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전봉석 2020. 11. 12. 05:4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아모스 2:6-8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시편 22:26

 

 

 

은혜는 날마다 매 끼니같이 더해져야 한다. 지난주에 먹은 잔치 상으로 안 먹어도 배부를 사람은 없다. 지난해의 풍작으로 올해 농사를 소홀히 할 농부는 없다. 지난번 만선으로 이번 출항을 포기하는 어부는 없다. 지난달 급여로 이번 달은 안 받아도 된다는 근로자는 없다. 오히려 더 많은 유익을 바라듯 더 큰 은혜가 필요함을 느낀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주 앞에 내려놓고 마음이 평온하여지자, 누가 전화하여 자신을 본분을 새로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동안 박사학위를 따느라, 여기저기 교수임용을 준비하고 바라며 소진하던 마음인데 자신이 박사를 가지고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저의 전문적인 지식 때문에 사람들이 말문을 열고 다가오기 용이하고, 이를 듣고 주의 뜻을 가름하며 함께 기도하는 일에서 저는 기쁨을 더하시는 것을 알았다. 저에게 자주 해주었던 말이 있다. ‘나중에 내가 박사가 되면, 혹은 돈을 얼마큼 더 벌면, 그때는 어떻게 주를 위해 봉사해야지! 하는 마음을 버리고, <지금 할 수 있는 걸 해!>’ 어제는 뜬금없이 전화를 하여 그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결국 다 된 줄 알았던 모교 교수 자리도 못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때로는 실패와 좌절을 통해 알게 된다. 마침 그때 같은 교회 집사 내외가 이혼으로 치닫는 사이가 되었고,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듣게 된 것이 그 부인 되는 이가 먹는 약 때문에 상담을 하다 부부의 내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던가 보다. 저들을 위해 교회 기도실에서 기도하고 나오면서 내게도 전화를 한 것이다. 그리고는 ‘지금, 할 수 있는 걸 해!’ 하며 늘 자주 말하던 의미가 뭔지를 알겠더란다. 은혜란 항상 지금, 바로 여기의 것이다. 전에 어디? 나중에 어디에서의 것이 아니다. 그땐 그때의 은혜가 있고 지금은 지금의 은혜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다른 무엇이 필요한가? 저마다 자기가 알아서 할 수 있다고 여기고, 그래야 그게 또 주의 뜻인 것처럼 부추기며 은혜를 필요에 따라 요구한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자는 안다. 우리에게는 은혜 위에 은혜가 필요하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이를 위하여 우리는 기꺼이 믿음을 따라 죽는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14).”

 

이처럼 제 힘으로 어찌 애써 은혜 이상의 것을 구하려는 자들에 대하여 오늘 아모스를 통해 들려주시는 말씀은 행여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러함을 깨닫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다시 말하지만 이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것들이다.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돈이면 뭐든 희생하는 시대에 돈이 되는 일이 의인 것이다.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보잘것없는 수익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라,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어쩌다 보니 우린 남들보다 나은 삶을 위해 자신보다 약한 자를 밟는다. 그렇듯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이는 세대 간에 이어지는 죄의 습성이다.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것도 우선하여 자신을 위해 사용하고,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자신들의 만족을 위해서는 경외도 없다(암 2:6-8). 은혜의 원리는 간단하여서 나의 역약함에 대해 용서받는 일이고, 은혜가 우리 인생을 주관하게 하여야 하는 일이다. 바울은 이를 명징하게 진술하였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오늘의 나는 그 이상의 은혜였다. 마치 아직 덜 찬 것 같고, 이루어야 할 게 더 있는 것 같고, 그래야 하나님이 쓰시기게 합당할 것 같다는 자기합리가 결국은 지금의 은혜까지도 기피하게 만드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우리의 본성은 그리 착하지 못하다. 은혜가 아니면 주 앞에 나오려 하지 않는다. 나올 수 없다. 앞서 저 친구가 여러 대학에서 퇴짜를 맞고 애써 학위를 따느라 수고하였던 자신의 억울함을 걷어낼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가 매순간 함께 하셨던 것을 깨닫게 된 것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행 26:22-23).” 고로 오늘 우리가 전하는 말씀도 새로운 게 아니고, 앞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그토록 간직하고 사모하였던 은혜이다. 결정적으로 이 은혜는 우리에게 닥칠 가장 큰 어려움, 죽음을 당면하였을 때도 우리로 굳건하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평소 이를 대비하고 은혜를 늘 가까이 두고 사는 사람과 생전 그런 데 관심이 없다 덜컥, 죽음이 코앞에 닥쳤을 때 견뎌야 하는 사람의 무게는 전혀 다른 것이다. 평소의 은혜로 담대히 주 앞에 나아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의 맛을 아는 사람은 달라도 다르다.

 

첫째, 저들은 흔들리지 않는 은혜를 가졌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히 12:28).” 둘째, 더욱 큰 은혜를 사모하고 갈급해할 줄 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셋째, 이는 오직 겸손으로만 받는 것도 안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영달함은 수치가 되느니라(잠 3:34-35).” 넷째, 그렇게 겸손으로 자신의 허리를 동인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이를 통하여 그 아름다운 은혜의 고백이 자신의 것임을 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이는 거기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은혜를 사모하게 한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9:8).”

 

은혜를 받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은혜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세상의 눈으로 보는 세상보다 더 아름답고 존귀한데, 더 악랄하고 더 추한 자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음을 본다. 그래서 우리의 분별력은 단순히 이 땅을 사는 데 급급한 것이 아니라, 죽음의 날을 대비하는 놀라운 지혜를 더한다. 은혜가 아니면 그 두려움과 고통을 고스란히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은 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6-7).” 친구는 부친의 항암치료 결과를 듣는다고 알리더니 다시 전화를 주지 못했다. 내가 전화를 좀 할까 하다 그냥 두었다. 뭐라 말씀으로 몇 번 지금의 슬픔을 은혜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난 뒤였다. 평소 저는 교회를 다니고 나름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였지만 은혜를 그다지 사모하지 않아도 되었다! 적당한 남자와 돈과 건강과 다들 그러고 사는 안 믿는 이들의 고만고만한 생활이 늘 함께 하였으니, 너무 유난을 떠는 일만 같아서 은혜가 꼭 그렇게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다 덜컥, 어려운 일 앞에서 속수무책이라. 은혜는 그래서도 지속적으로 간구하는 우리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고 믿음은 은혜로 얻는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8-39).”

 

예수님도 이를 위해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9-13).” 한 마디로 축약하면 은혜 위에 은혜를 바라는 기도이다. 다윗의 기도는 이를 함축한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은혜를 받은 자는 더욱 큰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다. 은혜 없이는 하루를 살 수 없고 더욱이 죽음이 목전에 이르렀을 때 견딜 수 없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시 94:18-19).” 오늘 시편의 말씀도 이를 요약하듯 정의하신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22:26).” 자, 다른 무엇을 얻을 것인가?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27-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