었는데, 이 모든 것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직접 담당하셨다. “너는 그 숫양을 잡고 그것의 피를 가져다가 아론의 오른쪽 귓부리와 그의 아들들의 오른쪽 귓부리에 바르고 그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바르고 그 피를 제단 주위에 뿌리고 제단 위의 피와 관유를 가져다가 아론과 그의 옷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아들들의 옷에 뿌리라 그와 그의 옷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아들들의 옷이 거룩하리라(출 29:20-21).”

 

그러니 오늘 나의 삶이 얼마나 은혜로운가.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히 9:9).” 이제는 피 없이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럼에도 이를 거절하고 부정하는 것이야 어쩌겠나? 나나 잘하자. 누구 뭐랄 거 없이 우리라도 바로 서서 온전한 믿음과 참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10:22).” 어쩌면 요즘 나는 그것으로 긴장하고 마음이 언짢아 스스로 자책하며 훈련 중인 것도 같다. 자식들도 다 컸으니 내가 뭐라 해서 될 것도 아니고, 어렵게 한 곳을 찾아 같이 독감백신을 맞으러 가자는 말에 싫다고 하니 뭐라 덧붙일 말이 없었다. 백신으로 인해 몇 건 사망사고가 터지고는 두려움이 없지 않으나, 그것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뭐라 말하려는 나’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뭐라 말하지 않으려는 나’는 서로가 나를 괴롭혔다. 복잡한 마음 때문인지 혈압은 상승했고 식은땀이 흘렀으며 공연히 어렵고 힘든 하루였다. 이 보잘것없는 한 날의 상황에도 주의 긍휼하심뿐이라. 다른 것을 바랄 수 없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9:14).”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고, 하려고 하는 것도 뒷발질만 하는 격이어서 혼자 힘들고 외로울 따름이다. 더도 덜도 말고 나는 요즘 그러하여서 더욱 주를 의지한다.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 13:8).” 나의 선의가 주의 뜻을 거스를 수 있다. 날마다 돌아보며 이처럼 씻는 발이면 족하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그러므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15:3-4).” 마음의 어려움이 주만 바라게 한다. 가장 가까이 여기고 마음 쓰고 의지하는 그 무엇도 헛될 뿐이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 이미 씻음을 받은 자로서 날마다 발을 씻듯이 행실과 마음을 바로 할 일이다. 거기에는 늘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있었다.

 

은혜의 보좌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다니엘서의 핵심 주제도 그러한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다. 누구도 저를 대신할 수 없고 그 통치는 장구하지 못하다. 나의 신실함은 어쩌면 나의 연약함에서 나온다. 별 일도 아닌데서 긴장하고, 두려움인지 불안인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마음은 어렵기만 하여, 평소보다 안정제를 더 먹고 인위적으로 진정을 시켜야 하는 날들이지만…. 그러해서 주를 더욱 의지한다. 이처럼 내가 말씀 앞에 앉을 수 있는 것이 구속됨의 증거다. 그에 따른 지식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갈급함을 주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앞으로 나아감으로 찾는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시 38:19).” 그렇게 나로 하여금 변함없이 주께 나아가도록 어려움도 나약함도 나의 연약함도 돕는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다시 생각하면 이 모든 게 감사함으로 받는다면 버릴 게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하나님은 이를 위해서도 우리를 시험하신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욥 23:3).” 나름 방도를 찾다보면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8-9).”

 

아무리 둘러봐도 아니 계신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는 보름달을 가리시고 자기의 구름을 그 위에 펴시며 수면에 경계를 그으시니 빛과 어둠이 함께 끝나는 곳이니라(26:9-10).” 그러니 내가 어찌 하면 주를 뵈올 수 있을까? 욥은 알고 있었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13:15).” 모든 사람이 시험을 받는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할 때 욥의 신앙이 본이 된다. 주께서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주를 의뢰하고 아뢰리라. 다니엘과 저의 친구들이 보여주고 있는 신앙의 단면도 그러하다.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주를 바라며 주께 의뢰한다. 세상 군왕이 바뀌고, 그때마다 저의 세력이 온 사방을 호령하며 천년만년을 이어갈 것 같으나 그 모든 것에 종말의 때가 오나니, 정작 죄는 그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알지 못함으로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결국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6).” 나의 사는 날 동안 온전함과 신실함으로 주만 바랄 수 있기를. 해볼 것 다 해본 뒤에 비참하게 주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오는 경우가 생기지 않기를.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막 5:26).” 사느라 사는 삶이 오죽했겠나? 그러나 오직 한 길,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오늘 시편의 말씀은 이를 보장한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2:6).”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7).” 그러니 나는 다른 길을 접는 중인지도 모른다. 마음을 접고 어떤 기대와 상식을 접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