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리니 그들이 여러 나라 가운데에 떠도는 자가 되리라
호세아 9:17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시편 12:6-7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지식이 없음으로 교만하고, 교만함으로 인애가 생기지 않고, 인애가 없음으로 뒤집지 못한 전병처럼 신앙이 온전하지 못하다. 그런 상황에서 오늘 본문에 이르러는 “기뻐 뛰놀지 말라” 하시고, 이는 당면한 문제, “음행하여 하나님을 떠나고 타작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하”는 것으로 문제를 바로 직시하지 못함을 알게 된다(1). 그러니 “타작마당이나 술틀이 그들을 기르지 못”함은 추수할 게 없고, 무르익을 게 없어 “새 포도주가 떨어질” 것이다(2). 곧 신앙의 즐거움을 상실하는 것이다. 결국 “여호와의 땅에 거주하지 못하”여서 “에브라임은 애굽으로 다시 가고 앗수르에서 더러운 것을 먹을 것이”다(3). 곧 저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함인데 믿는 자로 바로 설 곳을 잃었다. 그러니 “그들은 여호와께 포도주를 부어 드리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바도 되지 못할 것이라.” 이어지는 4절의 말씀이 심금을 울린다. 곧 “그들의 제물은 애곡하는 자의 떡과 같아서 그것을 먹는 자는 더러워지나니 그들의 떡은 자기의 먹기에만 소용될 뿐이라 여호와의 집에 드릴 것이 아님이니라(4).” 자신도 바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께 드려질 수도 없는 삶에 대하여….
바울의 고백이 앞서 ‘에브라임’ 하나님의 은혜를 배로 받은 자들의 옳지 못한 삶을 상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딤후 4:6).” 전제는 하나님께 부어지는 자의 삶이다. 예수님도 자신을 부어 우리로 마시게 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 11:27).” 이어서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 11:29).” 이와 같이 우리의 삶은 ‘타작마당’에서 추수하여 들이는 곡식과 같아야 한다. 반드시 때가 차면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2).” 그런데 호세아서를 묵상하면 바른 지식이 없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바로 알아야 하는 까닭은 그 자리에서 교만이 들어차 인애를 몰아내고, 바른 신앙이 자라지 못함으로 결국은 추수할 게 없어 전제로 부어드릴 게 없는 인생이다. 이는 매우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어제 주일은 그래서 우리가 ‘돌아온 자’인지, ‘돌아오고 있는 자’인지, ‘돌아오지 못할 자’인지를 살펴보게 하셨다.
‘돌아오고 있는 자’는 엄연히 ‘돌아온 자’에 속할 것이지만 그러기까지 ‘돌아오지 못하는 자’로 살고 있는 것이다. 돌아오고 있다는 것은 어쨌든 아직 돌아오지 못한 것이고, 돌아오지 못하는 자의 삶은 끔찍하기만 하다. 그래서 ‘돌아오는 자’는 돌아오면서도 불안불안하다. 자신이 비천한 데에 그대로 버려질까봐, 또는 그 사랑을 온전히 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까닭으로, 가령 교만하였던 나발이 죽자 다윗이 아비가일을 아내로 맡으려할 때, “아비가일이 일어나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이르되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전령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삼상 25:41).” 하는 심정으로 몸 둘 바를 모르겠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준비하신다고 하지만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시 10:17).” 사탄의 공격은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 그러므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저는 우리를 택함 받지 못한 자로 여겨지게 한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성령을 모독하는 자’로 살게 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이는 대놓고 주인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이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눅 14:18-20).” 결국 저들을 위해 다시 속죄하는 제사는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6-27).” 그러므로 아무런 분깃도 없고 더는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심도 없다. 은혜는 받을 사람에게 부어지고 받는 사람에게 더해진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죄 사함을 받았고 구원의 약속으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7:25).” 그러니 성령을 모독하는 자를 위해서는 기도도하지 말라고 하셨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6:6).” 이는 역설적으로도 예수께 나아오는 자, 돌아오는 자는 성령을 모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바로 아는 지식이 있을 때, 바울의 진술은 오늘 우리의 것이 된다.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19-21).” 그런데 만일 성령을 모독하는 자가 자신은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자라고 한다면 이는 진리를 흔드는 일이다. 불가능하다. 저는 예수께 나올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없다. 아무리 어려운 역경이 닥쳐도 이를 통해 주를 부르지 않는다. 저들의 한계는 하나님을 한정한다. 자신이 아는 수준에 가둔다. 지식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지식이 전부인 줄 안다. 가령 누가 묻기를 그렇다면 자신이 택함 받았는지 택함 받지 못했는지 어찌 알겠느냐? 만일 택함 받은 자라면 내 맘대로 살아도 언젠가 주가 돌이키실 것이고, 만일 택함 받지 못한 자라면 어차피 애써 수고하여 믿는다 해도 그 열심은 다 허사가 아닌가? 그러니 저의 항변은 거절이다. 에둘러 말할 것 없이 싫다는 소리다. 신앙생활을 바로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라는, 그런 나를 억지로라도 이끄신다면 사탄의 공격은 다 막아주실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트집 같은 고집을 믿음으로 간주하기 십상이다. 종종 누가 그러기를 그래서 자신은 굳이 교회를 가지 않는다고 말이다. 만일 자신이 구원 받을 자라면 뭘 해도 괜찮다는 헛소리다.
오늘 호세아서의 일갈은 두렵기만 하다.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리니 그들이 여러 나라 가운데에 떠도는 자가 되리라(호 9:17).” 저의 버려짐은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5-6).” 저들이 곧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단정적으로 말해 저들은 그래서 자신의 신념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회개할 기회마저 박차버린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 27:5).” 더는 나음도 없고, 돌이킴도 없고, 이끄심도 없다. 오직 두려움만 있다. 그러하지 않도록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이와 같은 찬송 앞에 “할렐루야” 우리는 ‘아멘’ 할 따름이다(시 113:5-9). 그리하여 주님은 잘나고 부자고 학식 많고 권세 있는 자들을 물리치시고,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눅 14:21).” 그렇게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23).”
아,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시 12:6-7).” 나는 오늘 시편의 말씀에 ‘아멘’ 한다. 아,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1).” 그저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4).” 자신의 지식으로 함몰될 따름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