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전봉석 2020. 11. 1. 05:53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호세아 8:1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시편 11:1

 

 

 

다급한 상황이다.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전쟁을 알려야 한다.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호8:1)” 이를 직역하면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쳐들어온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저들 각자의 소견대로 할 뿐이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그렇게 그들은 자기들 멋대로 굴었다. “그들이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난 것이 아니며 그들이 지도자들을 세웠으나 내가 모르는 바이며 그들이 또 그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결국은 파괴되고 말리라(호 8:4).” 그러니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요 혹시 맺을지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리라(7).” 이 얼마나 참혹한 일인지… 하나님이 “내가 그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하였으나 그들은 이상한 것으로 여기도다(12).” 그러니 자신들이 준비하고 바란 대로 살 일인데, “이는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1).” 그러니 율법으로는 어찌 감당이 안 되는 일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1-24).”

 

오늘 시편은 이와 대조를 이루며,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시 11:1).” 오직 주께 향하는 마음을 결의한다. 뭘 어찌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이를 주께 맡길 수 있는 것이 복이다. 가령 한 중풍병자가 있었다. 저는 자기 스스로 주 앞에 나올 수도 없는 상태였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그때 예수님의 첫 마디가 가슴을 울린다. “안심하라!” 걱정할 거 없다. 우리의 문제는 죄로 인한 것들이고 죄의 문제는 주님께 달린 문제이다.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 어쩌면 탕자의 경우도 돌아오고는 있었으나 주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를 아시고 먼저 달려 나가 저를 이끄셨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이 모두는 주께서 해결해주셔야 할 것이다. 우리 안에는 언제나 두려움이 도사린다. 이래도 저래도 두려움은 가시지 않는다. 그러나 주께서 먼저 손을 내미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때마다 주의 손길이 먼저였다. “내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 일어나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떨어지는구나(아 5:4-5).”

 

치유의 손길이 먼저였다. 나는 다만 문을 열었다. 탕자처럼 몸을 돌이켰다. 중풍병자처럼 친구들의 손에 이끌렸을 뿐이다. 이 모든 게 주의 섭리다. 그러니 오늘 호세아서의 저들은 고약한 우리 안의 죄성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이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호 8:2).” 하지만 “이스라엘이 이미 선을 버렸으니 원수가 그를 따를 것이라(3).” 어쩌겠나? “그들이 또 그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결국은 파괴되고 말리라(4).” 그와 같은 결과를 초래한 것은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그렇게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요 혹시 맺을지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리라(7).” 말씀 하나하나가 지난날을 상기시켜 내가 주를 멀리하던 때를 연상하게 한다. 뒤집어 여전히 거기에 있는 친구들을 떠올리며 가슴 아파한다. 아, “그들이 홀로 떨어진 들나귀처럼 앗수르로 갔고 에브라임이 값 주고 사랑하는 자들을 얻었도다(9).” 답답하다. 받은 바, 은혜가 큰데 한 친구의 믿음은 더디기만 하다. 곧 실명 위기가 있을 때 기도를 부탁하며 아내 손에 이끌려 가까운 교회에도 가더니, 눈이 낫자 도로 주저앉았다. 곧이어 두 골반이 괴사하여 철을 심는 큰 수술을 하면서도 기도를 부탁하더니 잘 아물어 다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자 옛 생활로 돌아갔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특별하신, “에브라임이 값 주고 사는 자를 얻었도다.” 죽어라 하고 자신이 빌어먹어야 하는 인생이라. 사는 게 늘 고단할밖에.

 

우리의 지혜는 다른 게 아니다.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호 11:10).” 어떻게 떨지 않을 수 있겠나?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암 3:8).” 인생의 우여곡절은 괜한 게 아니다. 호세아서를 묵상하면서 이를 절감하고 있다. 나의 날들도 그러하고 모든 인생의 면면들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어쩌면 또 이것이 역설적이게도 주께 돌아가는 길을 주저하게도 한다. 행여 거절당할까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강할수록 외면당하거나 받아주시지 않을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 마치 한 여자를 사랑하면 할수록 저가 떠날까봐,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길까봐, 나의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할까봐… 사탄은 온갖 두려움을 다 형성하여 우리로 지체하게 한다. 두려움은 강인함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래서 주체적으로 자신의 우상을 만들고, 자기 의지대로 사는 것에 전념하게도 한다. 가령 바울과 실라가 갇혀 있던 감옥의 간수가 느꼈을 불안이다. 이때에 저가 절망하여 자살하려 할 때,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행 16:29).” 이러한 급박한 상황이 연출되는 것은 모두 우리의 무지와 아집 때문이다. 모르면 잠자코 있어야 하는데, 무식하면 더 용감하다. 고집은 그 단적인 예이다. 도무지 들으려하지 않는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사 35:3-4).” 그럼에도 의연할 수 있다면. 오늘 시편의 말씀처럼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11:1).” 누가 뭐라 한들, 나는 결연히 주께 피할 따름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하나님을 저버린 자들의 공격은 무섭다.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2).” 그럴 때 돌아서 주께 나아오던 발걸음은 주저하고, 친구는 주말이면 접대골프를 치러 간다. 안 믿는 사장과 거래처 인사를 응대하지 않으면 여태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질까 하여, 이를 뭐라 하였더니 나더라는 사회생활을 모르니까 하는 소리란다. 그러니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3).” 공든 탑이 다 무슨 소용인가? 유다는 여러 성을 쌓았으나 모든 게 다 허사였다. “에돔에서 오는 이 누구며 붉은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이 누구냐 그의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이가 누구냐 그는 나이니 공의를 말하는 이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니라(사 63:1).” 정작 우리가 두려워하고 두려움을 더욱 갈망할 수 있는 자는 한 분밖에 없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시 11:4).” 오늘도 우리를 돌아보시는 주의 눈길 앞에서 바른 길 가게 하시기를.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5).” 날마다 그날이 그날 같으나 그날그날이 모여 주의 곁을 더하는 것이었으니,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시 38:5).” 우리의 절규는 정당하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6-7).” 그리하여 나는 주께 의지함인데, 그래서도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11:1).” 저들의 무지가 나를 찌를 때도 있다. 그러나 주는 언제나 나를 상기시키신다. “내가 내 손을 들어 너희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 곧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들일 때에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고 거기에서 너희의 길과 스스로 더럽힌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이미 행한 모든 악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미워하리라(겔 20:42-43).” 그러므로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44).” 주가 나를 돌보심은 나의 악했던 날들과 더러운 행위대로가 아니요, 오직 주의 이름을 위하여 하심이었다. 나는 이제 이것으로 안심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도 우리를 거절하지 않으시며, 내쫓지 않으실 것이다.

 

그렇듯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시 1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