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전봉석 2020. 11. 16. 05:52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이여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르는도다

아모스 6:1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시편 26:2

 

 

 

여러 처지와 환경을 둘러대며 그럴 수밖에 없는 자신을 아무리 두둔한다 해도, 우리는 교만하다. 있으면 있어서 교만하고 없으면 없음으로 교만하다. 이는 자신이 어찌 해보려는 모든 의지에 따른 것이다. 오늘 말씀이 그리 경고한다. “화있을진저 시온에서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이여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르는도다(암 6:1).” 시온은 하나님의 존전이다. 믿는다 하는 이의 마음이고 나름의 신앙이다. 거기서 교만한 자의 특징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이다. 스스로 높이 두어 이를 추구하는 의미이며 그리 여기려는 마음이다. 저마다 ‘백성의 머리’가 되고 싶다. 스스로 구축하는 삶의 보람이겠다. 나름의 이상이다. 저는 누구의 시선을 구한다.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르는도다.’ 대중이 서로 어울린다. 서로를 응원하고 결집하여 세력을 과시한다. 모든 ‘사마리아 산’의 구조다. 그런 점에서 오늘 시편의 말씀이 절실하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시 26:2).” 은혜를 연마해야 한다는 생각에 주어진 모든 것이 맡기신 바, 자기 자신까지도 자기 것이 아니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내가 나를 내 것으로 삼을 때 ‘백성들의 머리’가 되는 셈이다. ‘화있을진저!’ 정작 두려움은 그렇다면 자신이 그 몫을 다 감당해야 한다.

 

주일 아침, 누구와의 연락으로 내내 마음이 어려웠다. 나름 열심을 다해 자신의 삶을 구축하려는 것이니 응원을 해주어야 마땅하겠는데 나는 선뜻 그리할 수 없었다. 안다. 저의 안타까움과 불쌍한 처지를 이해한다. 그런들? 나의 앎과 이해가 무슨 의미인가? 형도 응원해줘요! 하는데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화가 났다. 평생을 고아로, 장애로, 그 외로움과 고독함을 짊어지고 혼자 살아온 인생이라. 강박적으로 열심을 다해 살려는 그 노력은 가상하다. 다시 말하지만 안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안 됐고 늘 미안하고 같이 서럽다. 그러니 나의 위로나 응원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값싼 은혜를 구하고자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구주로 믿는가? 아니다. 그런 게 아니어야 한다. 단지 병고치고, 외로움을 달래고 위로하고 다독이며 잠깐 곁을 같이 하고 식탁을 나누는 정도를 위해, 이를 섬김이라 하며 이 땅에 구주로 오신 게 아니다. 교회가 여느 서비스업종의 휴식과 즐거움으로 전락해서 되겠나? 복음이 고작 이 땅에서 우리가 사는 정도에 관여하여 배고픔을 달라고 목마름을 해결하는 정도로 은혜라 하면 되겠나?

 

저는 어디 장애인직업학교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미 그리 결정을 한 일이다. 어떨까? 하고 물으면 당연히 뭐라 할 줄 알았는지, 주일 예배를 마치고 오후에 기숙사로 들어가 2년간 학업을 하기로 하였다고 알렸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형도 응원해주세요, 하는 소리다. 속상하고, 화가 나고, 서러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저의 처지나 강박적인 인생의 고단함이 안 쓰러웠다. “화있을진저! 시온에서 교만한 자”는 곧 우리 자신의 일을 우리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바라고 의지하는 일에 보다, 사느라 사는 데 더 열심을 다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샘물을 곁에 두고 물을 얻고자 웅덩이를 파고 거기에 물을 모으려는 처사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우리가 그러지 않나? 얼마나 절묘한가? 믿는다 하며 생수의 근원 곁에 산다고 하면서도 스스로 뭘 자꾸 해야 한다고 여겨 하나님을 자꾸 뒤로 한다. 그러면서도 이를 한사코 아니라고 하면서, 자신의 의를 모르는 척, 그게 아닌 척 외면하면서도 스스로 웅덩이를 판다. 살 궁리를 해야 하지, 턱을 괴고 하나님만 바라기에는 미덥지가 않다. 그러고 있으면 '이 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할 거 같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계 21:6).” 하시는 말씀을 기다릴 능력이 없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올해 초 코로나가 창궐할 때, 저는 주의 은혜로 생각보다 많은 금액의 퇴직금까지 말끔하게 정산하고, 밀린 월급 없이 회사를 쉬게 되었다. 나는 빚 없이 그래도 나름 성실히 모아둔 것이 있으니 이참에 말씀을 가까이 하고 주와 함께 하는 시간을 좀 훈련하였으면 하고 권하였다. 가뜩이나 여기저기 몸도 안 좋고 아픈 데가 많은 처지라, 이럴 때 병원에도 좀 다니면서 몸도 돌보고, 마음과 영혼도 보강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였다. 특히 주의 자녀로 산다고 하면서 진득하니 앉아 혼자 성경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고 하니, 한 번 읽어보라. 써보라. 여러 방법을 제시하며 권하였다. 그런데 채 일 주일을 못 참고 누구를 만나고, 어디 일자리를 구해서 하다못해 아르바이트로라도 몇 푼 받고 일을 하고는 하였다. 그나마 일도 없으면, '그 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서 저들 자리에 끼고 넋두리 하며 여기저기 일 자리를 부탁하고는 하였다. 그러는 일들이 다 혼자 그리 결정을 하고 난 뒤에 내게 통보를 하듯 연락을 하는 것이라, 나는 늘 더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사람 관계란 아무리 가깝다 해도 뭐라 할 수 없는 거리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오히려 저마다 하는 일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11).” 독주나 포도주는 '자기 위로'라. 아침부터 취하고, 밤이 깊도록 일을 해야 위로가 되고, 어디라도 가고, 누구라도 만나야 하는 게 자기 나름의 수고이다 보니. 이는 거짓이라 말해주어도, 저들은 바로 그 일시적인,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18).” 그러는 일의 과부하가 이중 삼중 두텁게 저를 끌어갔다. 친구를 찾고 취미를 찾고 어디 좋은 휴양지로라도 가서 이를 즐길 수 있는, 적당한 체력과 돈이 있어 문제 없을 것 같다! 이것들을 꼬아 엮은 줄로 자신을 이끈다. 말씀은 어렵고 복음은 따분하다. 위로와 쉼만을 구하는데,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0).” 다 하나같이 세상에 안 믿는 자들이 추구하는 이치와 같다. 그러니 누가 복음을 말할 때 말씀으로 위로나 받고 격려와 응원 정도이면 족한 것이다. 내 삶을 복음에 맡길 수 없다. 안 보이는 하나님보다, 막연한 구원의 약속보다 100% 취업보장이 되는 기술학교교육이 낫고, 내 말에 장단 맞추고 같이 흥얼거려주는 술친구가 낫다.

 

오늘 저 친구의 결정도 그와 다를 게 없었다. 심지어 나에게는 들으라는 듯, ‘심장이 좋지 않아 저 오래 못살아요!’ 하는 내용의 문자를 엄포인지 고백인지 보내서 사람을 더 긴장하게 하였다. 하긴 기형적인 몸의 장애로 심장뿐이겠나, 남들보다 비대한 심장의 크기가 과중하게 운동하고 있으니 여느 사람들보다 위험부담이 높다는 소린데, 그럴 것이란 소리를 그렇다고 전달하면서 나에게 겁을 주듯하니, 그런 가운데서도 열심을 다 해 살려고 한다는 소린지, 나더러 기도나 하라는 소린지, 내게 다가오는 것은 더 큰 안타까움과 답답함뿐이었다. 그럼에도 이제 곧 마흔여섯인데, 보다 나은 삶을 꿈꾸며 새로운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기술학교에 입학하기로 했다는 것이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어떨지. 대견하게 여겨 축복하고 응원해주어야 마땅하지 않겠나? 나도 갸우뚱하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1).” 나는 이상하게 말씀 앞에서 저를 흔쾌히 응원할 수 없었다. 훗날 우리가 주 앞에 섰을 때, 인생 참 열심히 잘 살다 왔다 하는 칭찬으로 판가름나는 게 구원인가? 그럴 거면 안 믿는 이들의 자기주도적인 삶의 역동적인 자세가 얼마나 훌륭하고 존경할만한 것이 더 많은가?

 

주일 아침에 아이가 일찍 와서 더는 통화를 할 수 없었으나, 그 기술학교가 어디에 있는지, 몇 년 과정인지, 왜 꼭 그래야 하는지를 물어보다 단도직입적으로 야단을 치듯 뭐라 좀 했다. 단지 이 땅을 열심을 다해 잘 사는 게 우리 신앙의 목적이라면 그게 더 억울하지 않을까? 대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는 것일까? 세상 학문이 그리 가르치지 않던가? 용기 잃지 말고 씩씩하게 잘 사는 거, 열심히 벌어서 보람되게 사는 거, 그게 옳고 바른 삶이라는 거, 그런데 나는 그 용기로 좀 더 하나님을 바로 아는 데 쓸 수는 없을까? 싶은 것이다. 꼭 다들 내 집을 마련해야 하는 것일까? 그놈의 아파트 한 채에 젊음을 다 바치고, 노후가 어쩌고 하면서 보험들고 연금 받을 생각으로 희생하는 삶이 전부일까?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2).” 모든 게 자기만족이다. 나는 속상하고 답답하여 뭐라 하다, 어쩌겠나? 싶어졌다. 몸 잘 챙기고, 부디 주의 은혜가 그럼에도 함께 하실 것을 믿으며 통화를 끊었다. 순간 어떤 알 수 없는 서러움이 복받쳐 올라왔다. 산다는 게 다들 참 고단하다. 사느라 너무 애써 산다. 자신의 그 애씀을 다들 훈장처럼 가슴에 새기며 자랑스러워한다. 아,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29:15).”

 

이 아침 이사야의 질책에 나는 귀를 기울인다. 차라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오히려 가장 큰 복이겠다. 옴짝달싹 못해 오롯이 주만 바라는! 더는 손 쓸 수 없을 때가 곧 올 텐데, 사람의 본성이란 참 미련하여서 어찌어찌 자기가 어찌 해보면 할 수 있을 거라 여긴다. 죽을 날을 받아놓고도 죽음을 준비하기 보다 살려고만 든다. 그리 분주하여 주를 찾지 못한다. 그럴 시간이 없다. 그러느니 한 사람 더, 일 하나 더, 사과나무를 한 그루라도 더 심겠다는 소린데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31:1).” 그러느라 쏟은 열심은 열심히 열심을 다하고 수고한 만큼 억울할 따름이다! 서러움으로 자신을 옭아맨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하는. 나를 지으시고 오늘도 여기에 두신 이의 뜻은 개나 물어가라고 버려두고 저 혼자 끝까지 발광하다 죽음을 맞는다. 이는 저마다 그 이상과 꿈을 현실로 이루려, 진취적으로 삶을 숭배한다. 형도 응원해줘요, 하는 저의 문자에 나도 그냥 '잘했다, 파이팅!' 하고 말았어야 하는 것일까?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45:9).”

 

오늘 아모스의 말씀에서 나는 나에게 주어진 삶을 그리 살아서는 안 된다고 이해한다. 가령 지금 내게 두신 어려움, 닥면한 문제, 슬픔과 고통 같은 것을 무작정 개선하는 게 상책이 아니다. 그러면 좀 더 나은 세상이 될까? 인생이 좀 나아졌는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로 살면 사는 데 따른 보람은 있을 수 있겠으나, 산다는 의미가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소리로 들린다. 스스로의 노력을 가상히 여기는 마음 그 자체가 교만이라! 아,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시 26:2).” 오늘 시편의 기도는 주를 바람이다. 왜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일까? 오늘 본문(아모스)을 좀 더 보면,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 하여 포악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하고” 아직 그렇게 절박하지가 않다. 기력이 있을 때 뭐라도 열심히 해야 옳은 삶일 것 같다! 나름 살 길이 암담하다 하나, 아직 주를 찾을 정도로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러니 스스로 옳다 여기는,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사는 것을 추구한다.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그렇게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 복이라 한다. 그래서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암 6:3-6).” 

 

아, 그러니 우리의 절규는 그저 부끄러운 것일까? 부디 나의 남은 생은 사느라 사는 데 다 허비하지 않기를. 오늘 다윗의 안타까운 심정으로 주께 드리는 기도를 읊조리며 같이 아멘, 한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시 26:2).” 행여라도 나 잘난 줄 알고, 여전히 내가 어찌 잘 살아보려고 사는 삶을 살게 하지 마시고, 내가 어찌 할 수 있다고 여기는 나의 이 교만의 '사마리아 산'에서 나를 끌어내려 주시기를. 다만 오늘의 처지가 어떠하든지, 이는 모두 주께서 맡기신 것이라 여기며,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12).” 아멘.