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전봉석 2020. 10. 31. 06:07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 그들은 거짓을 행하며 안으로 들어가 도둑질하고 밖으로 떼 지어 노략질하며 내가 모든 악을 기억하였음을 그들이 마음에 생각하지 아니하거니와 이제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에워싸고 내 얼굴 앞에 있도다

호세아 7:1-2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시편 10:17-18

 

 

 

하나님의 근본적인 목적은 우리를 치료하고, 싸매시는 것이다. 어제 묵상한 6장 1절의 말씀에서도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즉 우리를 찢으심은 낫게하기 위함이고 우리를 치심은 싸매주시기 위한 것이다. 말씀을 보면 그때마다 표현되는 명칭이 있는데, 혼낼 때 또는 죄를 지적하실 때면 ‘에브라임’이라 부르신다. 그 이름의 뜻은 ‘토지, 국민, 열매, 축복’ 등을 함축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배로 받은 것을 일깨운다. 야곱을 이스라엘이라 하셨고, 잘한 일로 부를 때와 잘못했을 때 부르는 의미가 다르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을 보고 절망하여 갈릴리로 돌아갈 때 찾아오셔서 ‘시몬아’ 하고 부르셨다. 시몬은 베드로 즉 ‘게바’라 하는 이름으로 바꾸어주시기 전에 불리던 이름으로 ‘갈대’라는 뜻을 가졌다.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베드로를 부르시면서 옛날 이름을 부르신 것은 그 안에 함의가 담겼다. 이처럼 주의 은혜를 배로 받은 사람을 일컬을 때 ‘에브라임’이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그 이름값을 못하는 것에 대한 한탄의 마음이 서려있다.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다. 그러다 앗수르에 의해 아주 혼혈민족이 되듯 혼합신앙으로 변질되어버렸다. 오늘 말씀에서 ‘에브라임의 죄’는 그 이름값도 못하고, ‘사마리아의 악’은 이방신과 뒤섞인 혼합신앙을 일깨우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료하실 때, 그들의 죄가 드러난다. “그들은 거짓을 행하며, 안으로 들어가 도둑질하고, 밖으로 떼 지어 노략질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를 기억하신다. 그들은 생각하지 아니하여도, “이제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에워싸고 내 얼굴 앞에 있도다.” 하시며 하나님은 치고 찢으시는 하나님의 정당함을 알게 하신다. 그렇듯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은혜를 두 배로 받은 자들이 마땅히 행해야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죄가 아무리 끔찍하다 해도 주께 돌아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곧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은 결코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하신다.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8:12).” 곧 우리가 겪는 모든 우여곡절은 우리들로 하여금 주께로 향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1-2).”

 

친구의 전화가 울리자 나는 잠시 주께 기도하였다. 해야 할 말을 입에 담아주시기를 바라며 전화를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부친은 폐암 선고를 받았고 여든을 훌쩍 넘겨 항암치료를 할 수 있을지 못할지, 가뜩이나 신장이 안 좋으셔서 몇 해 전부터는 투석을 하고 계신 터라 항암을 하면 더 심해질 수도 있는고 하며, 친구는 부친을 집에 모셔다 드리고 돌아가면서 그간의 진료결과를 설명하였다. 걱정은 앞서고 마음은 우울하다는 게 저의 목소리에서 느껴졌다. 한참을 듣다 그러한 일을 겪을 때면 우리가 기도를 바라는데, 무엇을 바라냐? 하고 저에게 물었다.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었든지 저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구체적으로, 벌써 몇 해 전에 앞서 동생을 위암으로 보내고 뒤 너의 신앙은 어떻게 달라졌나? 하고 한 발 더 들어가서 물었다. 병들고 죽게 생겼을 때야 살려주세요, 하는 기도는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나 다를 게 없고, 각자 저마다의 신을 향해 구하고 바라는 것일 테지만. 그게 목적이면, 낫게만 하고 치료만 할 수 있다면 굳이 하나님이 아니어도 되는 게 아니겠나? 하면서 나는 저에게 저의 동생의 죽음이 나에게 더한 은혜가 컸다는 것을 고백하였다. 위암말기에 저는 이제 호스피스로 옮겨 생을 마감할 거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글방 근처에 있는 병원으로 오게 된 것이고 이는 매우 우연한 일이었다. 더 좋은 병원들도 많고 여태 치료받던 병원도 모 대학병원으로 굴지의 종합병원이었는데 굳이 글방 근처에 있는 지방의 중소종합병원으로 후송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였다.

 

나는 그때 목사고시를 두 번째 떨어졌다. 것도 한 번은 논술로 한 번은 인성검사에서 떨어졌으니, 평생 애들 논술을 가르치던 사람이 논술에서 떨어진 것도, 목사가 되겠다는 사람이 인성검사에서 문제가 있어 낙방한 한 것도, 나는 그때 마음을 접고 갈릴리로 돌아가던 시몬의 심정이었다. 하필 또 누가 화장실에 담배와 라이터를 그대로 두고 갔고, 평생 위로 삼아 피우던 담배를 몰래 피우면서 그야말로 그만둘 심사였다. 그때 저의 동생이 글방 근처에 있는 병원으로 와서 마지막으로 복강염수술을 하게 되었고, 이내 죽음을 맞기하기까지 오십일 동안 나에게는 기적 같은 날들이었다. 아침마다 저에게 갔고, 다 포기하던 사람이 저의 믿음 없음을 보고 말씀을 나누자고 하였고, 우리는 서로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고 울다, 웃다 나를 다시 이 길로 가게 하였던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누구의 임종을 직접 저의 머리맡에서 맞으며 영광스럽게도 임종예배를 드리게 하셨다. 그리고 기도 후에 저의 눈을 감길 때, 나에게 더하신 은혜가 배나 되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의 관심은 너다! 하고 나는 친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주었다. 그러자니 안 믿는 사람과 동거하며 저에게 기대어 사는 터라, 저의 이런저런 세상적인 위로가 더 가까운 상태여서… “그들이 그 악으로 왕을, 그 거짓말로 지도자들을 기쁘게 하도다(호 7:3).” 죄의 악순환을 끊을 수가 없다. 너에게 동생 죽음의 전과 후가 어떻게 달라졌냐?

 

돌이켜보면 그때마다 내 인생에는 수없이 많은 주의 손길이 있었다. 그때마다 돕는 자를 곁에 두셨고, 생소한 저들의 도움이 나를 구렁텅이에서 건져내곤 하였다. 그럼에도 ‘그저 그러려니’ 하는 죄의 악순환은 되풀이 되었고 이를 우연으로 받아들이는 이상 고통만 오고 갈 뿐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말하길, '그 일 후에' 나는 더 이상 이 길을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고 과감히 말하였다. 이게 목회냐? 하고 누가 지적해도! 교회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하고 누가 뭐라 해도! 목사가 그러고 있으면 되겠냐? 하는 안팎으로의 갈들이 계속 된다 해도! 나는 이제 하나님만 바란다. 그가 하게 하시는 일에 더는 의심을 두지 않기를 기도한다. 비록 내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고, 살림살이 하나 추스르지 못하는 주제지만 오늘 내게 여기, 이 귀한 사명을 맡기신 이는 분명히 하나님이시다. ‘시몬아’ 하고 부르시며 찾아오셨던 주님이 그때 저의 동생의 죽음으로 나를 찾아오셨고 같이 보낸 오십 일의 시간 동안 내 곁에 함께 하신 이는 주님이시다! 나는 친구에게 부디 이번에도 부친의 폐암선고와 죽음으로 이어질 슬픔 정도로 이 은혜를 받지 말기를 당부하였다. 고통이 단지 고통으로 끝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슬픔을 우연처럼 놓아두시는 게 아니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시 10:17-18).”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준비하신다.

 

우리 안에는 여러 가지 많은 근심이 늘 도사리고 있다. 그 중에 가장 어려운 난제는 하나님께 거절당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은 늘 앞서 우리의 마음을 준비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게 미덥지가 않은 마음을 거두시고,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이제 한껏 명절이 끝났는데 목마르냐? 하고 물으시며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하신다. 왜?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 6:17-18).” 그저 명절 같은 날들이길 바라면서도 인생은 늘 그 명절날 끝에 타는 목마름을 느낀다. 그러니 아직 견딜만한 돈이 있고, 능력도 있고, 위로가 되는 사람들도 곁에 있으니 굳이 하나님이 아니어도 충분한 것 같은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으라 하신다. 또한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하신다. 하나님 아닌 다른 위로는 모두 부정하다. ‘그저 사는 일’ 가운데서 우리를 찢으시고, 치시는 까닭은 그래서이다. 저가 낫게 하시고 싸매시기 위한 것이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이를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3, 18).” 나는 친구의 사연과 누구의 우여곡절을 들으며서, 늘 우리의 그 피폐한 영혼이 갈급해 하는 것을 보며 느낀다. 내가 타는 목마름으로 살았고, 그럴 때마다 주님은 손을 펴시고 내 이름을 부르셨다. 이를 이제 느낄 수 있는 것에 놀라웠다. 때로는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하는 우리의 한탄과 후회가 터져나오지만(시 10:1) 그래서 더욱 주를 향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12).” 이렇게 날마다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다.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14).” 하는 고백이 이제 내 것이 되게 하셨다. 그리하여 우리로 겸손히 주 앞에 나아올 수 있게 하시려고 우리의 마음을 준비하셨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17-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