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보라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이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니라
아모스 4:13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편 24:1
어쩌면 교회가 너무 사람을 위로하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 교회의 사명을 그르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우주의 중심’이란 저들의 생각에 맞추고, ‘사람이 먼저다.’ 하는 입장을 같이 가지고 가면서, 말씀은 위로와 봉사로 전락하고 신학은 심리학의 언저리를 맴도는 정도로나 족한 게 된 것인지도…. 물론 병 고침과 굶주림과 저들의 소외와 억압을 함께 하신 이가 예수이시다. 하지만 예수의 가르침이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라, 저의 ‘위격’ 곧 이 땅에 보내신 ‘성부의 뜻에 따른 성자의 본분’으로 저를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입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요한복음 1장 강해>를 읽으며 밑줄을 그었다. 마침 누구의 슬픔을 듣고 또 저의 안타까운 형편과 사정을 공감하면서 어찌 위로를 할까, 생각하고 기도하며 마음이 어려웠던 하루였다. 전날에 친구 부친의 폐암 선고에 따른 어려운 심정도 있었고, 보면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저마다의 고충과 어려움을 안고 사는 현실에서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나? 단지 위로가 전부라면 교회보다 세상의 다양한 프로그램이 더 큰 위로가 되지 않겠나? 하는 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요 며칠 ‘은혜의 연마’에 대해 깊이 묵상하게 되었다. 연마란 숙련을 통해 더 나은 기술과 익숙한 솜씨를 마련하는 것이다. 곧 은혜에 대해서도 그것이 은혜인 걸 알아야 하고, 그것이 은혜인 것을 알려면 자신이 얼마나 자격이 없고, 몰염치한 존재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상대적으로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은혜는 커진다. 마땅히 받아야 할 것으로 여기는 한 은혜는 그저 당연한 몫이고 애쓰고 수고한 데 따른 보상 정도로 전락한다. 그런 가운데 감사가 나오지는 않는다. 월급을 받고 감복하는 사람은 드물다. 늘 아쉽고 더 받아야 하는 것을 덜 받은 것처럼 개운하지 못하다. 누구도 자기 월급에 만족하기는 어렵다. 수고 만큼도 받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은혜가 그와 같다면 더는 은혜로서의 가치는 손실되는 게 아닐까? 나는 그런 점에서 베드로 사도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우리 믿음은 은혜의 결정체다. 어떤 축복도 믿음보다 귀한 것은 없다. 병 고침을 받고, 소외와 압제에서 놓여나 위로를 얻었다 해도, 그 영혼의 구원과는 무관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는 말씀은 아무나에게 주신 게 아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2).” 그러니 예수님도 어느 것이 더 귀하고, 더 시급한가? 하는 데서는 물러서지 않으셨다.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고전 12:9).” 주신 것인데, 이는 모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9:10).” 그러할 때 은혜의 연마로 우리는 더 나은 것을 바라고 구하게 된다. 날이 추워지면서 아무래도 아침 일찍 성경공부로 오는 것이 쉽지 않겠다 싶어서 그러는가, 당분간 쉬자고 하였다. 내심 잘 참고 한 주에 한 번이라도 같이 하였으면 하고 기대하였다가 내가 강요할 문제는 아니어서 아쉬움을 감추었다. 먼저는 내게 큰 은혜의 시간이어서 말이다. 그 시간을 바라는 것이 희한할 정도인데, 그리 같이 말씀을 나누며 삶에 접목시켜, 더욱이 앞으로 목회자로서의 우리 자신을 연마하는 데 서로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할 때 나는 저에게, 조금만 일찍 일어나라. 새벽을 깨우라. 한참 젊은 때이고,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쉽지 않은 일이겠으나 오롯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하루 중에 꼭 확보하시라. 무엇보다 말씀에 전념하기를. 누구를 위로하고 건사하고 봉사는 일은 교회 지체마다 맡기신 사명이 다른 것처럼, 목사로서의 역할은 마치 주방장처럼 좋은 식재료를 엄선하고 더 맛있고 더 좋은 요리에 전념하는 일이지, 인테리어나 사람들의 기호나 식성, 먹는 것을 돕거나 시중드는 일은 다른 이가 하여도 된다! 내가 감히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우리는 말씀으로 씨름하는 사명자라는 것이다. 사람들을 양육하고 보필하는 일에 너무 애쓰면 인기는 얻을지 모르나 거기에 적임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로 난 사람들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다시 음미하면 내가 어찌 하여 저들을 구원 받게 하는 게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만이 믿음을 갖고 구원에 이르는 일이면, 우리는 다만 저들에게 말씀을 먹이는 사람이다. 그런데 사람에 대해 너무 지나친 친절은 말씀보다 위로와 양육에 초점을 맞추면서, 교회가 지역사회를 돌보고 소외된 자들의 복지를 감당하며 더 나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는 정도로 전락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를 떠난다. 사람들이 교회를 필요로 하는 것은 영혼의 문제이지 삶의 문제가 아니다. 저들의 선호에 따라 찬양을 요란하게 하고, 대중음악과 같이 저들의 춤과 다를 바 없는 현란한 안무와 조명으로 다가가면 굳이 교회가 아니어도 되는 게 아닌가? 우리 본연의 역할은 예언이다. 저들의 죄를 고하고, 직면하게 하기 위해 예수의 십자가를 상기시켜야 한다. 뜯어지는 애통함을 느끼게 해야 하고, 주 앞에 나아와 무릎 꿇게 해야 한다. 그런데 주객이 전도되어 설교는 짧게, 교제는 길게. 친목은 다양하게, 말씀은 단순하게.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 변형되는 사역의 요란한 번영은 누릴지 모르나 그 사명은 잃는다. 마치 지자체의 한 주민자치센터로 전락하듯 사람들의 편의시설로 전락하고, 교회마다 카페를 들이고 서로의 교제를 위한 다양한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혈안이 돼 있다.
더욱이 목사의 자질은 대중화에 맞물려 그 인지도에 따라 부흥의 성패가 갈린다.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지만 성령이 하실 일이 없어진다. 저마다 개인방송을 가지고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대중언어를 서슴지 않고 자극적인 정치적 언사도 마다하지 않으며, 심리검사나 인정검사에 따른 결과표를 가지고 저들을 위로하고 상담하는 역할이 목사의 사명을 잃게 한다. 나 같아도 그 정도라면, 굳이 전문가를 찾아가지 어설프게 목사와의 상담을 왜? 언제부터 목사가 정신과 상담의 아류가 되었는지. 저의 위로와 권면은 사는 데 따른 것으로 퇴락하여 영혼을 건드리지 못한다. 나는 저의 만남은 단순히 위로하고 위로 받는 수준의 것이 아니라, 말씀을 사모하며 말씀으로 임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나누기를 바라였다. 요즘은 누구와 통화를 하게 돼도, 의도적으로라도 나는 자꾸 말씀으로 저의 이야기를 가져온다. 전에는 말씀을 저의 삶에 적용하여 공자 왈, 맹자 왈 ‘좋은 글귀’로 위로하려 하였다면 이제는 그 삶 너머의 영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씀으로밖에 할 수 없는, 주께 구하기를 주의 말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이유다. 가령 친구 부친의 폐암 소식에 같이 슬퍼하며 위로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고통과 죽음의 값어치는 은혜로만 받을 수 있다. 위로하며 격려하는 것으로만 말씀을 끌어오는 게 아니라, 우리의 슬픔을 말씀 앞에 꿇려야 한다. 하나님의 손길을 저에게 건네야 한다. 힘내고 훌훌 털어버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말씀의 ‘복스러운 소망’은 그런 게 아니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3-14).” 곧 저의 부친으로 인한 슬픔과 어려운 마음은 그저 빨리 치워버려야 하는 나쁜 감정으로 치부할 게 아닌 것이다. 이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아 자신을 위해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야 한다. 통회와 자복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요한은 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분명히 하였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어찌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어 주어진 삶을 잘 살아내라고 복음을 주신 게 아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그 믿음으로 우리도 생명에 이르게 하려는 것인데, 단지 부친의 임박한 죽음이 슬픔을 이겨내는 정도에서 그쳐야 한다면, 너무 아깝지 않을까? 그 의미가 뚜렷한 내세를 어느 때보다 절박하게 사모할 수 있는 기회인데, 요한은 더 쓸 게 많지만 이것으로 족하다고 마무리하였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21:25).” 성경의 관심은 우리의 영혼이고, 이 땅의 삶이 아닌 영생의 나라다.
오늘 아모스의 한 구절 말씀과 시편의 첫 구절 말씀을 나는 그렇듯 나란히 읽으며 장엄한 선포로 듣는다. “보라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이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니라(암 4:13).” 누가 우리를 살고 죽게 하시며, 이와 같은 사명을 더하시고 맡기시는가를 바로 알아야 한다. 그렇듯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오늘 현실이 우리에게 어떠하든, 나의 처지와 상황이 남들에 비해 얼마나 서럽고 궁핍하든, 그것을 해소하는 게 ‘은혜의 자리’가 아니라, 이를 통하여 주를 바라고 참 구원과 안식을 구할 수 있는 게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심이다. 나는 친구에게 곧 있을 아버지의 죽음을 두고 그 '슬픔의 자리'가 '은혜의 연마'로 값지기를 바랐다.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 결코 우리의 척박한 현실을 잘 이겨내며 사는 정도로 그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 사명을 다하는 데 있어 여력이 안 돼, 특히 코로나 사태로 목사들이 궁지에 몰려 밥벌이를 위해서도 택배나 대리운전을 하게 되는 경우가 급증하였다는 기사를 보면서 마음이 먹먹하였다. 그런데도 계속 말씀만 붙들고 씨름할래? 사람이 죽어가는데 은혜 타령만 하고 있을래? 하면서, 마치 사탄은 보란듯이 우리에게 큰소리 치는 것 같았다. 누구는 죽음을 앞두었고, 누구는 그런 부친의 모습이 안타깝고, 이런저런 삶의 슬픔에 짓이겨지는 현실에서 은혜의 연마라! 그러니 어쩐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를 아는 지식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믿고, 힘입어, 생명을 얻어야 한다. 그렇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우리 삶을 주도하시게 해야 한다. 영생은 곧 저를 아는 것이라!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무슨 치료와 어떤 위로를 더해 몇 해를 더 산들? 이 땅에서의 그 어떤 영화와 부귀는 영생의 삶과 비교할 수 없다. 괜찮다, 힘내라, 위로만 더하는 동무는 악하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고전 15:33).” 그럴 거면 세상의 위로가 더 효과적이다. 나는 친구를 에우고 있는 주변인들에 대해 경계하였다. 안 믿는 사람과 같이 살고, 늘 같이 어울리는 무리들이 ‘유한마담’들이라. 소일거리 하듯 취미 생활로 인생을 탕진하는 것과 다를 게 없어서, 저들의 위로는 좋은 데 가서 맛있는 거 먹고, 술 한 잔에 훌훌 이겨내는 것이라 한다는데, 인생 뭐 있어? 하는 저들에게서 과감히 떨어져 나오길. 하나님과 대면할 시간을 가지기를. 오늘 시편은 이를 상기시킨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시 24:3).” 은혜가 아니면 닿을 수 없고 마주할 수도 없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4).” 우리들로 하여금 한눈팔게 하는 것들로부터 비껴 나야 한다. 저들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면, 저들의 위로는 말씀을 외면하게 한다.
자,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7-8).” 곧 우리 은혜의 연마는 닫힌 문을 여는 것이다. 자신의 아집과 고약한 완고함을 뜯어내는 일이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9-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