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전봉석 2020. 10. 26. 05:55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호세아 2:23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시편 5:11

 

 

오늘 말씀은 회복과 소망을 일깨운다.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호 2:1).” 앞에 부정관사 ‘로 NO’가 빠졌다. ‘암미’는 ‘나의 백성’, ‘루하마’는 ‘긍휼히 여기다.’이다. 그러려면 어머니 ‘고멜’과 ‘논쟁하라’고 한다. 히브리어로 논쟁하다는 ‘고발하다’의 의미를 갖는다. ‘고멜’을 ‘끝’내라는 것이다. “너희 어머니와 논쟁하고 논쟁하라(2).”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으려면, “그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그의 남편이 아니라 그가 그의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고 이어서 말씀하신다(2). ‘그의 얼굴’은 삶 전체를 의미한다. 마음을 의미하는 가슴 곧 ‘유방 사이’는 마음에서 실제의 음란한 행실을 제거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그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그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3).” 그러할 때 밖에 배어온 자녀들, “내가 그의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4).” 곧 고멜, 저들의 어머니는 결혼 후에도 음란한 생활을 그치지 않았다. “그들의 어머니는 음행하였고 그들을 임신했던 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5).”

 

그와 같은 행실이 계속됨은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7).” 그런 우리, 고멜과 같은 자들에게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호 2:6).” 이와 같은 방해가 막힘이 오히려 복이었다. 저는 마치 탕자와 같은 의미로 “그가 그 사랑하는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그들을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그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7).” 막힘으로 돌이키고 찾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이외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을 음행이라 여기신다. 그것은 단지 생각과 느낌의 정도가 아니라, 먹고 사는 모든 일의 희락이 그런 것에 소모될 수 없음을 일깨우신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8).” 그러니 하나님의 방도는 “그러므로 내가 내 곡식을 그것이 익을 계절에 도로 찾으며 내가 내 새 포도주를 그것이 맛 들 시기에 도로 찾으며 또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릴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9).” 있다 없고, 가진 것을 잃어봐야 비로소 그 소중함을 알며, 참 주관자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좋을 땐, 많고 풍요로울 땐 “그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가 사랑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대로 내가 그에게 벌을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3).” 하나님이 아닌 바알을 섬기는 삶이라니!

 

‘이스르엘’의 뜻은 ‘흩어 뿌리다.’였다. 죄를 막을 방법은 이것뿐이다. 모이고 손에 쥐면 어김없이 탈낸다. 하나님은 앗수르와 바벨론을 동원하여 주의 백성을 흩어 뿌리셨다. 그러나 이 또한 이렇게 하여 소멸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14-15).” 그야말로 고통의 늪과 같은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주신다. 그리고 회복시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16).” 그렇게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17).” 하나님의 의중은 분명하셨다. 곧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18).” 그렇게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20).” 이처럼 말씀은 응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21-22).” ‘흩어 뿌려졌던’ 것에서 응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의 결론은 “내가 나를 위하여” 곧 하나님의 고멜이고 그의 자녀들이다. 결국은 주께서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심’ 같이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심지어는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하는 말씀으로 이 아침은 벅차오른다(23).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영생을 얻기 위함이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40).” 오늘의 세태는 물론 우리 안에 마음도 시큰둥하다. 우리가 주께 나아옴은 영생을 알고, 알면 알수록 주를 더욱 존귀하게 여긴다. 그만큼 말씀을 존귀히 여기는 일이다. “내가 나의 모든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내가 미워하는 이 가증한 일을 행하지 말라 하였으나(렘 44:4).” 비록 다들 어떠하다 해도 이처럼, 주 앞에 앉아 주의 말씀을 마주하고 이를 귀히 여길 수 있음이 ‘복 있는 사람’이었다. 영생을 안다. 거기에는 의가 있다.

 

이를 알수록 자신과의 사투가 끊이질 않는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25).” 그런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2).” 그래서 주를 알고 저가 나로 사망과 저주에서 건지시고 담을 쌓아 돌이키심을 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오늘 내가 온전함을 구하게 되는 것도 주의 기도가 끊이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이란,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요 5:26-27).” 저가 곧 하나님이시라.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17:2).”

 

곧 오늘의 목적은 영생이고 참 위로와 존중의 삶이다. 이를 위하여 제물이 되셨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4-15).” 그가 오늘 내게 이르시기를,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계 1:18-19).” 죄와 세속의 상속자로 살던 나를 의의 상속자로 삼으시는 것이다. 마치 노아와 같이 말이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 11:7).”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어제 예배를 마칠 때 손위 처남이 지난 4월 마지막 주일 설교원고를 들고 와서 그 순서를 물으며 내용을 물었다. 밑줄을 긋고 그것을 들고 다니며 묵상하였던 흔적이 뚜렷하였다. 새삼 나의 이와 같은 일이 막중함을 느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 늘 같은 반복적인 일의 되풀이 같아서 허투루 그 일을 준행하였다면 어쨌을까? 곧 나는 그때의 설교 내용이 뭔지, 잊고 있던 것에서도 저는 되새김이 이어졌던 것이다. 마치 하나님이 내게 좀 더 세심하게 원고를 작성하고, 연구하고, 신중히 기록해야 할 이유를 알게 하시는 것 같았다. 다들 그저 한 번 보고 찢어버리는 줄 알고 이면지에 대충 건네던 것이 날짜 하나 성경구절 인용 한 곳 때문에 성경을 찾아보고 날짜를 맞추고 있는 이도 있었구나, 하는 데서 놀랐다. 특히 호세아서를 묵상하면서는 그 하나하나가 모두 나의 이야기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어 행여 나의 행적 앞에 부정관사 ‘로’, ‘노 NO’를 붙이실까 두렵다. 이처럼 말씀 앞에 있으면, 더욱 고개를 숙이게 된다.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시 5:1).” 그리하여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3).” 선잠을 깨우고 이처럼 오늘도 주 앞에 앉게 하심이 은혜이다. 그러므로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7).” 아무리 온통 다 어떠하다 해도,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