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호세아 4:12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시편 7:10
오늘 말씀은 이 땅에 ‘없는 것 세 가지’와 ‘있는 것 다섯 가지’에 집중하게 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1).” ‘이 땅에는’에서 엄연히 이 땅은 여전한 것을 상기하며, 없는 것 첫째는 진실이다. 진실은 좀 더 직역하면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 둘째는 인애가 없다. 인애는 본래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헤세드이다. 셋째는 지식이 없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그런데 이어서 ‘있는 것 다섯 가지’가 언급된다.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2).” 저주, 속임, 살인, 도둑질, 간음으로 이것들은 포악함으로 피가 피로 뒤를 잇는다. 그 결과가 어떠한가?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거기 사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3).” 다들 그 속에 화가 많다. 화는 슬픔의 응어리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뿐 아니라 생명 있는 짐승들의 죽음이 예사롭지가 않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22).”
아이가 모처럼 연락을 하여 시간을 잡는데 이 날은 어떠세요, 저 날은 어떠세요, 하기를 지난주에 이어서다. 나는 주일에 와서 같이 예배를 드리자고 하는데 저는 그날을 피하고, 자신이 좋은 날과 시간으로 잡으려다 보니 괜찮았다가 도로 취소되기를 몇 차례였다. 아니나 다를까,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름 인사를 오겠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나 더는 예배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관심도 뭐라 하는 관여도 원치 않아 하는 것을 느꼈다. 그저 그럴 수 있는 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다들 그러하여서 마음이 어려운데, “그러나 어떤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처럼 되었음이니라(호 4:4).” 그래도 다투지 말고 비난하지 말라 하신다. 이 땅의 현상이 뚜렷하여 ‘말씀을 전하는 자와 다투는 자처럼 되었다.’ 종종 친구들과의 통화나 저들의 근황을 들으면서도 나는 어쨌든 말씀으로, 교회로, 하나님으로 풀어내야 하는 일인데 저는 그러한 관점을 거부한다. 마치 다투는 자 같이 한사코 싫어하는 투이다. 그러니 그야말로 총체적난국이라, 다 그런다고 하고, 그 나이 때 그러려니 해야 한다지만, “너는 낮에 넘어지겠고 너와 함께 있는 선지자는 밤에 넘어지리라 내가 네 어머니를 멸하리라(5).”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의미심장하다. 해가 밝은데, 말씀이 버젓이 가까이 있고 풍성한 시대인데 걸려 넘어진다. 대놓고 싫어하는 꼴이다. 그러니 말씀대로 산다고 하는 낮의 자녀들은 다른가? ‘밤에 넘어지리라.’ 은밀히, 남모르게, 자기만족에 겨워 우상을 따른다.
오늘날 우리의 우상은 무엇인가?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12).” 나무에게 묻고 막대기가 고한다. 뭔가 기형적인 세상이다. ‘이는’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림이다. 음행을 즐김이다. 자신의 취향과 선택에 따라 그 의미를 최고치로 삼는다. 아,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6).” 두려운 일이다. 누구와 통화할 때면 종종 저에게 자녀들을 위해서도 믿음 생활 바로 하라고 권할 때가 있다. 나 하나 좋다고 끝날 일이 아니다. 거의 평생을 아이들을 상대로 밥벌이를 하며 살았던 사람이라, 보면 아이의 멍들고 응어리진 슬픔의 대부분은 그 부모로부터 온 것이었다. 이상하다 싶으면 영락없었다. 안 믿는 가정은 물론이거나 예전에 교회를 다녔던 부모가 대부분이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을 때, 그 결과가 고스란히 자식들에게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또 희한하게도 저들만 모른다. 그러니 오히려 저들의 잘됨이 저들의 영혼을 망친다.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7).”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이 땅에서는 내로라하는 직장에 취직을 했고 보란 듯 좋은 신분의 처녀를 얻어 장가를 든다는데, 앞서 가르치고 함께 했던 신앙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개의치 않고 여자를 고르고 그 마음이 좋을 대로 산다. “그들이 내 백성의 속죄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그들의 죄악에 두는도다(8).” 뭐라 일러 말하고 싶은데 이를 또 듣기를 싫어하니, 모처럼 그럼 주일에 와서 같이 예배드리며 얼굴을 보자 해도 자꾸 다른 요일로 시간을 옮기느라, 나중에는 나야말로 그 본심이 괘씸하여 반갑지가 않았다. 애써 신앙을 가졌다가 자기 좋을 대로 여자를 만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언제 믿음 잃고, 신앙을 저버릴지 불을 본 듯 뻔하다. 저가 싫어하니 진실과 인애와 지식을 버린다. 저가 아무렇지 않게 들고 다니니까,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을 세상은 그저 그러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니까 그렇듯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그렇다보니 “장차는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동일함이라 내가 그들의 행실대로 벌하며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리라(9).” 주의 말씀 앞에 두려움이 앞선다.
미가 선지자도 일러,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은 이에 물 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어둠을 만나리니 점 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미 3:5-6).” 말씀이 제구실을 못하면 그 결과는 이처럼 엄연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바른 교훈을 제시한다. “이스라엘아 너는 음행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지 말지어다(호 4:15).” 직역해서 보면, 유다 너만은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라는 것인데. 히브리어로 ‘벧’은 집이다. ‘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벧엘’이라 하면 하나님의 집이다. 그런데 ‘아웬’은 허무하다는 의미다. 벧아웬이라 하면 ‘허무한 집’이 된다. 하나님의 집을 허무한 집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여러 의역이 가능하다. 하나님의 집인 자기 자신을 더럽혀 허무하게 살지 말라는 말씀이고, 말씀을 허무하게 하여 예루살렘이 아닌 길갈, 산당을 놓은 곳으로 가지 말라는 의미다.
아, 그런데 그 고집이 암소 같으니!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이제 여호와께서 어린 양을 넓은 들에서 먹임 같이 그들을 먹이시겠느냐(16).” 어쩌다 이 모양이 된 것일까? 그러다보니 허무의 골은 깊어져 “그들이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음행하여도 수효가 늘지 못하니” 왜 그런가? “이는 여호와를 버리고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10).” 그저 다만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11).” 누구를 만나 결혼을 하고, 다들 그러는 것처럼 살면서 하나님 없이 사는 삶에 익숙해져 취해버린 세상이다. 모처럼 반가운 아이의 연락과 함께 온 기쁜 소식을 들으면서도 내 마음이 어찌 슬픈 하루였다. 생각해보면 저도 참 고집이 센 녀석이라. 하긴 모든 죄가 다 그렇듯 결국 완강한 고집을 꺾으려면, 암소의 코를 뚫어 코뚜레를 씌우는 수밖에 없듯이 강제로라도 제어하고 다스리지 못하면 헛일이다. 마음은 낮이라도 소용없다. 밤이어서 더 은밀하게 군다. 문제는 그리스도께 나왔다가 돌아가는 경우이다. 실은 이것이 우리의 한계이고 어쩔 수 없는 죄의 속성이기도 하다. 다윗도 밧세바를 범하면서 하나님을 떠났고, 베드로는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의 끌려가시는 것을 보고 그 앞에서 세 번씩이나 부정하고 떠나갔던 인물이다.
그러니 인생을 돌아볼 때,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삼하 12:13-14).” 고통은 어쩌면 돌아오는 데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보다. 아이들을 대하는 데 있어 부디 나처럼 어리석은 길로 돌아 너무 멀리 돌아오지 않기를 그렇듯 바라고 바라는데….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호 14:4).” 주의 긍휼하심만이 살 길이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시편의 기도로 아멘 한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7:1).” 오직 주만이 우리의 반역을 돌이켜 고치시고 기쁘게 다시 주를 사랑하도록 하실 수 있다.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2).”
자신이 주의 자녀요, 백성인 것을 다시금 깨닫고 ‘돌아오라.’ 나는 어제 시편 34편의 말씀을 두고 ‘돌아온 자와 돌아오고 있는 자’를 묵상하며 설교원고 초안으로 작성하고 있었다. 어쨌든 우리를 ‘이 땅에서’ 건져낼 자가 없으면 찢고 뜯길 뿐이다. “건져낼 자가 없으면 그들이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시 7:2).” 오직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10).” 저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11).” 그러므로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12).” 두렵고 떨리는 마음은 오롯이 내 몫일까?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15).” 안타깝고 속상하고 슬픈 마음이었으나,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