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전봉석 2020. 11. 7. 05:29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호세아 14:5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편 17:15

 

 

은혜의 회복은 이슬과 같이 날마다 주를 바라게 한다. 그렇게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5).” 하는 오늘 시편의 말씀을 먼저 음미한다. 당시 이스라엘은 4월에서 9월이 건기다. 비가 오지 않고 10월에서 3월이 우기다. 4월에 오는 비를 ‘늦은 비’라 하고 9월에 오는 비를 ‘이른 비’라 한다. 건기에는 모든 초목이 메마른다. 생명을 가진 것들은 살아남기 위해 견뎌야 한다. 그때에 이슬은 초목과 녹작물이 연명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것이다. 지중해와 요단강의 습도는 일교차가 커서 연간 260일 이상 아침이면 이슬을 내린다고 한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호 14:5).”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날마다 더하시는 이슬과 같은 은혜의 필요성을 상기시킨다. 보잘것없는 것 같으나 이를 머금고 한낮의 뜨거운 열기를 견뎌내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서 ‘네 하나님께 돌아오라.’ 호세아서는 마지막 설교를 하고 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1).” 쓰러져 기진하여 있을 수만은 없다.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2).” 말씀으로만이 살 길이다. 자신의 불의를 볼 수 있는 통로다.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는지,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3).” 말씀은 이를 알게 하고 아뢰며 구하며 주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 주님은 결코 쫓아내지 않으신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요즘 가장 강하게 붙들려 있는 말씀이다. ‘결코’ 그러니까 어떠하든지, 내쫓지 않겠다고 선언하신다. 호세아서도 이를 증거하고 있다.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호 14:4).” 언제 그랬냐는 듯 주의 진노가 가시었다. 그리고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5).” 이슬은 날마다의 것이다. 저장되고 고여 있는 게 아니다.

 

날마다 이 아침마다 주어지는 것으로 하루를 연명하고, 한 낮의 작렬하는 햇살을 피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은혜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이스라엘이 아닌가? 저들은 주의 특별한 은혜를 덧입은 백성이다. 저들을 부르실 때 항상 애칭처럼 ‘에브라임’이라 하신다. 그럴 때,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8).” ‘돌아온 자’는 지나왔던 자신의 길을 되새기며 주의 은혜를 바로 안다. 다시는 그 처절하고 절박하였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이슬은 생수의 강이 흐르는 곳과 비교할 수 없다. 척박하고 피폐된 삶의 현장에서 이슬은 절실하고 간절하다. 하지만 은혜의 장중에 싸이면 어떻게 그렇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희한할 따름이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9).” 죽어도 옛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세상 그 어떤 보화를 다 준다 해도 다시 우상과 상관하는 생활로 연명하고 싶지 않다. 이를 아는 데 있어, 주께로 돌아와야 한다.

 

날마다 더하셨던 은혜의 이슬 한 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돌아보면 나의 날들은 참으로 척박하였고, 이를 해소하려 사람들을 찾고 친구를 따르며 선생을 두고 저들이 떠벌이는 온갖 우상을 기웃댔다. 그러면서도 혹시 저들 무리에서 낙오될까 하여 죽어라 하고 그 보조를 맞추며 살았으니, 정작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지 않는 자들보다 가증하였다. 이제는 주께 돌아와 평안을 구한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시 122:6).” 주의 성전이 있는 곳이라. 그곳에서 나는 산다. 나와 사는 자를 주가 복을 내리신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3).” 나로 말미암아 주의 은혜는 막힘이 없고 그 은총은 끊어지지 않는다. 주님은 선포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 삭개오로 인해 저의 가정이 구원을 받고,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 22:17).” 아브라함으로 인해 그의 모든 자손들이 복을 받는다.

 

요셉이 복을 받음으로 보디발의 집도 복을 받았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 39:5).” 우리가 어디에 있든 그곳은 우리들로 인하여 복을 받아야 한다. 주의 관심은 온통 나에게로 향하신다. 돌아온 자의 축복이며 돌아오고 있는 자를 위하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요 며칠 초미의 관심사는 미국의 대선이다. 초박빙의 승부가 펼쳐지고 있고 역전을 이룬 이와 패색이 짙은 이의 행보는 갈린다. 전 세계를 호령하는 저들의 권세는 그래서 모든 이들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승복하지 않는 이의 억지는 볼썽사납다. 그런데 문득 드는 생각이 저는 누구보다 가진 자이다. 다시 말하면 그만큼 잃을 게 많다. 그러니 똑같은 사안을 두고도 저들의 억지는 악랄하기까지 하다. 잃을 게 많으면 쥔 것을 놓기 어렵다. 편법이든 불법이든 닥치는 대로 방법을 모색한다. 요즘 들어 우리 사회에도 부쩍 드러나는 ‘보수’의 본색이 그러하다. 가진 것을 지키려는 자들은 나누거나 덜어주는 일에 인색하다.

 

오죽하면 예수님은 저들더러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마 19:23).” 그게 얼마나 어려운가 하면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24).” 나의 짧은 소견으로 이리 연관을 짓는 것은 자신이 가진 것을 자신의 피땀 흘린 노력으로만 안다. 실은 안 보이는 곳에 목숨을 걸고 하루를 연명하며 사는 이들이 그 발판이었다. 오늘의 대기업이 또는 어느 재벌가의 부와 명예가 오롯이 저들의 것인가? 하청에 하청을 받고 이것저것 다 떼이고 남은 몇 푼으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자들의 고단한 하루하루가 모여 저들의 호화로운 한 끼의 식탁이 되고, 값을 상상할 수 없는 포근한 잠자리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요즘 일단의 모든 사회 현상에서 악의 본질과 그 사악함을 목도한다. 우스운 연관이지만 존 번연의 <악인 씨의 삶과 죽음>(크리스천다이제스트)을 읽으면서 악인의 이런저런 면모가 모두 내 이야기 같아서 등골이 오싹하다. 그러했고 그러하며 그러할 것이어서 나의 본질적인 죄의 문제를 돌아보게 된다. 전혀 자격도 안 되고 염치도 없지만 담대히 말하건대 ‘돌아온 자’로서 나는 주의 은혜의 이슬을 바라며 아침마다 말씀 앞에 앉는다.

 

지구 저편 가장 강대국의 대선을 지켜보며 저들이 자랑하는 민주주의와 기독교사상이라는 것에 실망한다. 우리나라야 여전히 설익고 덜 성숙한 민주주의의 과도기여서 그렇다 쳐도,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데는 은혜의 간절함도 없다. 있는 것들은 자신이 잘나서만 있는 줄 안다.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벽에도 눈이 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창 16:13).” 하갈의 고백이 저절로 나온 게 아니었다. 비록 쫓겨나 광야에 버려졌으나 이를 살피시는 이가 또한 하나님이심을. 나는 종종 나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그러하였던 순간순간을 음미하며 감사한다.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시 17:1)." 다시는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6).” 누구보다 나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아시는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7).” 하지만 저들은 어떠한가?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14).” 하지만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