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요엘 2:31-32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편 19:14
일상은 늘 반복되고 같은 날의 연속인 것 같으나 미미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자란다. 주께 더 나아간다. 우리에게 더하시는 고통은 고통을 위한 게 아니다. 애통하고 돌아오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욜 2:12).” 오늘 말씀의 핵심은 하나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13).” 그리하여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31-32).” 이에 따른 긴박함을 오늘 말씀은 상기시킴으로 일상의 무딘 마음을 흔들고 계신다. 이를 들을 수 있는 것이 크나큰 축복이어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 오늘 시편의 말씀도 나의 자세를 다시금 교정하신다.
가만 보면 우리 안의 죄란 동조하고 쓸려 다니는 안개 같다. 같은 부류의 사람끼리 더 나은 쪽으로 기운다.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았도다(7:14).”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데 기울어서 뒤섞였다. 진리와 비진리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자신이 좋을 대로 이해하고 향한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이는 마치 누구 때문에 어디에서 오는 게 아니라 자기 안에서 낳은 것이다. 그래서 지혜자는 “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전 9:18).” 보면 우리 자신이 공들이는 공든 탑은 무너진다. 무너뜨리시고 흩으신다. 이때 오늘 요엘서는 우리의 살 길이 주께 고하여 애통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 일깨운다. 그러하면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욜 2:14).” 다시 마음을 돌이켜 예배가 회복되고 주를 바라는 마음이 자라가지 않을까? 그럼에도 우리 안의 의심 하나가 전체를 흩을 수 있다. 문득 아이와 대화를 하다 내 안에 이는 회의와 갈등을 물리쳐야 했다. “사람은 자기의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느니라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9:22).” 주의 마음이 아니면 맥락이 닿지 않는 아이의 세계를 어찌 감당할 길이 없다.
행여 나의 어리석음 때문에 아이를 곁에 두시는 목적을 상실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들었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5-6).” 누구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혼자 앓듯 끙끙거리다 주께 내려놓는다. 돌아온 자의 가장 실질적인 은혜는 짊어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는 것이다. 마치 오랜 길을 산행하던 이가 산장에 이르러 무거운 짐을 풀고 땀에 전 옷을 갈아입고 냄새나는 몸을 씻을 수 있는 것처럼, 주 앞에 나온다는 것은 자신을 내려놓는 일이다. 그러려면 그 무게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방식은 놀랍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호 11:4).” 아직 당도한 땅은 아니지만 들어갈 그 땅의 평화와 안식을 맛본다. 주일이면 그러하고, 이처럼 말씀 앞에 앉으면 온 마음과 생각으로 음미한다.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사 40:13-14).” 주일 날 아침, 어김없이 일찍 온 아이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 내 안에 이는 이와 같이 변화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지능과 정서 장애를 같이 가지고 있는 아이의 조현증은 일상 언어가 어렵다.
이를 가르치려 들고 뭐라 이르려하면 나도 모르게 감정이 인다. 환멸이 들고 짜증도 올라온다. 무시하게 되고 윽박지르게 된다. 그럴 수 있겠구나… 왜 자꾸 엄마와 싸워? 하고 묻다 그 엄마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약물로 조절할 수밖에 없는 저의 일상 체계는 일반적이지 않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그렇듯 잠깐 또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저를 대하지만 그 가족은 덩달아 힘에 겨운 날들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어찌 저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은 관심이 없도다(욥 33:13-14).”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으면서도 나는 아이에게 자꾸 일기를 쓰게 한다. 아이는 오히려 일기 쓰는 일보다 성경을 필사하고 옮겨 적는 일에 더 능숙하다. 수동적인 것이 쉬운 것이다. 잠시 전의 일이 예전의 일과 뒤섞인다. 나는 어디서 보고 아이의 인지능력을 한 번 보았다. 동그라미와 네모, 세모를 각각 한 장씩 그려주고 이를 각각 피자라고 보자. 엄마와 형과 너와 셋이서 공평하게 나눠 먹을 것이다. 어떻게 자르면 될까? 동그란 피자는 금세 삼등분을 하였는데 네모와 세모는 이내 똑같이 나누지를 못하였다.
좀 더 이해하고 좀 더 위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것을 내 의지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하였다. “가련하고 가난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사 41:17).” 아이로 인해서 주의 권능을 구하였다. “내가 헐벗은 산에 강을 내며 골짜기 가운데에 샘이 나게 하며 광야가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이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 내가 광야에는 백향목과 싯딤 나무와 화석류와 들감람나무를 심고 사막에는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을 함께 두리니, 무리가 보고 여호와의 손이 지으신 바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가 이것을 창조하신 바인 줄 알며 함께 헤아리며 깨달으리라(18-20).” 불가능할 것 같은 가운데서 주의 권능하심이라. 그러니 나는 오직 아이를 보고 저를 감당하려 하지 말고, 주를 바라자. 주만 바람으로 더욱 주를 의뢰하자. “네가 그들을 까부른즉 바람이 그들을 날리겠고 회오리바람이 그들을 흩어 버릴 것이로되 너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겠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16).” 저의 엄마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고, 저의 심신이 지쳐 자꾸 아이와 다투고 싸운들. 아이는 그것으로 더욱 내적 갈등을 겪고 그럴 때마다 자책하며 어제와 오늘이 혼동하는 일상이었다. 그 얘기가 거기서 왜 나와? 하고 아이의 이야기를 듣다 놀라곤 하는데, 전에도 느낀 것이지만 우리는 한 장씩, 한 줄씩 읽는 것을 아이는 한꺼번에 여러 장을 넘기는 것이다. 도로 뒤로 넘겨버리는 경우도 있다. 저의 사고체계는 단순한 이해의 영역이 아니다.
그러다 뭐라 하면 눈치를 보고, 나이가 있으니 이제 갖고 싶고 누리고 싶은 것은 성인인데 억누르는 현실은 퇴행을 가져올 따름이라. 아이가 성경을 필사하고 있는 동안 나는 아이 앞에서 속수무책,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음으로 더욱 더 주의 긍휼하심만이 필요하였다. 천천히 아주 느리게, 그러나 바른 길로 흐를 수 있도록…. 그러나 세상은 어디 그런가?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느니라.” 빨리빨리 요동치는 세상이라(사 8:6).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을 뒤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골짜기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 하셨느니라(7-8).” 임마누엘의 은혜가 아니고는 감당이 안 되는 날들이라. 아이와의 일과 누구의 회피본능을 생각하다 머리를 흔들었다. 도무지 나로서는 감당이 안 되는 일들이다. 그러니 저 아이 하나로 쩔쩔매는 위인이라 나는 더더욱 주의 은혜만을 구한다. 다른 이 누구, 멀쩡하다며 의원이 필요 없다고 하는 이들까지 마음에 둘 겨를이 없다. 선생도 친구도 그렇게 내 마음을 차지하지 못하였다. 아니면 죄책감이 나를 붙들어 세운다.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7:4).” 저들의 요란한 성공과 잘 사는듯한 모습에 더는 환호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오직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오늘 요엘도 이를 진술하는 것이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욜 2:18).” 그러므로 “땅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음이로다(21).” 고로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23).” 그리하여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32).” 이로 말미암아,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