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아모스 5:4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시편 25:14
주를 찾으면, 살리라. ‘너희는 나를 찾으라.’ 하시는 말씀이 귓가를 맴돈다. 곧 ‘주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있다. 경외함은 두렵고 기쁜 것이다. 아모스의 설교가 간곡하면서도 올곧다.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임하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으리라(암 5:5-6).” 저마다 믿을만한 구석이 있을 때는 애써 주를 찾지 않는다. 아직 젊다는 것, 누가 내 말에 귀를 기울여준다는 것, 여분의 돈이 있고, 위로가 되는 가족이 있고,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의 여유가 주를 바라는 절박함을 뒤로 미룬다. 그런 자들을 향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4).” 오늘의 말씀은 정곡을 찌른다. 실제 우리는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이 아닌가(5).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만드신 이는 여호와시다(8). 저들이 힘 있다 하나, 그 힘은 부당한 것이어서 힘없는 자를 밟고, 세를 거두었다.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11).”
요즘 부쩍 드는 생각이 공든 탑이 잘도 무너진다는 것이다. 대대로 이어질 줄 알았던 것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본다. 그 수고가 얼마나 허망하고 한심한 것이었던가? 우리 죄악이 무겁다.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12).” 그러면서도 자신은 옳다 여기는 자로 살고 있으니,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13).” 저에게 뭐라 말해줄 사람이 없다. 사느라 그저 사는 일에 전전긍긍하는 시대에,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오늘 말씀은 간곡하다. 그리고 올곧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14).” 나는 입을 열어 주께 무어라 고할까?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15).” 말씀 하나하나마다 나를 불러 세우시는 것 같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사는 게 얼마나 허망하고 처절한가?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19).” 이보다 더한 낭패가 있나? 말씀이 여의치 않아 사람과의 관계를 개선하려 드는 일에서, 이는 마치 사자를 피했는데 곰을 만나는 형국이라.
이제 좀 안도하며 자신의 집에 들어가 벽을 짚었는데 뱀에 물리는 꼴이다. 아무리 그의 처지가 어떠하든 주를 바라자고 하여도 아멘, 할 줄 모르는 이에 대하여는 이보다 더 역설적인 표현은 없는 듯하다. 저는 여전히 기댈 데가 있는 것이다. 퇴직을 해도 나름 모아둔 퇴직금이 있으니 됐고, 사회생활하며 이래저래 쌓은 인맥이 좀 있으니 저들과 함께 노년을 준비하고 함께 보내면 될 줄 안다. 정작 그 일이 곰을 마주하는 일이고, 뱀에 물리는 일이라는 것을 너무 늦어서야 깨닫는 것이다. 그러니 그제서 여호와를 찾으려니, 여느 우상을 대하듯 한다. 즉 온통 자신의 요구만 지청구로 늘어놓으며 들어달라고 하소연인데,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18).” 마치 전원 버튼만 누르면 전등이 번쩍 들어올 줄 알았다. 기도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은혜의 소통이 막힌 것을 여태 모르고 살았다. 그 묻어둔 관이 어디에 묻혔는지, 무엇으로 막혔는지조차 분간할 수가 없다. 그래도 나름 평생을 교회를 다니고, 믿는 자로 산다고 살았는데 여느 안 믿는 자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서, '관성의 법칙'에 따라 저는 하던 대로 요구를 할뿐 정작 그 값을 어찌 누가 지불하셨는지조차 알지를 못한다. 그러니 저에게 “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20).”
그동안 기뻐하지 않고 미워하고 무시던 주의 절기에(21), 새삼 소제를 드리고 화목제로 희생을 더한다 한들,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22).” 그 속이 빤한 것이다. 말씀은 단호하시고 엄중하시다. 그러니 지금 당장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23).” 자기 흥에 겨워 찬양과 예배를 이용하며 자기 소원을 구하는 자였던 것이다. 부디 이제라도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24).” 우리가 언제 ‘광야 40년 동안’에 주를 위하여 참 예배를 드렸던 적 있었던가(25). 다들 자기들 필요에 따라 물을 찾고 고기를 원하고 떡을 구하지 않았던가? 이를 마치 잘 사는 일인 것처럼 여겨 주의 이름을 부르기는 하였으나, 온통 내 요구뿐이었으니 “너희 왕 식굿과 기윤과 너희 우상들과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든 신들의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26).” 그러니 그 무게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결국 나이 들어 병들고, 사랑하는 누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비로소 ‘만군의 하나님이라’ 주를 돌아보며 부른다. 다메섹에 사로잡혀 가서야 말이다(27). 오늘 아모스의 말씀을 비통한 마음으로 들었다. 얼마나 안이하고 막연하게 살았던가를 생각하며 읽었다.
누구는 부친의 폐암 선고로 온 가족들이 패닉상태에 놓였고, 누구는 부친의 양쪽 무릎 수술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처지와 형편을 한탄하며 긴 한숨만 나온다. 누구는 퇴직을 앞두고 이 궁리 저 궁리 하느라 사람들을 만나듯 주를 향한 마음도 저울질하고, 누구는 나름 교회를 다니지만 그게 다 가족들 잘되고 자신의 일이 잘 풀리기를 바라는 푸닥거리정도로만 여겨질 따름이었다. 그러니 좀 일이 꼬이면 대뜸 한다는 소리가 ‘자신이 어떻게 믿었는데? 교회를 위해 여태 무슨 희생과 봉사를 어떻게 해왔는데?’ 하며 하나님께 지청구를 쳐댄다. 아, 우리는 모두 죄악 중에서 태어난 게 맞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이를 절실하게 깨닫고 고백할 때 주의 권능이 저를 붙드실 것이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6).” 그럴만한 가치도 없는 존재이나 어쨌든 ‘나는 주의 것’이라는 확신이 더욱 더 주 앞으로 이끈다. 예수님은 이를 엄연히 명시하시고 기도로 확증하셨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요 17:6).” 오늘 이처럼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나를 위해 쓰신 것이라는 데 나는 이제 더 이상 이견이 없다.
그러므로 날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의 기도에 간절함으로 아멘, 한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9).” 그러므로 예수님의 확신은 더욱 선명하여진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10).” 오늘 나에게 더하시는 이 모든 날들의 목적은 주께 영광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 단지 기쁨의 환호만이 아니라 슬픔의 절규도, 안일하고 낭만적인 미래를 꿈꿀 권리를 그 현실을 딛고 살아야 할 의무로 바꾸신다. 이제 나는 확신하기를,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시 25:3).” 나는 전혀 그럴 가치조차 없는 존재이나, 주의 것임을 붙들고 의뢰한다. 그러므로 나에게 가르쳐 보여주시라, 구하고 또 바란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4).” 단지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고통이 변하여 평안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그 가운데 임재하시는 주의 진리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5).”
가령 어떤 날은 나의 불안이 너무도 터무니가 없다. 아주 나른하고 아무런 요동도 없는 토요일 아침, 어떤 불안으로 숨을 몰아쉬다 하루치 안정제를 오전에 모두 먹었다. 그러면서도 평소대로 아침 일찍 교회로 올라가 새벽에 말씀 묵상한 글을 다시 읽고 묵상하다, 누구를 생각하고 저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이 얼마나 평온하고 고요한 시간인가? 아침마다 이처럼 새벽에 깨우시니, 고요히 말씀 앞에 앉아 평온할 따름인데도 몸과 이성이 현실로 돌아오는 것인가? 얼마쯤 지나면서 불안이 엄습하고 몸의 반응이 온다. 나는 가만히 안정제를 삼킨다. 왜 이러지? 하고 더는 묻지 않는다. 아무리 그 원인을 생각해도, 또 누구에게 물은들 뾰족한 수가 없다. 나는 얼마 전부터 '이것까지도' 주의 허용과 섭리 가운데서 나를 여기에 두시는 주의 뜻으로 받는다. 즉 나의 불안이나 초조함까지도 선으로 바꾸시는 것이라 여긴다. 나로 하여금 주를 갈급하게 한다. 아니면 내가 언제 이처럼 말씀 앞에 앉겠나? 이처럼 주의 말씀으로 누구를 생각하고 또 저를 위하여 중보하겠나? 불안이 아니면 자중하지 못할 것이고, 자중하지 않으면 예전처럼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뭐라도 내가 스스로 하려 했을 텐데. 이와 같은 주의 긍휼하심은 오늘도 나로 말씀 앞에 꿇게 하신다. 이는 예전부터 있었고 내가 미처 알지 못하고 악을 추구하던 때에도, 더 오래 전 영원부터 주께서 예비하신 것이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6).”
그러하오니,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7).” 아무도 알 수 없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나의 이러한 '고요한 불안'을 나는 이제 사랑히기로 하였다! 이것으로 주의 선하심과 정직하심을 알고, 나 같이 쓸모없는 죄인을 교훈하고 계심을 확신하면서 더욱 주를 의지한다.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8).” 바로 이것, 그처럼 질병과 고통과 슬픔까지도 하나님은 선으로 사용하시는 것이고, 주의 인자하심 앞에서 우리의 죄악은 드러난다. 이제 나의 불안을 이를 수긍하게 하는 지혜인 것이다. 그렇듯 나를 온유한 자로 만드시는 여정이라, 그리 확신한다. 곧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9).” 나로 온유한 자 삼으시려고! 이 모든 여정이 주의 길이고, 그의 언약과 증거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데 가장 적절한 방법이 오늘 나의 불안이라면,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10).” 그러므로 나는 감사하겠다. 그리고 아뢴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11).”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12).” 이처럼 말씀이 구절구절마다 나로 하여금 나의 하나님과 나로 친밀하게 하려 하시려고!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14).”
그리하여 나는 이제 말씀만 바라기를 바란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15).” 더는 다른 누구, ‘벧엘’이든 ‘길갈, 브엘세바’든 어디로도 기웃거리지 않게 하소서. 오롯이 말씀으로민 의지할 수 있게 하시고 이를 위하여 내게 허락하시는 불안이 또는 몸의 나약함과 고충이 더는 나의 적이 아니라, 동지이고 아군이 되어 나를 바르게 인도하는 든든한 지팡이가 되게 하실 것을. 나의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그 안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하려 함이라. 때론 외롭고 괴로우나, 근심이 많고 고난에 끝도 없이 나를 끌고 다니려하나(16-17), 주는 나의 이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나를 더욱 죄에서 사하신다(18). 그러므로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20).” 더는 다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게 하시고, 오직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