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
호세아 12:6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시편 15:1
주의 장막에 머무는 삶이 복되다.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 12:6).” 이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로 고통을 통과하게 하신다. 어떤 어려움도 우연은 없고, 이를 통하여 주의 뜻을 전하신다.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든, 남들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든, 그것으로 우리를 돌아오게 하시고 주의 장막에 머물 게 하신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오늘 시편은 이에 이르는 길을 정돈하여 준다(시 15:1). 먼저는 정직과 공의와 진실을 말한다.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2).” 이는 남을 허물하지 않고 저를 비방하지 않는다.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3).” 괜한 것에 눈길을 두지 않고 주를 경외하는 자들을 귀히 여기며 마음을 다한다.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4).” 헛된 돈을 받지 않고 남을 해하지 않는다.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로써 그의 가는 길이 흔들리지 않는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5).”
친구는 떨리는 목소리로 부친의 소식을 알렸다. 폐암 중에도 소세포폐암으로 항암치료도 어렵다는 진단을 받았다. 항암을 해도 1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절망적인 소식 앞에 저는 울먹거렸다. 안타깝고 답답한 노릇이나 지금이야말로 ‘주의 장막에 거할 자’로 온전하게 돌아올 때라 말해주었다. 여전히 쭈뼛거리며 이도저도 아닌 길에서 배회하기를 그만둘 때이다. 좋을 때야 누가 뭐라 한들 듣기나 하나? 오늘 호세아서에는 야곱과 모세가 언급된다. 야곱은 낳기 전에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이 정하신 인물이다.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3-5).” 저의 한 생은 함축된 성도의 길을 예표 한다. 어떠하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 길을 인도하시며 앞서 가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우리의 하나님은 지금도 한결같으시다.
그런데 그런 남다른 은혜를 받고도,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종일토록 거짓과 포학을 더하여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호 12:1).” 그러니 “여호와께서 유다와 논쟁하시고 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2).” 저의 보응은 우리를 죽이려 하심이 아니고 살리려하심이다. 다시 돌이켜 온전히 주의 장막에 머물게 하려 하심이다. 그렇게 해서 베드로는 말씀을 만났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주께서 산돌이심을 알았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4-5).” 그리하여 마음을 쉼을 가진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나는 친구에게 이 말을 들려주고 싶었다. 저의 이런저런 상황을 열거할 수 없으나 자신도 알만한 것들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돌이킨다는 것은 손에 들고 있던 쥐엄나무 열매를 내려놓아야 한다.
기웃거리던 돼지우리에서 일어나 나와야 한다. 자신이 있던 자리가 얼마나 처참하고 더럽고 어리석었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6-17).” 안 믿는 자와의 동거는 어쩌면 저로 이 땅을 살아가는 데 있어 궁여지책이었다. 더욱이 나이 들면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이라. 그럼에도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18).” 돌이켜야 한다. 아브라함은 혈혈단신 나그네 길이었으나 말씀만을 의지하였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1-2).” 그러므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3).” 이를 듣고 가만히 있었다면 저는 여전히 우르에 머물렀을 것이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4).” 이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8-10).” 모세 또한 애굽에서의 왕관을 포기하고 그 길을 따랐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24-25).” 이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26).” 성경의 인과 과정은 오늘 날 우리의 나아갈 바를 알게 하신다. 다윗도 이 모든 놀라운 비밀의 말씀을 발견한 후에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무엇이 더 귀한지를 알았다. 참 소중한 것을 위하여는 감정에 이끌려 슬퍼만 할 게 아니다.
그러한 상황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면,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11).” 다니엘의 세 친구도 이를 알았고, 그러므로 풀무불에 던져지는 데도 굳건하였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18).” 다니엘도 사자 굴에 던져질지언정 하나님과의 기도 시간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6:10).” 스데반 집사는 목숨을 걸고 말씀을 전하였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 7:74-75).” 우리의 남다름은 위기에서 돋보인다. 어려움이 터졌을 때 남들처럼 문제 해결만을 바라면 굳이 그 도움이 하나님이 아니어도 되는 것 아닌가?
주를 바라자, 이 기회에 다시 주를 바라자. 특히 나는 저 친구에게 남다른 마음으로 그리 전하였다. 성경의 저들 인물이 보여준 것은 인간승리가 아니다. 남들이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시고 자비하심을 확신한 것이다. 당장은 고통이 오고 죽음이 따른다 해도, 불에 던져지고 사자 밥이 되고 돌에 맞아 죽게 될 거라 해도, 우리로는 그리스도가 아니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오늘을 살게 하시는 이유다. 목적이며 주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20).”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처절한 돼지우리에서도, 급박하기만 한 사자굴에서도, 마음에 찔려 이를 가는 사람들 틈바구에서도, “주는 약탈한 산에서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시 76:4).” 거기서는 “마음이 강한 자도 가진 것을 빼앗기고 잠에 빠질 것이며 장사들도 모두 그들에게 도움을 줄 손을 만날 수 없도다(5).” 그러나 우리는 주를 의지함이라.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이 잠들었나이다(6).” 우리가 믿고 의지하며 따랐던 것들이 모두가 허사라. 오직 주만이 나의 구원자이시다. 우리의 대언자되신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그러니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시 15:1).” 우리는 다만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84:10).”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하고 소중한 것을 앎이다. 부디 친구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저를 이끌어 이제 저의 남의 생이 온전히 주를 향하여 바로 세워지기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할 때 우리의 대언자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절대 우리를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그것이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이의 뜻이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39).” 우리가 붙들 것은 오직 말씀 뿐이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사 43: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